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ise as a catcher RAW novel - chapter 183
투수코치가 다가와 한민석에게 수건을 건넸다.
“오늘 로케이션 좋다? 폼 수정한 게 잘 맞나 보네.”
“점점 맞는 거 같아요. 처음엔 너무 사이드로 빠졌는데 이제는 감이 잡혔어요.”
“너도 난놈은 난놈이다, 시즌 중에 폼을 바꿨는데 이렇게 빨리 적응하고.”
“왜 이러세요. 저 한민석이에요. 전국 일짱 한민석. 이 정도는 해 줘야죠.”
듣고 있던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적 일짱이야, 일짱은.”
“좋겠다, 일짱이라.”
한민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러셔. 나 메이저리그 오퍼 받은 사람이야. 내가 고딩 때는 내 밑에만 있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늬예, 늬예. 그러세요?”
“어어, 내 말 못 믿어?”
“믿어, 믿어. 믿는다.”
한민석은 다리를 꼬고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재능충이 괜히 재능충인지 아나. 이 정도는 해야 재능충 소리를 듣는 거지.”
유선호가 한민석 옆에서 배트를 챙겼다.
“그래. 우리 민석이가 천재라서 좋~겠네.”
한민석이 슬쩍 다리를 풀었다.
유선호는 배트를 어깨에 걸쳤다.
“아이고~ 나도 재능충 소리 듣고 싶네. 누구는 재능이 없어서 살긋나.”
듣고 있던 선수들이 파하하 웃었다.
“우리 석현이도 없는 재능 잘 짜내가 열심히 해야 칸다. 알았제?”
“네, 알겠습니다.”
한민석이 수건을 옆에 놓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진짜. 여기서 자랑도 못 하겠네.”
투수코치가 유선호를 보며 말했다.
“선발투수 기 좀 세워 줘라. 누가 너 잘난 거 모른다냐?”
“알겠습니다~.”
1회 말.
고트는 이지성이 볼넷으로 출루한 후 설진일의 안타, 김인환의 볼넷으로 만루를 맞았다.
선발투수 강구일이 모자를 한번 벗어 땀을 닦았다.
“오늘 강구일 선수의 제구가 흔들리면서 1회에만 벌써 볼넷이 두 개쨉니다.”
“강구일 선수의 레퍼토리가 바깥쪽의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빠른 공과 아래로 떨어지는 스플리터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제구가 전반적으로 높게 되고 있습니다. 제구가 높으면 당연히 위험해지거든요. 그러다 보니 안 맞으려고 바깥쪽으로 공을 빼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만 들어오니 타자들은 안 치면 그만인 거죠. 높은 코스로 공이 가다 보니 스플리터도 자연스럽게 봉인돼 버렸습니다. 자신의 강점이 모두 꽁꽁 묶여 버린 셈이에요.”
“강구일 선수의 컨디션이 오늘 안 좋은가요? 평소와는 다릅니다.”
“선발투수가 경기마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습니다. 보통 3~4경기, 잘하면 1~2경기는 좀 아쉬운 편인데 하필 오늘이 그날인 거 같아요. 경기 전에 만났을 땐 오늘 공이 좋다고 했는데 막상 또 마운드에 올라가면 다른 거 같습니다.”
“벌써 스트레이트 스리볼입니다. 이러면 밀어내기도 가능하겠는데요?”
“볼넷이네요. 결국 밀어내깁니다. 스리볼이 나온 이상 예상 가능한 수순이었죠. 잠실의 송석현과 승부하는 것보단 1점을 내주고 유선호 선수와 승부하는 게 낫죠.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스리볼에선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송석현이 1루로 걸어갔다.
강구일은 손에 로진백을 들었다.
타석에 들어선 유선호가 포수에게 말을 걸었다.
“깔끔하게 빠른 공 하나 도. 그럼 안타 하나만 치고 나가께.”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
“서로 상부상조해야지. 저러다 큰 거 맞는다니까.”
“서울 가더니 헛소리가 늘었네.”
강구일의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볼.
제2구도 볼이었다.
“또 밀어내기 하면 구일이 멘탈 터져 뿐다. 오케이. 내가 많이 봐줬다. 지금이라도 직구 하나 주면 내가 딱 단타 하나만 치께.”
“헛소리는 진짜.”
포수 구승철이 사인을 냈다.
강구일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자세를 잡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위로 솟구치듯 날아가다 아래로 훅 떨어졌다.
커브.
포수의 미트가 포수의 얼굴 위로 올라갔다.
탕!
유선호가 배트를 던졌다.
공은 잠실의 우측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그랜드슬램! 그랜드슬램이 터집니다! 1회부터 유선호의 만루 홈런이 터집니다!”
“방금 커브는 정말 아니었어요. 애초에 투수가 공을 너무 높게 던졌습니다. 커브는 타자의 눈높이에서 존 아래로 떨어져야 효과적인데 방금 커브는 타자 머리 위에서 존 한가운데로 오는 공이었습니다. 저건 그냥 치라고 던지는 공이죠.”
