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25
124화
장터를 한 바퀴 돌아 하늘에서 나는 귀한 식재료들을 구해온 참이건만. 산영은 체기가 떠나지 않아 초가에 추욱 퍼지게 앉아 있었다.
떡 냄새를 맡은 후부터 속이 울렁울렁하더니 초가로 돌아오자마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방 안은 문을 닫아두면 답답한지라 대청으로 나와 대자로 누워버렸다. 희사를 위한 잔치를 해야 하는데 열 기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희사가 이 꼴을 보기 전에 수습해야 하거늘. 산영은 손가락 까딱할 힘이 없어 몸만 데구루루 굴러 눕는 자세를 바꿨을 뿐이었다.
대청으로 바람이 간드러지게 불어와 재우는 것 같으니. 더도 말고 일각만 자자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각오냔 말이다.
꿈속에서 새파란 강물을 보았다. 나룻배를 타고 다니는 뱃사공 하나가 바삐 노를 저어 다가오고 있었다. 강물 위로 하얀 연기가 드리워져 있어 분간이 가지 않았다. 뱃사공의 얼굴이 깜깜한 것이 아는 이는 아니었다. 하나 산영은 달리 갈 곳이 없어 그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뱃사공은 산영의 발이 나룻배에 안착하자마자 노를 저어 강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말수가 적은 뱃사공을 보며 치마를 정리하고 있는데 저기 사람이 없던 강가에 새까만 인영 하나가 보였다. 미간을 모아 유심히 들여다보니 산영의 낭군이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반갑다고 인사를 해주는 것인가 싶어 마주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으나 희사의 질겁한 표정이 보였다.
저분이 왜 저러시지.
뱃사공에게 뱃머리를 돌리자고 말할 때였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무소식으로 대응하던 뱃사공의 몸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푸라기로 채워진 허수아비가 거기에 서서 노를 젓고 있었다.
위험하니 이리 내려오라고 울부짖는 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허수아비는 노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고 나룻배는 저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만난 참이었다.
다급하면 엄나무도 잡는다고 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희사가 몸소 강물에 뛰어들었다. 산영이 그러지 마시라 울음을 터뜨릴 때 나룻배가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헉 소리를 내었다.
“아악!”
대청에 올라와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작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버렸다. 악몽을 꾼 탓에 속적삼까지 땀으로 축축하니 젖어버렸다. 꿈이라 다행이라고 여기기에는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 혹여나 이것이 악화된 병증을 말해주는 꿈일까 봐 산영은 겁이 나기 시작하였다.
희사는 산영이 감모라도 걸리면 그날 일을 다 접고 내려와 시중을 들었다. 하나 감모 따위가 아니라 중병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죽으면 환생을 한다지만 억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희사가 가여워 어쩌나. 아픈 티를 내지 말자며 이마에 난 땀을 다급히 소매로 찍어내 닦았다.
“일어났어.”
“예?”
언제 왔는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희사가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장터에서 산 쌀가마니를 들어 빈 광주리에 나르는 중이었다. 희사가 없을 적에도 하늘로 놀러 와 밥을 지어 먹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하나 산영은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데 비명은 왜 질러.”
광주리에 걸쇠를 잠근 희사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 저 목소리 기저에 깔린 것은 궁금증과 염려일 거였다. 산영은 땀 자국을 지우며 허허허 웃었다.
“아이구, 제가 악몽을 꾸어가지고.”
“악몽?”
희사의 능력은 상상보다 대단하여서 꿈까지 훔쳐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산영이 악몽을 꾸었다고 하면 이마에 손을 올려 악몽을 훔쳐보고 위로해 주었다. 하나 이번에는 다가오는 그의 손을 피하고 말았다. 걱정 끼치기 싫다는 연유에서였으나 희사는 눈치를 깐 모양이었다.
산영은 쪽머리를 정리하며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의 눈가에 붉은 물이 든 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아, 아니, 희사 님.”
“왜 보여주지 않으려 해.”
“보실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
“하면 보여줘.”
숨기는 것은 없다고 서로 약조를 한 참이었다. 걱정이라는 것이 퍼내고 퍼내어도 뒤돌면 다시 고이게 되고 마는 것이라. 산영은 불안의 가시를 기르고 있는 희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것이 희사 님이 강가에서 저를 기다리는데 나룻배를 탄 제가 멀어졌지 뭡니까. 해서 희사 님이 이리 오라고 막 그러고.”
무릇 이별이 길어지는 것은 이래서 좋지 않았다. 별것 아닌 말에도 애틋해지고 가슴이 선득해져 그 날은 부둥켜안고 서로의 안정을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산영은 희사가 안기 편하도록 팔을 벌렸다. 하나 희사는 치마가 걷히고 드러난 산영의 종아리에 손등을 올려 열을 쟀다. 근처만 가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였다. 산영이 이를 숨겼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희사의 눈이 얼음장만치 차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픈 걸로 속이지 말라 했잖아.”
