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
집어 먹으려고 했던 떡 한 점은 이미 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치사하다고 콧방귀를 뀌며 차 한잔 마시려는데 찻물도 동이 나 있었다. 참다 참다 빈 그릇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 둘째는 상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일어났다.
“아니. 작작 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어떻게 시어른 어려운 걸 몰라. 쟤는.”
가족 화합이라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달에 한 번 삼형제가 모이는 날이었다. 희사는 이번에도 식구라며 산영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나니, 격조하던 형제의 우애 다지기는 물 건너가고 새 식구가 된 산영의 먹부림이 시작되었다.
근자에 들어 입이 심심한 걸 못 견디겠다는 산영이 떡이든 국수든 상에 올라오는 족족 가져다 먹기 바빴다. 결국 손도 못 대본 둘째는 분통이 터져 날뛰는데 희사든 첫째든 도와줄 생각일랑 없어 보였다.
“제수씨가 좀 드실 수도 있지.”
희사가 타락하였을 적에 어떻게 아우를 제 손으로 죽이냐며 열흘 내리 통곡했던 첫째였다. 아우를 찔러 죽이는 업보를 짓지 않게 산영이 구해주었다며 눈 뜨고 못 봐줄 극진한 대접을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희사야 말할 입이 아팠다. 애당초 그릇이란 그릇을 산영의 앞에 가져다주는, 팔불출의 꼴 보기 싫은 짓은 다 하고 앉았다.
“희사 님.”
굶어 죽은 아귀가 등짝에 붙은 거 아니냐고 한소리 하려 할 때였다. 산영이 희사의 가슴팍에 찰싹 붙어 손으로 배를 쓸어댔다.
“그 떡집이 아직도 있을는지요.”
“글쎄.”
“또 먹게?”
하나 둘째의 경악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연정에 눈이 멀고 귀를 닫은 희사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하늘 천지에 무도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내가 부인의 말에 껌뻑 죽는 것을 알면 차례차례 졸도하게 생겼다. 둘째는 지겨우리만치 입술을 나누는 동생 부부의 행태에 어디 가서 항의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저것들 봐라. 치를 떨수록 여봐란듯이 붙어 안고 있었다. 희사의 팔이 산영의 허리를 들어 안아 올렸을 때 둘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허벅지에 올려두고 편히 입술을 먹기 위함이리라. 예상한 바와 같이 남녀의 입술이 섞이는 소리에 술맛이 떨어졌다.
“얼마나 좋으면 저러겠니.”
한 명은 염장 지르는 데에 능하고 한 명은 도를 닦는 노인이었다. 더더군다나 첫째는 아우가 제약을 깨고 혼을 얻은 후로 그의 의견에 토도 달지 않았다. 아비가 희사만 편애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인데 저 답답이는 아비는 그렇게 해둔 뜻이 있을 거라며 인자하게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연유로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의논해야 하는 것도 많은데 희사 놈은 묵묵부답인 데다가 산영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니 통 짬이 나질 않았다.
만나자마자 입술 부딪치며 서로 좋아 죽는 것을 다 아는데 이제는 배알이 꼴려 저 꼴을 못 보겠다. 재회 이후로 한층 더 강력한 부부가 되어 나타나 복장을 뒤집는 것을, 심통 난 둘째는 저 부부 사이에 돌멩이 하나쯤은 던지고 싶었다.
“산영아. 아니, 제수씨.”
희사의 품에 폭 안겨 입맞춤이나 흠씬 당하고 있던 산영이 고개를 들었다. 제 형님이 불렀음에도 부인의 뺨에 꼭 붙어 있는 저 입술 좀 보아라. 이제 민망도 수치도 옛말이 되어버린 저 원앙 부부에게는 따끔한 말이 필요할 터였다.
“다름이 아니라. 땅에는 언제 내려가시나?”
아무리 원앙 부부, 연리지 부부라고 할지라도 약점은 있는 법이었다. 더욱이 희사 놈이 일하다가도 한숨을 늘어지게 쉬는 연유를 알고 있었다. 땅으로 얼굴도장을 찍고 내키면 이삼일은 돌아오지 않는 부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경우였다.
요즘 땅은 전쟁으로 한창 난리이니 그 때문에 불이 나기라도 할까 산영이 자주 들락거리는 걸 알고 있었다. 역시나 산영을 보내기 싫은 희사의 눈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둘째에게 관심 한 톨을 안 주다가 아주 쌀가마니로 던지고 있었다.
“아니. 언제 내려가나 해서. 떡집도 가야 하고 바쁘신 것 같으신데.”
한 방 먹인 것이 뿌듯하여 킬킬거리고 있으니 첫째가 한심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데 싸늘하게 얼어붙어야 할 희사가 웬일로 봄날에 핀 꽃처럼 화사하기만 하다.
“하늘에 며칠 묵고 있으려고요.”
“으잉?”
“희사 님 생신이라서.”
뜬금없는 말에 첫째도 둘째도 먹던 술을 뿜을 뻔하였다. 태어난 날을 기린 적도 없거니와 뭣보다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슨 재주로 희사의 탄신일을 아는가 했더니 이미 두 사람은 합을 맞춘 것처럼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 희사 님한테 혼이 생긴 날을 탄신 날로 정했지 뭡니까. 해서 매해 조촐하게 잔치를 열어 둘이 기리고 있지요.”
