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ise as a catcher RAW novel - chapter 207
통하든 통하지 않든 느린공을 보여 준다면 다음 공 선택이 쉬워진다.
체인지업 다음에 포심을 던진다면 더 빠르게 느껴질 것이며 커브를 던져도 더 느려진 공에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을 거다.
‘아웃사이드. 체인지업.’
수아레즈도 신민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포심으로만 상대를 윽박지르기엔 수아레즈의 구속이 빠르지 않다.
140 초반의 포심.
묵직한 구위와 정교한 제구를 자랑하는 수아레즈지만 4번 타자를 상대로 포심으로만 윽박지를 만큼 자신 있진 않았다.
“후우.”
수아레즈는 1루의 설진일을 한번 노려본 후 다리를 살짝 들어 던졌다.
바깥쪽으로 훅 날아가다 힘이 빠지는 체인지업.
트리플 에이에서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 체인지업이었다.
스윽.
송석현의 허리가 돌았다.
크게 돌지도, 세게 돌지도, 빠르게 돌지도 않았다.
연습 배팅하듯 우측 담장 쪽으로 밀어 치는 스윙.
탕!
배트 끝에 걸린 공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왓 더…….”
수아레즈는 밤하늘을 가르는 하얀 공을 바라봤다.
보기에는 힘없이 그저 높이만 뜬 공이다.
분명 우익수가 넉넉하고 잡고도 남을 공이지만 공은 좀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제발 떨어져라, 떨어져라 빌 때마다 공은 한 발 더, 한 발 더 뻗어 갔다.
툭.
“홈런! 송석현의 투런포! 송석현 선수가 수아레즈 선수를 상대로 투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이야, 방금은 정말 아름다운 아치였습니다. 제대로 밑동을 긁은 공이었어요. 기술적으로 퍼 올리는 공인데, 요즘에는 빠르고 강하게 치는 게 대세라면 예전 홈런 타자들은 저렇게 높은 플라이 볼을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공에 회전을 많이 넣었거든요. 정말 오랜만에 저런 홈런을 보네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송석현 선수의 투런으로 3-0. 오늘도 고트가 먼저 치고 나가네요.”
“수아레즈 선수의 공이 나쁘진 않았는데 고트의 상위 타선은 확실히 셉니다. 좋아요.”
송석현은 홈으로 돌아오면서 따로 세리머니는 하지 않았다.
고의는 아니지만 어제 상대 선수가 크게 다쳤다.
구태여 울브스 선수들을 자극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고트 벤치도 크게 환호하거나 기뻐하는 대신 가벼운 박수로 송석현의 홈런을 축하했다.
“…….”
수아레즈는 제 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떨어진 체인지업이었다.
타자의 타격 타이밍은 정확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체인지업을 퍼 올렸다.
혹 자신에게 나쁜 버릇이 있는 걸까?
실투도 아니었다.
“수아레즈.”
수아레즈는 어느새 마운드로 올라온 포수 신민호를 바라봤다.
수아레즈가 넋이 나간 걸 보고 1회부터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네 공은 베스트야. 내가 사인을 잘못 냈어, 네 패스트볼이 좋은데도 내가 너무 꼬아서 생각해서. 사과할게. 이제는 네 공 믿고 쉽게, 쉽게 가자.”
대뜸 사과부터 하는 포수.
수아레즈는 픽 웃었다.
“좋아. 이번에는 더 재밌게 해 보자고.”
수아레즈의 성격이 들쑥날쑥하고 기복이 심하다곤 하지만 그도 투수였다.
마운드 위의 고독함을 알아주는 사람에겐 곁을 주는 것도 투수였다.
송석현 다음 타자는 유선호.
최근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타자지만 다시 한번 피치를 올리는 수아레즈를 1회부터 공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웃!
-아웃!
두 타자 연속 삼진.
수아레즈가 급한 불을 끄고 1회를 마쳤다.
1회 말 울브스의 공격.
마운드에는 이창훈.
울브스 타자들은 타석에 바짝 붙어 섰다.
구위가 무뎌진 이창훈이 최근 바깥쪽 위주로 투구하는 만큼 몸 쪽을 버리고 바깥쪽을 공략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어제 경기 멕킨지에겐 통하지 않은 방법이었으나 이창훈에겐 주효한 방법이기도 했다.
투수코치가 몸 쪽 공을 삼가란 말까지 곁들였으니 이창훈은 시작부터 페널티 하나를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우측으로.’
고트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예 대놓고 우측으로 야수들을 옮기는 시프트를 단행했다.
“이창훈 선수가 대놓고 바깥쪽을 공략하겠다고 선언한 거 같습니다.”
“최근 이창훈 선수가 계속 저런 식으로 피칭을 하죠. 팀에서도 이창훈 선수의 스타일에 맞게 야수의 수비 위치도 조정하고 있네요.”
“이러면 이창훈 선수가 불리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이창훈 선수의 구위가 무뎌졌는데 어쩌겠습니까. 궁여지책이죠.”
