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ise as a catcher RAW novel - chapter 230
내가 홈런을?
조진희한테?
꿈인가?
이지성은 1루를 밟을 때도 생소했다.
2루를 밟을 때도 생경했다.
3루를 밟으며 미친 듯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과 동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잠에서 깨듯 정신이 돌아왔다.
홈을 밟은 이지성이 그제야 웃었다.
홈런?
홈런도 기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게 있었다.
안 아프다.
손목이 전혀 안 아프다.
어쩌면…… 어쩌면 난…….
“다 나은 거야?”
이지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수로 승승장구
닥공
“어떡……할까요?”
페가수스의 투수코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성연 감독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1회 초, 선두 타자 홈런.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페가수스를 비롯해 스콜피언이나 웨일스의 1번 타자의 경우 한 시즌당 10홈런은 기대할 수 있는 장타력도 지녔다.
상위권 팀 중에서 테이블 세터가 약한 팀은 단 한 팀도 없다.
다만 고트나 울브스의 1번 타자는 출루율과 주루에 방점을 뒀다.
이지성도 한때는 호타준족의 대명사였으나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에는 전형적인 똑딱이에 머물렀다.
혹여 장타가 나오더라도 안타 코스가 좋다거나, 상대 허술한 수비를 틈탄 주루 플레이로 2루타를 만드는 수준에 그쳤다.
자신이 짜 놓은 수많은 계획과 예측 속에 단 한 번이라도 이지성에게, 그것도 1회 첫 타석부터 홈런을 맞는다는 각본은 없었다.
“…….”
최성연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한 말은 있었지만 1회 초, 첫 타자만 상대한 투수를 내린다?
하물며 투수가 조진희다.
구단이 보고 있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도 보고 있으며, 언론들도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있었지만…….
“실투잖아.”
“네? 아, 네.”
투수코치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
조진희가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져 흡사 터질 거 같았다.
수치(羞恥).
홈런을 맞은 것도 울화가 치미는데 홈런을 친 타자가 이지성이다.
하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경기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셈이다.
“타석에는 설진일 선수가 들어옵니다.”
“조진희 선수, 홈런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다시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조진희 선수의 손이 부산스럽죠? 저거 지금 집중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정용욱이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호흡을 가라앉히라는 사인이었다.
조진희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공을 던졌다.
-볼.
-볼.
-볼.
-볼.
“스트레이트 볼넷! 단 한 개의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러면 무사 1루. 설진일 선수도 발이 나쁘지 않거든요.”
“조진희 선수가 지금 흥분했습니다. 공이 높습니다. 단순히 볼이 나왔다는 게 아니라 탄착점이 일정하지 않다는 게 더 문제예요.”
“3번 타자는 다름 아닌 송석현 선순데요. 페가수스 입장에선 좋은 흐름은 아니죠?”
“네, 그렇습니다. 송석현 선수를 거르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유선호 선수의 컨디션도 이제 올라올 대로 올라왔거든요. 유선호 선수 같은 베테랑이 무서운 게 흐름을 이어 갈 줄 안다는 점입니다. 컨디션이 일단 올라오면 어떻게서든 좋은 흐름을 쭉 이어 가거든요. 송석현 선수보단 좌타자인 유선호 선수를 상대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할 순 있지만, 단기전은 상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미치는 선수라고 하죠? 컨디션 좋은 선수 한 명만 있어도 경기가 뒤집히는 게 단기전이거든요.”
송석현이 타석으로 향하자 고트 응원단장과 치어리더가 선창했다.
“오오! 오오!”
-잠! 실! 의! 왕! 오! 셨! 도! 다!
“오오! 오오!”
-잠! 실! 의! 왕! 이! 겼! 노! 라!
앰프 하나 없이 오로지 목소리 하나만으로 야구장을 메운다.
응원단장이 선창하면 팬들이 후창 했다.
“아, 시끄러워 죽겠네.”
조진희가 마운드를 발로 꾹꾹 눌렀다.