희사 놈이 요 며칠 과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다. 혼 없는 놈 어디 서러워 살겠나. 한데 저 형님은 속도 없이 축하해 주고 자빠졌다.
“그랬구나. 좋은 일 하네.”
“나도 혼인이나 할까 보다.”
서럽다 못해 외로운 둘째의 선언에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눈이 동그래졌다. 귀찮다고 여인 손 한 번 잡기가 어려운 이가 그리 말하니 재미난 것이었다. 희사는 산영의 뺨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둘째를 놀렸다.
“하면 산영이 같은 여인을 만날 줄 알아?”
“어림도 없지요.”
제 눈치를 봐서 참고 있었던 첫째마저 배를 잡고 구르기 시작하였다. 구왕 나무 근처에 새살림을 차린 희사 덕에 오늘 모임은 거기서 열린 참이다. 구왕 나무에 채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질 만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둘째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지. 어쩌면 첫째의 말처럼 서로 칼부림 없는 것만 해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조그마한 초가집에는 그 날이 다 지나도록 웃음의 씨앗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 * *
옥룡산에는 영교 언니의 환생인 연선이라는 사람이 묵고 있었다. 하필 태어난 시기도 환생한 시기도 태평성대가 지나고 분열이 일어나는 시점이었다. 또 희사의 탄신 잔치와 맞물리는 바람에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일단 식구들에게 맡기고 나온 참이었다. 원하는 만큼 머물라고 내려가 언질을 주어야 하는데 잔치를 한다고 들뜬 희사를 보니 옥룡산으로 내려간다고 얘기하기가 껄끄러웠다.
“산영.”
“예?”
산수 고원의 그 떡 맛이 잊히지 않아 꼭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고 저가 더 난리를 친 참이었다. 잔치에 필요한 재료를 산다는 핑계로 산수 고원 장터까지 내려왔건만. 옥룡산에 둔 사람 걱정 때문에 한눈을 판 모양이었다. 벌써 떡집이 가까운 것을 보고 산영이 과장하며 손뼉을 쳤다.
“아유! 벌써 다 왔네.”
희사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는데 말로 하지 않아도 제 속마음을 다 안다는 것이었다. 뜨끈한 김이 지붕에서 솟는 떡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나 산영은 탄신 잔치를 앞두고 걱정을 끼치기 싫어 함구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희사와 깍지손을 끼고 떡집으로 당당히 들어섰다. 일전에 방문하였을 때는 정인인지 아닌지도 분명하게 해두지 못했었다. 떡집의 종은 예전 그 사람이 그대로 맡고 있었다. 종도 산영을 알아본 것인지 함박웃음을 띠며 문간으로 마중을 나왔다.
“아니, 이게 얼마나 오랜만이십니까.”
떡집의 종은 눈치가 빨라 예전 그 창가 자리를 고대로 내어주었다. 옛 기억이 물씬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산영은 감회가 남달랐다. 당시는 구왕 값을 갚기 위해 희사의 종이 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하다 여기가 사람의 신력을 사고파는 장터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저 말고 다른 종을 들이는 줄로만 알았지 무언가.
“희사 님.”
“응.”
희사는 들어오자마자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이리도 선명히 보이는 감정이 옛날에는 바다에 던져둔 바늘 찾기 같았다.
“연모합니다.”
사람이 오고 가는 장터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을 고백할 수 있는 게 부부의 특권이 아니겠나. 희사의 흔들리는 동공이 멎고 미소가 깊어질 즈음 떡 한 말을 가지고 오는 종이 보였다. 산영은 희희낙락하며 떡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희사는 어쩐지 김이 빠지는 얼굴로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나왔습니다.”
모자라면 언제든 말하라는 종의 말이 참으로 든든하였다. 산영은 뜨거운 떡 한 조각을 집어 후후 불었다. 낭군에게 먼저 맛보시라고 건네는데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마.”
“참말로요?”
그럴 줄 알았다. 예의상 권하던 것을 도로 물려 입 안 가득히 떡을 넣었다. 상상하던 맛을 떠올리며 기대에 젖어 있었다.
“웁!”
한데 입 안에 다 넣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리더니 떡은 잇자국만 내고 그릇에 떨어트렸다. 나올 적부터 쉰내가 난다 싶더니만 맛을 보니 며칠 묵은 듯한 맛이 났다. 산영이 도리질하며 그릇을 밀어내었다. 희사는 냉큼 떡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희사 님.”
“응.”
산영은 떡 그릇을 더는 만질 생각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며 희사의 눈치를 살폈다.
“죽이면 아니 됩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떡 좀 상하게 만들었다고 죽일까 걱정이었다. 산영은 희사의 미소를 곡해한 것인지 팔짝 뛰며 손사래질을 했다.
“맛이 상한 것이 아니라 오늘따라 잘 안 먹혀서 그런 겁니다.”
전혀 놀릴 생각이 없었으나 저리 팔짝 뛰면 놀리고픈 마음이 생긴다.
“떡을 만든 이는 옥룡산으로 내려보내 맛난 떡을 만들 때까지 구금하고. 저 종은 상한 떡을 날랐으니 평생 너를 업고 다니라 할까.”
“희사 님!”
대놓고 놀리는 걸 뻔히 알고 산영이 허탈하게 웃었다. 떡은 아쉽게 됐다만 이리 나와서 희사와 추억을 다지는 기분이라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남은 떡은 아까우니 버리지 말고 술을 만들어야겠다. 해가 적당히 물러서는 것이, 탄신 잔치하기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