울브스의 1번 타자는 김하균.
배트에 공을 맞추는 능력은 발군인 타자가 배트도 짧게 잡고 스트라이드도 좁혔다.
체중을 앞다리에 실어 컨택에 중점을 둔 타격 자세.
몸을 웅크려서 최대한 공을 끝까지 보고 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포심. 아웃사이드.
이미 이창훈이 던질 공은 정해져 있다.
고민할 필요 없다.
치라고 공을 던져 주고 잡으면 된다.
상대가 왼쪽으로 공을 보내지만 않으면 성공이다.
장타를 내주지 않으면 대성공.
1번 타자이니만큼 공을 몇 개 보지 않을까 싶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들어갔지만 김하균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탕!
-아웃!
“아웃입니다! 우익수한테 공이 다이렉트로 가 버렸네요.”
“김하균 선수가 잘 쳤지만 촘촘한 수비를 뚫는 건 쉽지 않네요. 저 수비를 뚫으려면 더 멀리 보내거나 당겨 쳐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여긴 잠실 아닙니까. 밀어 쳐서 담장을 보내는 게 그리 쉽진 않아요. 강제관 선수까지 부상 중이라 밀어 쳐서 담장을 넘길 선수가 울브스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트의 작전이 먹혀들어 가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창훈 선수의 공이 조금이라도 몰려서 공이 좌측으로 빠지기 시작하면 대량 실점의 빌미가 되거든요. 투수가 실투 없이 공을 던져야 한다……. 이거 어려워요.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며 밀고 나가야 하는 건데 이게 쉽겠습니까?”
“오늘 경기의 승패는 이창훈 선수의 제구에 달려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2번 타자는 정수영.
리그 A급 2루수이자 타자.
이창훈은 초구로 또 바깥쪽 빠른 공을 던졌다.
탕!
파울!
“울브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스윙하네요.”
“1회부터 3점을 뒤졌는데 빨리 따라가야죠. 이창훈 선수의 공을 기다려 줄 필요 없어요. 후반기 들어 구위가 무뎌진 건 확실하거든요. 존에 들어왔다 싶으면 쳐야 합니다. 이창훈 선수도 피해 다니기보단 이를 이용해서 범타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구요.”
이창훈의 2구도 패스트볼.
정수영의 파울.
정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타가 될 공이 자꾸 바깥으로 빠진다.
타이밍을 못 맞췄거나 구위에 밀린다는 얘기다.
후반기 이창훈의 구위가 떨어진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만큼 자신이 타이밍을 못 맞췄다는 결론을 내렸다.
패스트볼에 타이밍이 안 맞는다면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더 빠르고 강하게 내리치는 것도 방법이다.
이창훈은 지체하지 않고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바깥쪽 존을 타고 들어오는 공.
정수영이 스윙했다.
부웅!
정수영이 스윙하자마자 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갔다.
슬라이더.
정수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 이창훈이 공 세 개로 정수영을 삼진으로 잡습니다.”
“오늘 슬라이더가 예쁘게 들어가네요. 이창훈 선수의 슬라이더 각이나 낙폭이 크진 않아도 참 정석적으로 들어가거든요. 바깥쪽 포심 두 개를 보여 주고 똑같이 빠른 공처럼 보이는 슬라이더. 아주 교과서적인 조합이지만 그만큼 많이 쓰이는 패턴 아니겠습니까?”
울브스 장태섭 감독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김하균, 정수영 모두 통산 타율 3할에 빛나는 리그 A급 타자다.
장타력은 없어도 컨택 하나만큼은 수준급인 타자들인데, 오늘은 좀체 나가질 못한다.
고트의 테이블 세터와 비교하니 열불이 터진다.
퇴물이 된 이지성, 올해 늦깎이 풀타임 설진일과 비교하면 몸값이며 통산 성적이 비교나 되던가.
타오르는 장태섭 감독의 울화를 잠재운 건 3번 타자 정인하의 2루타였다.
“그래, 그거지.”
촘촘한 시프트를 뚫는 안타.
다른 팀 1루수에 비해 이름값은 떨어져도 언제나 제몫을 해내는 타자다.
“울브스도 쉽게 물러나진 않네요. 정인하 선수가 2루타를 때려 내면서 바로 득점 기회를 만듭니다. 안타 하나면 득점입니다. 타석에는 4번 타자 백현성 선수가 들어옵니다. 백현성 선수가 계속 4번으로 뛰네요.”
“타율은 떨어져도 노림수와 힘이 좋은 타자거든요. 정교한 3번 타자 뒤에 힘 좋은 게스 히터. 전통적인 조합이죠.”
“1회부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붑니다. 이래서 잠실 라이벌, 잠실 라이벌 하는가 봐요. 양 팀의 투수, 타자 들의 수준이 정말 높아요.”
이창훈은 초구로 포심을 택했다.