“오늘은 희사 님 잔치인데…….”
“잔치는 다시 하면 될 일이지.”
오늘은 잔치를 파하고 산영을 이불 위에 드러눕혀 음식 장만도 못 하게 할 작정인가 보다. 이럴까 봐 숨긴 것을 모르고 희사는 속 아픈 소리만 해댔다.
“들어가.”
“참말 좀만 누우면 괜찮다니까요.”
말을 듣지 않자 희사가 산영의 팔 밑에 손을 넣고 안아 올렸다. 힘은 장사라 끙 소리 한 번 없이 부인을 단박에 들어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하나 산영은 벌여놓은 식재료나 잔칫상이 아까워 한숨이 폭 쉬어졌다.
“잔치가 무어라고 그리 어리석게 굴어.”
기어코 희사의 목소리에 원망이 배어났다. 모든 일에 순둥이처럼 그러마 그러마 해주던 그도 병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었다. 연일 봉밀처럼 달콤한 나날을 보내니 헤어지기 싫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산영은 희사의 불안을 느낄 때마다 약한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다. 튼튼한 것은 어디 가서도 뒤처지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걸핏하면 감모에 걸리고 졸기나 하고. 허약한 산신령이라고 누가 소문은 내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희사 님.”
이불 세 채를 꺼내는 희사를 보며 산영이 코 막힌 소리로 웃었다. 이리 보니 희사가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쌀가마니도 잘 나르고 이불도 주름지지 않게 폈다. 혼인하면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낭군도 많다는데 저는 참 복이 많은 여인이었다.
“심려 끼쳐 송구합니다.”
희사의 탄신 잔치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닐 만큼 기똥차게 해주고 싶었다. 하나 몸이 이리 비실비실해서야 쌀을 안치는 일도 희사를 시켜 먹어야 하지 않은가.
“내일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니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시지요. 음식은 다 제가 할 것입니다.”
희사는 열로 절절 끓으면서도 할 말 다 하는 부인이 우스웠다.
“잔치를 왜 그리 해주고 싶어 안달인지.”
“제가 성대하게는 못 해도 기억에 남을 만큼은 해드리고 싶어서요.”
“네가 죽고 나서 그것들이나 그리워하며 있으라고?”
“말을 해도 또 그렇게 하십니다.”
두 사람은 알콩달콩 보내기도 바쁘다며 훗날의 일은 생각해 두지 않으려 했다. 산신령이 사람보다 죽지 않고 오래 살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물며 구왕까지 먹었던 몸인지라 죽음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데도 불멸인 희사와 다르게 끝은 정해져 있었다. 산영은 가늘게 떨고 있는 희사의 손을 붙잡고 다독거렸다.
“옥룡산에 영교 언니가 왔습니다.”
슬픈 일은 자꾸 얘기하다 보면 자기 일인 줄 알고 성급하게 오는 법이었다. 산영은 희사가 관심 가질 만한 주제로 말을 돌렸다.
“세상에. 이번 생은 의원이지 뭡니까.”
“의원?”
“예에. 한데 지금 땅이 전쟁 중이라 크게 쓰이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냐며 무심하게 턱을 주억거릴 줄 알았는데 희사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산영이 의아해하고 있을 참이었다. 대청에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희사의 검지가 까딱거리더니만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대청에서 난 큰 소리는 이윽고 아고고 하는 신음 소리로 바뀌었다. 산영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아니라 옥룡산에 있어야 할 이가 대청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영교 언니가 왜 여기에.”
“너를 따라왔길래. 나는 이상한 자인 줄 알았지.”
“예에?”
하늘로 올라온 사흘 내리 묶여 있었는지 연선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희사가 손짓으로 부르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문지방을 건너왔다. 희사는 산영의 앞이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부인의 맥 좀 보아주겠어?”
“예, 예?”
연선은 넝쿨에 사지가 묶여 광주리 근처에 버려져 있던 참이었다. 하나 저자가 나를 묶어두었다고 진실을 토해내는 순간 목에 도끼날이 날아올 분위기였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사내가 말한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마치 병자처럼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의원으로서 사명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라면 몰라도 이 여인에게는 빚이 있는 몸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연선은 진맥하는 데에 정성을 다했다. 가느다란 팔목에 손을 올려 맥을 짚기 시작하니 사내는 기다림이 고된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약하게 콩콩 뛰는 맥박을 짚던 연선은 긴가민가한 낯으로 두어 번 더 맥을 짚었다.
“왜.”
“큰 병은 아니옵고.”
산영이든 희사든 이 의원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음이었다. 신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보니 땅의 의학에 대해서는 자주 접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경하드립니다.”
“응?”
연선은 땀을 삐질 흘리고 있는 여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듯이 말했다.
“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