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26
125화
회임이라는 말에 순수히 기쁨을 느낀 건 산영이 유일했다. 지은 죄가 많은 희사는 연선의 자신만만한 진맥에도 재차 회임이 맞냐 물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 연선은 흥겨워하는 사내는 여럿 보았으나 이처럼 조심스러운 사내는 처음이라며 껄껄거렸다. 하나 희사의 마음을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산영은 시무룩해졌다.
“저, 잠시.”
연선에게 눈치를 주니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희사는 산영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빤히 아는데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연선이 문을 조심스레 닫고 나가자 산영의 추궁 같은 침묵이 시작되었다.
회임이라는 말이 희사에게 반갑지 않은 것이 차차 확신으로 치부될 즈음이었다. 산영의 서운함이 코끝으로 모여 빨갛게 변한 것을 안 희사가 수습에 나섰다.
“울지 마.”
장난스레 코끝을 눌러주어도 회임한 여인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희사 님은 참 이상합니다.”
“무엇이.”
“애 갖자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보약까지 지어 먹이면서 극성을 떨더니만 막상 애를 가지니 마음에 어둠 낀 기색이 역력했다. 저 어둠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산영은 배를 어루만지며 속상함을 덜어냈다. 그때 밋밋한 산영의 배 위에 희사의 손이 얹어졌다. 소담한 산영의 손까지 움켜쥔 채였다.
“하늘에서는 아기를 가지면.”
“예.”
“너무 기뻐하거나 어여뻐하면 아이가 너무 놀라 달아난다는 속설이 있어.”
저 말이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인 것을 알고도 남음이었다. 산영의 눈초리가 뾰족해지자 희사는 웃음으로 풀어내려 했다.
“그게 다야.”
“불안해서 그러십니까.”
번민의 물살을 타고 있다면 그 연유나 알고팠다. 하나 희사는 작정한 것처럼 표정을 숨기고 진실을 감추었다. 임부를 위한 배려임은 알지만 산영은 찜찜한 뒷맛이 어째 혀 밑에 남는 기분이었다.
* * *
희사는 회임한 부인을 얻은 사내답게 정성에 정성을 바쳤다. 회임 소식을 알게 된 날의 서운함을 갚아주듯이 수저 하나도 산영이 편히 들지 못하게 했다. 산영의 입덧을 고려하여 손수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운하다는 마음을 꿍하니 가지고 있던 산영도 저가 착각한 것인가 싶을 만치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낭군이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하늘 망신은 저가 다 하고 앉았구나.”
“말 가려 해라. 이제 조카까지 태어나는데 철이 덜 든 양 굴어.”
“부러워 그러지.”
회임 소식을 듣고 양손에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온 형제는 부러운 한편 아우의 심해진 경계심에 경악하는 참이었다.
“자리가 영.”
산영의 앞에 발을 쳐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자리는 십 리는 떨어트려놓은 듯싶었다. 발에 가려진 산영이 코딱지만 하게 보이자 이게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슨 애 잘못되게 만드는 병이냐.”
“말 가려 하래두.”
“가려 하지 않아도 안 들리게 생겼다.”
발에 가려진 산영 또한 눈이 침침한 것인지 형제 둘의 외양이 분간 가질 않았다. 희사는 산영의 근처에 상을 펴두고 앉아 있었다. 엄연히 회임을 축하하는 자리 겸 점심이나 한 끼 하자고 부른 손님들인데 저리 푸대접해도 되는지 손이 부끄러웠다.
“희사 님.”
국을 뜨던 희사가 고개를 들고 산영의 안색을 살폈다. 요사이 부르기만 하면 저리도 걱정이 스민 낯이었다.
“형님들을 불렀는데 너무하시는 듯합니다.”
“회임한 여인이 말을 오래 하면 좋지 않다고 했어.”
“또 그놈의 서책을 읽으셨지요?”
고지식하고 뚝머슴 같은 기질이 있는 희사가 열 달을 속 편히 보내면 그것이 이상한 이야기였다. 하나 정도가 심하다고 느낀 것은 요 손님 대접뿐만이 아니었다.
가여운 연선은 옥룡산에서 상시 대기하는 신세로 전락하였고 산영은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아궁이 떼는 방 안에 감금되는 처지였다. 이러다 쪄 죽겠다며 내보내달라고 애걸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형제들이 온다는 소식에 바람은 쐬겠거니 했더니만 부른 손님 민망하게끔 푸대접이나 하고 말았다.
“희사 님.”
“응.”
“돌려보내시지요.”
“어디 불편해?”
“아이고.”
회임한 것이 맞기는 맞는지 지지난달보다 배가 부르고 있었다. 형제들 배웅도 못 하게 생긴 터라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고개를 숙였다. 산영의 노력을 알아본 것인지 저쪽에서도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들었다.
희사는 산영보다 이르게 방에 들어가 자리를 펴두고 있었다. 알로 변한 흑둥이도 방구석에 놓여 있는데 저러다가 삶아지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날도 무더운데 방 안도 무덥다. 하나 따질 겨를 없이 산영은 두툼한 이불 위에 털썩 누웠다.