송석현이 자리를 잡고 서자 정용욱이 조진희에게 사인을 보냈다.
‘슬라이더.’
초구부터 유인구 승부.
하늘 같은 선배의 사인이지만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1횐데, 힘이 아직도 넘치는데 초구부터 피하는 승부?
하지만 포수 입장에서야 투수가 제구도 안 잡히는 데다 타자는 리그 최고의 4번 타자인 만큼 초구 하나를 버리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조진희는 다시 한번 숨을 골랐다.
정용욱의 사인을 무시할 순 없으니 사인대로 던지는 수밖에.
팡!
-볼.
“송석현 선수, 침착합니다. 변화구에 속지 않아요.”
“상당히 잘 빠지는 변화구였는데 잘 참았습니다. 어쩌면 초구 하나는 지켜볼 요량이었나 봅니다.”
정용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송석현이 힘을 풀고 있던 걸 보면 투수의 제구가 날리는 만큼 초구는 안 칠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다면 타자가 공 하나는 지켜볼 걸 예상하고 초구는 그냥 집어넣었을 수도 있었다.
웬만해선 스윙을 아끼는 송석현의 성향을 가늠해 보면 확률적으로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았다.
송석현이기에, 반사적으로 일단 공 하나 빼는 선택을 했다.
겨우 공 하나지만 정용욱은 한 수 말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포심.’
정용욱은 이번에 바깥쪽에 미트를 내밀었다.
힘으로 밀어붙여 보자는 신호에 조진희가 힘껏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1-1. 조진희 선수가 정말 좋은 코스에 공을 집어넣었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네요. 타자도 저건 어쩔 수 없었다는 뜻 같아요. 그만큼 공이 외곽으로 잘 빠져 들어왔어요.”
꿀꺽.
정용욱은 침을 삼키고선 자기가 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긴장했나? 내가? 겨우 1회에 1점 뺏긴 건데?
‘슬라이더.’
조진희의 슬라이더는 존 하단으로 날아가다 바닥으로 푹 꺼졌다.
정용욱이 블로킹을 하면서 1루를 바라봤다.
설진일은 도루 욕심 없이 1루로 귀루.
송석현은 슬쩍 정용욱을 한 번 보더니 타자에게 가지 말라고 사인을 보낸 게 다였다.
“2-1. 조진희 선수의 변화구에 송석현 선수가 속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제구가 잘되는 게 문제인 거 같습니다.”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슬라이더가 타자가 치기 힘든 낮은 코스로 가다 더 낮은 곳으로 빠지다 보니 애초에 타자가 손대기 어려운 코스라 배트도 쉽게 나가질 못해요. 직구가 낮은 코스로 계속 들어간다면 저런 슬라이더에 속을 수밖에 없는데 직구는 높게 들어가고 변화구는 낮게 들어가다 보니 좋은 변화구에도 타자가 속질 않는 거죠.”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조진희 선수가 공을 낮게, 낮게 던져야 합니다. 직구는 높게, 변화구는 낮게 던지면 결국 헛심만 빼는 거예요.”
정용욱이 송석현을 쳐다봤다.
무심(無心).
당최 속을 읽을 수 없는 놈이다.
포수는 타자의 반응을 보고 타자의 노림수를 파악한다.
타자도 상대에게 노림수를 숨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때가 있다.
스윙.
타자가 어떤 공에, 어떤 스윙을 하느냐만 본다면 타자의 노림수는 열에 아홉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송석현은 스윙을 아끼는 타자다.
스윙을 아낀다는 건 포수가 수집해야 할 자료가 적다는 얘기다.
겨우 1점을 빼앗겨서 드는 위화감이 아니다.
타자의 노림수를 당최 알 수 없어 느껴지는 위화감이다.
평소에도 송석현은 읽기 어려운 타자였지만, 형언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자꾸 피어오른다.
‘슬라이더.’
또 변화구.
조진희는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속지도 않는 변화구를 왜 그리도 요구한단 말인가.