“유선호 선수의 그랜드슬램으로 고트가 시작부터 5-0으로 앞서갑니다. 오늘은 고트가 먼저 앞서가네요.”
“노련한 유선호 선수에게 저런 실투는 먹잇감이나 다름없죠. 유선호 선수의 장점을 타고난 선구안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저런 실투를 놓치지 않는 노련함이 더 무서워요. 좋은 공은 거르고 나쁜 공을 노리니 어떻게 성적이 안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통산 OPS 0.9는 아무나 쌓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죠.”
유선호가 선수들의 환호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가장 기뻐하는 건 선발투수 한민석이었다.
“오오, 야구의 신이시여. 저에게 승리를 내려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재능은 없어도 한 방은 있다 아이가.”
“선배야말로 재능 오브 재능충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근데 고마 충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나? 신이면 신이지 충은 뭐꼬.”
“신께서 명하신다면 얼마든지.”
강구일이 허리를 꺾어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스콜피언 이건후 감독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아직도 옛날 강구일인 줄 아나…….”
강구일은 추가로 2실점을 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벤치로 돌아온 강구일은 넋 나간 얼굴로 수건을 뒤집어썼다.
스콜피언 응원석에선 벌써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점마는 글렀다. 공이 탱탱볼 아이가, 탱탱볼.”
“강구일이 옛날에나 강구일이지 지금 강구일이가?”
“그라지들 마소. 그래도 강구일 아입니까. 스콜피언 우승시킨다고 어깨 갈아 뿐 아안테 너무하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공도 시원찮은데 볼질만 해 뿌몬 우째 이기는데?”
“하이고, 고마 또 잘하겠지. 구일이 응원이나 하입시더.”
머리가 희끗한 팬 하나가 중얼거렸다.
“공이 빠를 때나 강구일이지, 저래 던쪄 뿌몬 동네 얼라도 치긋다.”
1회에만 7실점.
강구일은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냈으나 2사 만루를 만들고 강판됐다.
만루에서 이지성의 적시타로 9-0.
설진일의 안타로 11-0.
김인환의 플라이로 3회가 끝났다.
“우우우!”
“고마 때려치 뿌라!”
“이래가 우승하겠나!”
“돈이나 물어도!”
초반부터 대량 실점이 나오자 스콜피언 팬 중 일부는 야유를 하고 이물질을 야구장에 던졌다.
장내 소란이 생기자 심판이 나와 정리했다.
벤치 한구석에 있던 강구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를 나가 버렸다.
“쯧쯧. 구일이가 어쩌다 저렇게 됐나.”
김정률의 탄식에 송석현이 물었다.
“예전에는 구일 선배님이 정말 잘하셨죠? 저 초등학교 때부터 구일 선배님은 유명했는데. 팔공산 에이스였잖아요.”
“쟤가 진짜 난놈이었지. 중학교, 고등학교, 프로, 국가대표 전부 에이스였잖냐. 민석이가 지 입으로 일짱, 일짱 타령했지만 진짜 전국구 일짱은 강구일 같은 놈이지. 스콜피언을 멱살 잡고 우승시킨 거나 다름없었어. 그때 이후로 어깨 완전히 갈린 게 흠이지. 에휴.”
“구속이 많이 줄었나요?”
“그때는 150km/h 쉽게 던졌지. 지금도 145km/h는 던지지만 그때랑 같나. 애초에 힘으로 밀어붙이던 놈이야. 그런 놈이 구속이랑 구위 다 잃었으니 별수 있나. 피네스 피처로 변하겠다고 발버둥은 치는데 옛날 버릇 버리기가 쉽지 않아. 옛날에는 저런 높은 공만 던져도 죄다 헛스윙이었거든.”
“아쉽네요, 저도 전성기 강구일 선배랑 한번 붙어 보고 싶었는데. 우리 때는 강구일 선배가 진짜 야구 천재였거든요.”
“천재…… 천재였지. 그런데 야구판에서 진짜 천재는 몇 안 돼. 나이 먹고도 커리어를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렵거든. 그런 면에서 진짜 천재는 저 양반이지.”
김정률의 손가락이 유선호를 가리켰다.
“저 나이에도 OPS 0.9가 사람이냐? 저러다 마흔까지 치겠어.”
11-0에서 경기는 기운 거나 다름없었다.
한민석은 8회까지 단 1실점만 내줬다.
최종 결과는 15-2.
천재 타자 정대한의 솔로 홈런이 스콜피언 팬들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경기 끝났습니다. 오늘 경기는 의외로 일방적으로 흘렀습니다.”
“고트가 1회 대량 득점에 성공한 게 주효했어요. 역시 투수는 1회가 가장 힘들어요. 강구일 선수의 제구가 유독 말을 안 듣던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트는……. 아, 오늘도 페가수스가 승리를 거뒀네요. 페가수스와 고트가 2경기 차를 유지합니다.”