“한숨 자.”
한 것도 없는데 재우려 드는 희사가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셨다. 실정이 이러다 보니 애 낳고 난 후가 더 두려운 법이었다. 아비란 사람이 물색없이 굴면 아이의 버르장머리가 나빠지기 마련이다. 그도 그러한데 딸아이라도 태어나면 발도 못 떼게 할 기세였다. 걱정이 천근이고 근심이 만근이라 자는 척만 할 차였다.
배 위에 낭군의 정이 듬뿍 넘치는 손이 올려졌다. 뭉치지 않도록 약손을 그려주는 손길이 깨어 있을 적과 딴판으로 달랐다. 희사는 아비가 주물럭거리면 부정 탄다며 손도 잘 대지 않았는데. 배 위에 뺨까지 대고 가만히 있는 행태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희강아.”
희강이. 내심 정해둔 이름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한데 어미인 저에게까지 함구하는 연유가 있으려나. 그간 그에 관해 입도 벙긋 안 한 낭군이었다. 희사는 볼록한 배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네 어미를 나한테서 뺏어가지 마.”
고요히 자는 척을 하던 산영은 눈을 크게 떴다. 회임이란 게 희사의 기쁨이 아니라 불안이 된 연유를 몰랐다. 인연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인데 근심을 가질 게 무어냐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하나 희사의 속에는 그만이 짐작할 수 있는 파도가 치는 중이렷다. 저의 악몽을 기어이 훔쳐보고 예삿일이 아니라 판단한 것일 터였다.
산영은 희사의 뒷머리를 손질하듯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아이 이름이 희강이옵니까?”
“슬픔의 강이 아니라 기쁨의 강이 되어달라고.”
뒤숭숭한 마음은 하루아침에 낫는 것이 아니렷다. 아끼는 부인을 오래오래 아끼고픈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산영은 배에 착 달라붙은 희사의 뺨을 꼬집듯이 만졌다.
“꿈 해석을 잘못하셨습니다.”
“어떻게.”
“아이가 태어나면 희사 님은 찬밥 신세가 된다는 예지몽인가 봅니다.”
농이 섞인 그 말은 희사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보약이라 볼 수 있었다. 과도한 불안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음이었다. 희사의 눈시울에 난 기다란 속눈썹이 빗방울을 달았다.
희강이를 마주한 석 달. 하루도 빠짐없이 어미를 훔치려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나 그는 실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산영에 이어 희강이마저 마음에 품게 된 것이었다. 하늘 아래 불멸은 형제를 포함한 셋뿐이었다. 생자필멸이랬다. 더욱이 필멸은 제 살로 필멸을 낳다가 떠날 수 있음이었다.
“떠나지 마.”
“희사 님.”
“응.”
“제가 왜 떠납니까.”
“떠나지 않을 것이지?”
희사의 불안으로 응집된 눈물이 배 위로 떨어졌다. 산영의 낭군은 감정을 겨울 식량 비축하듯 모아두었다가 부인 마음 아프게 하는 데에 쓰는 모양이었다. 하나 지키지 못할 필멸의 약조라도 받아두고픈 심경은 하잘것없는 게 아니었다.
“희사 님.”
“약조해.”
“저도, 이 아이도. 희사 님처럼 불멸입니다.”
교만하고 불온한 불멸이지만 생은 반복된다. 산영은 그 점을 열 달이 다 가도록 일러줄 생각이었다.
“연모하니까요.”
불멸이 희로애락을 가진다는 것은 불리한 일이었다. 아쉬운 소리 하게 되는 쪽이 지는 쪽임이 자명하니 말이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모를 말하는 필멸에게 전부를 바치고 싶었다. 하늘의 피를 잇게 될 필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연모는 고달픈 것이나 고달플 가치가 있는 것이니. 희사는 희강이의 고동을 들은 날부터 연모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 * *
야무지기로 이름난 옥룡산의 산신령은 약조를 지켰다. 어미 고생시키지 말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덕일까. 희강은 열 달을 채우고 하늘의 첫 핏줄로 무탈하게 태어났다. 오동통한 공주마마였다. 아비를 닮아 왼쪽 뺨에 볼우물을 달고 웃었다. 눈은 산신령인 어미를 닮아 선하고 둥그렇다.
핏덩이임에도 희고 고와 희사는 예지몽대로 기쁨의 강물에 빠지는 산영을 막을 수 없었다. 하나 투기는 어른스러운 낭군의 뒷주머니에 차기로 했다. 자신마저 희강의 옹알이 소리에는 하늘을 내어주고픈 마음이었으니까.
“희강아.”
“이리 줘봐.”
“아니 됩니다. 잘 안지도 못하시면서.”
아기가 무에 어여쁘냐고 하던 둘째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둘째의 푸념이 혼인 타령에서 자식 타령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첫째가 중재하지 않으면 아기를 강보째로 훔쳐 갈 기세였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강물이 되었다. 하늘이 외롭지 않게 흐르는 강물 소리는 불멸할 것이었다. 하늘이 땅에서 물러서는 그날까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