정용욱은 다시 한번 변화구를 요구했다.
“…….”
선배만 아니었다면, 아니 정용욱만 아니었다면 제멋대로 던졌을 거다.
리그에서 정용욱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
천하의 조진희라도,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일컫는 정용욱의 말을 거스를 순 없다.
조진희는 다시 한번 슬라이더를 던졌다.
팟!
조진희가 던진 공은 홈 플레이트 앞에서 바운드됐다.
블로킹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정용욱이지만 타자의 앞발 위치에 바운드되는 공을 잡을 도리는 없었다.
“아, 폭투! 조진희 선수의 폭투! 설진일 선수는 그대로 2루로! 2루에서 세입! 3루까진 가지 않습니다.”
“이건 좀 아니에요. 낮게 제구하려는 건 좋은데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이러면 득점권에 주자가 가게 됩니다. 안타 하나면 바로 득점이 날 수 있어요.”
조진희는 순간 욕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3-1.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다.
하물며 송석현에겐 더더욱.
정용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엄지를 두 번 들었다.
타자를 맞혀도 좋으니 몸 쪽으로 바짝 붙이라는 사인이었다.
조진희가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또?
김인환과 최재완을 담갔으면 됐지, 송석현까지?
이런 식으로 이기면 자신의 체면이 어찌 되는지 몰라서 저러는 걸까?
조진희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정면 승부.
한가운데도 좋다. 힘으로 밀어붙인다.
1루에 주자도 없는 만큼 조진희는 다리를 힘껏 든 후 공을 뿌렸다.
탕!
맞자마자 3루 관중석을 향해 날아가는 공.
조진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멀리, 멀리, 더 멀리 뻗어 가던 공은 수원 구장의 담을 넘었다.
-파울.
“파울. 파울입니다. 초대형 파울 홈런을 선보이는 송석현 선숩니다.”
“방금은 송석현 선수가 욕심을 부렸어요. 너무 몸에 붙은 공이었거든요. 그래도 저 공을 저렇게 쳐 내는 것만 봐도 상당히 기술적인 선수라는 걸 알 수 있어요.”
“풀카운트. 오늘은 1회 초부터 경기가 아주 팽팽하게 흘러갑니다.”
조진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이 한 개만 더 가운데로 향했다면 볼 것도 없이 홈런이었다.
정용욱이 다시 한번 사인을 냈다.
-포심. 아웃사이드. 하이.
높은 공은 흔히들 위험하다고 하지만, 정용욱은 종종 일부러 섞어 쓴다.
퍼 올리는 타자가 많은 만큼 높은 공은 어퍼 스윙의 타이밍을 끊기에 적절하다.
어퍼 스윙의 타자들은 높은 코스의 공이 자신들의 약점인 걸 알면서도 이를 두고만 보지 않는다.
높은 공은 낮은 공보다 더 홈런을 만들기 좋은 만큼 타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윙한다.
조진희에게 원한 건 존을 벗어나는 빠른 공.
조진희의 디셉션, 구속과 조금 전 몸 쪽 공이라면 타자에게서 헛스윙을 이끌어 내기 딱 좋은 코스다.
여기에 안 속는다면 1루 채우고 병살을 노리면 그뿐이다.
‘오케이.’
조진희는 지금의 사인이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조금 전의 초대형 파울 홈런을 본 마당에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자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후.”
최성연 감독이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숨이 막힌다.
아직 5회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겨우 1회 초인데 숨이 막힌다.
거센 바람에 팽팽해진 연줄을 보는 기분이다.
조진희는 키킹을 한 뒤 발을 내디뎠다.
공을 숨기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역동적 투구 폼.
공은 그대로 스트라이크존 보더 라인을 향했다.
“하.”
타자가 시동을 걸었다.
송석현의 골반은 틀어졌지만 배트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상하체의 완벽한 분리.
투수의 공이 포수의 미트에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타자의 배트가 번쩍였다.
쾅!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