백현성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윙, 파울.
백현성은 자신의 배트를 한번 보더니 스트라이드를 넓히고 히팅 포지션을 높였다.
이창훈의 2구도 똑같은 코스의 공.
백현성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이창훈 선수의 최근 결정구죠. 체인지업이 잘 떨어졌습니다.”
0-2.
공 두 개로 2스트라이크.
백현성은 다시 스트라이드를 좁히고 배트를 조금 더 짧게 잡았다.
이창훈의 결정구는 커브였다.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 백현성 선수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섭니다. 울브스는 득점 찬스를 잡았지만 1점도 내지 못했어요.”
“오늘 이창훈 선수의 페이스가 좋네요. 최근 좀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면서 부진하더니 다시 에이스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에이스는 에이스네요. 리그 후반기에 다시 쌩쌩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회춘이라도 했나요? 비결이 궁금하네요.”
포수로 승승장구
새옹지마
“새옹지마네요.”
투수코치 연우식의 말이었다.
함성훈 감독도 연우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6선발을 세운 건데 시즌 말에 창훈이가 다시 부활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저도 올 시즌 창훈이는 어렵지 않나 싶었는데 기어이 해내네요, 창훈이가.”
시즌 초.
고트는 불펜 과부하로 무너지고 있었다.
함성훈이 감독 대행으로 올라왔을 때만 해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래성이 고트의 불펜진이었다.
팀의 불펜이 무너지면 감독들은 크게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선발에서 제 몫을 해내는 선수를 데려다가 마당쇠를 시키거나, 2군에서 공 좀 던진다는 선수들을 올려 물량 공세로 나간다.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환하면 선발진이 헐거워진다.
선발진이 헐거워지면 불펜 과부하는 늘어난다.
불펜 과부하가 늘어날수록 마당쇠의 역할은 더 커진다.
악순환의 끝은 마당쇠의 혹사.
김정률이 세 번의 수술을 한 이유였다.
고트의 황태자로 군림하며 어릴 적부터 많은 이닝을 소화하다 부상을 당했다.
재활을 다 거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한 감독들은 김정률을 끌어다 썼다.
원래대로라면 재활이 끝난 후 2군에서 몸을 다지고, 1군에서 5선발이나 롱 릴리프로 서서히 이닝을 늘려야 한다.
이 과정은 짧아야 1년, 길면 2년이 걸린다.
2년이면 프로 야구 감독 계약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물며 고트라면 더 짧으면 짧지 길지 않다.
자신의 임기 내에 쓰지도 못할 투수를 위해 기다려 줄 야구 감독은 많지 않았다.
재활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김정률은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경기 중에 공을 전지는 것도 재활이 아니냐.’라는 게 올드 스쿨 감독들의 주장이었다.
긴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니 김정률은 짧은 이닝을 여러 번 소화하는 불펜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불펜 투수의 불행은 잘하면 잘할수록 자주, 많이 나온다는 데 있다.
재활을 마치기도 전에 마운드에 올랐던 김정률은 혹사에 또 부상을 입었다.
부상 후 재활, 짧은 재활 후 마당쇠.
제아무리 날고뛰는 선수라도 이 과정을 세 번 거치면 멀쩡할 도리가 없다.
불펜 투수가 부족해 선발투수를 불펜으로 전환하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다.
이마저도 마당쇠로 쓸 만한 투수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쓸 만한 투수조차 없다면 그땐 2군 투수를 끌어다 쓰기 바쁘다.
2군에게 다듬어야 할 투수들을 경험을 준다는 핑계로 1군에 올려 급한 불을 끈다.
주로 공이 빠른 2군 유망주 선수들이 물망에 오른다.
때론 선발로, 때론 롱 릴리프로, 때론 원 포인트로 마구잡이로 돌려쓰다 보면 전도유망한 유망주는 몇 년 만에 팬들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는다.
조금만 던진다 싶으면 1군으로 올라가 혹사당하면서 2군에서 재활과 회복을 반복하다 보면 유망주도 2군 성적이 무너진다.
2군이라고 해도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경험을 쌓아야 성장하기 마련이다.
투수가 없어 하루하루 땜빵 하듯 경기하다 보면 패전을 늘어나 2군 선수들은 패배 의식에 젖는다.
2군 팜이 무너지다 보니 1군에서 부진한 선수가 나와도 대체할 선수가 없다.
그쯤 되면 중증이다.
소위 리빌딩을 거치려면 2년이고 3년이고 다시 2군을 정비하고 1군 성적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처방은 있지만 따르는 이가 없다.
한국에서 리빌딩이란 유망주도 키우고 1군 성적도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고트도 돌아가는 상황만 보자면 하위권에서 전전해야 하는 게 맞다.
조급한 감독, 불펜 혹사, 투수 부족으로 이어진 고트가 무너지지 않은 건 돈 덕분이었다.
해마다 FA를 잡으면서 혹사의 여파가 2군까지 퍼지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