“좁힐 듯 좁힐 듯 좁혀지지 않네요. 그래도 고트의 9월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상위 4개 팀 중에 페가수스와 3연전 한 번, 울브스와 3연전 한 번을 빼면 전부 하위 4개 팀과의 일정이 남았거든요. 이건 뒤집어 말하면 고트가 상위 팀과 승부하면서도 2위를 지켜 냈다는 얘기예요. 고트의 저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네요.”
“이번 잠실 주말 3연전은 고트가 스콜피언 상대로 위닝시리즈를 기록했습니다. 스콜피언은 일격을 맞으면서 1위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이제 9월입니다. 그 말은 이번 한 달이 지나면 포스트 시즌이라는 거죠. 이번 한 달이면 포스트 시즌의 승자가 가려질 겁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페가수스가 1위로 올라갈지, 아니면 고트가 1위를 뺏어 내면서 근 23년 동안 해 보지 못한 리그 1위를 탈환할지 정말 궁금하네요.”
포수로 승승장구
더블데이트
월요일 점심.
송석현과 김나영은 동네 공원에서 만났다.
“어때? 이 정도면 몰라보겠지?”
선글라스를 쓴 송석현이 의기양양하게 김나영에게 웃어 보였다.
김나영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너 진심으로 그렇게 다니면 사람들이 몰라볼 거라고 생각해?”
“눈 가렸잖아. 왜? 이상해?”
“…….”
김나영이 이마를 짚었다.
“너는 맨날 선글라스 쓰고 경기 하면서 이상한 거 못 느껴? 차라리 선글라스를 벗고 다녀. 선글라스 쓰고 야구 모자 쓰고 다니는데 누가 널 못 알아보겠어?”
“……그런가? 그럼 마스크를 쓰는 건 어때?”
“야구 모자에 선글라스에 마스크? 신고당하고 싶어?”
“그렇네.”
김나영이 송석현의 모자를 벗기고 선글라스를 벗겼다.
“차라리 이러고 다녀. 괜히 티 나게 다니지 말고.”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
“아니면 그냥 우리 만화 카페나 가자니까. 웬 코엑스야.”
“나 거기서 데이트 하고 싶었단 말이야. 우리도 동네 벗어나서 좋은 데도 다니고 해야지. 언제까지 동네만 배회할 거야.”
“그렇게 사람 많은데 가면 다 너 알아볼걸.”
“내가 뭐라고. 내가 야구 선수라고 광고하지 않은 이상 나를 어떻게 알아본다고.”
“너만 모를걸. 너 9시 뉴스 단골이야. 웬만한 사람들은 네 얼굴을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거 확신할 수 있어.”
“좀 알아보면 어때. 알아보라지. 나는 거리낄 거 없다구. 너는 나랑 사귀는 게 알려지는 거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너 저번에도 스캔들 났는데 이번에도 스캔들 나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뭐?”
송석현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일단 우리 좀 빨리 가자. 나 시간 별로 없어. 저녁에는 복귀해야 한다고. 응?”
김나영은 송석현에게 눈을 흘기다 손을 내밀었다.
“후. 그래, 가자.”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코엑스로 향했다.
코엑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점에 들러 사진을 찍었다.
간단한 점심을 마친 후엔 영화관으로 향했다.
“커플석이…… 저기 제일 위에 있거든? 저쪽. E, F야.”
“발 안 걸리게 조심해서 가.”
두 사람이 커플석에 앉아 콜라를 한 모금씩 먹었다.
“사람이 많진 않네.”
김나영의 말에 송석현이 씨익 웃었다.
“월요일 점심인데 사람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 우리한테는 다행이지.”
“이 시간에 영화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네.”
송석현이 김나영의 손을 잡더니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야.”
김나영이 소리를 죽여 핀잔을 줬지만 송석현은 굴하지 않았다.
김나영은 한숨을 푹 쉬더니 송석현에게 입맞춤했다.
“헤헤.”
송석현은 헤벌쭉 웃었다.
그때 계단을 타고 커플석으로 올라오는 인형 둘이 보였다.
송석현과 김나영은 앞만 보면서 팝콘을 먹었다.
두 사람은 송석현과 김나영을 지나쳐 송석현 옆에 앉았다.
여자와 남자 모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자의 덩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뭔가를 얘기하더니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영화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남자가 먹거리를 사 들고 다시 올라왔다.
남자는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하자 팔로 모자챙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어?”
“어?”
커플석에 다다른 남자가 멈칫했다.
송석현도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모자챙 아래의 얼굴은 송석현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인환이 형?”
* * *
영화가 끝난 후 송석현은 김나영과 조용히 인파에 묻혀 나가려 했지만 김인환에게 붙잡혔다.
“잠깐만 얘기 좀 할까?”
김인환은 송석현을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석현아, 알지? 비밀로 좀 해 줘.”
송석현이 저 멀리 혼자 서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형, 어떻게 된 건데요?”
“그게 그렇게 됐어.”
“그때 말한 한가연 아나운서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