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021
1021화 선각자의 의도
엽현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그 목소리는 누구였을까?
길게 생각할 여유 없이, 엽현은 재빨리 노인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노인의 인도를 받은 엽현은 조금 전 지상에서 보았던 검종 대전 앞에 도착했다. 대전 입구에는 누군가를 조각해 놓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청삼남!
조각상을 알아본 엽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종을 찾을 때마다 존재하는 청삼남의 조각상.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백발노인은 대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뒤편에 있는 산으로 엽현을 인도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 작은 초가집 앞에 도착했다.
초가집 입구에는 빗자루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는 작은 과수원이 있었다.
그리고 과수원 한쪽에 파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나무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아가씨!”
여인을 향해 공손히 예를 차리는 노인.
이때 여인이 손을 멈추고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인의 얼굴은 갓 익은 과일처럼 청초하고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물통을 내려놓은 여인은 엽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때 엽현 앞에 멈춰 선 여인이 문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구나!”
“무, 무얼 말입니까?”
“정녕 범검에 들어선 것이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귀하는 누구신지요?”
엽현의 질문에 여인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 게냐?”
“그렇습니다.”
“음… 이를 어쩌나. 아직은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
이때 여인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한 자루 검이 그녀의 손안에 나타났다. 순간 엽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이 검은 계옥탑 꼭대기에 있던 청삼남의 검이 아닌가!
잠시 아련한 눈으로 검을 바라보던 엽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이때 검이 몸을 가볍게 떨며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저… 혹시 그 검을 알고 계십니까?”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대는 누구십니까? 또 검의 주인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글쎄, 어디 네가 한 번 알아맞혀 보거라.”
“…….”
엽현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몰라서 물어봤는데 알아맞혀 보라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여기까지 쫓겨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고생을 좀 한 모양이로구나.”
이때 엽현이 질문했다.
“그대는 검종의 무인입니까?”
“그래.”
“그럼 청삼을 입은 검수를 알고 계십니까? 그 검의 주인인…….”
이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저도 알고 있습니까?”
“어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여인이 웃으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직감적으로 그럴 것 같았습니다.”
“네 직감이 맞다. 나는 널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
“하하, 그렇게 쳐다볼 것 없다. 나는 네게 그 어떠한 악의도 없으니까.”
“그럼… 왜 저를 알고 계신 겁니까?”
“그냥 알게 되었으니까 아는 것이지, 왜가 어디 있느냐?”
엽현이 뭔가 더 묻고 싶은 모양을 보이자, 여인이 웃으며 엽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자, 그런 말은 나중에 하고 와서 물주는 거나 돕거라.”
엽현의 손에 이끌려 과수원에 들어온 엽현.
그는 일단 여인이 시키는 대로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때 여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지. 검도의 요체는 일상생활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예전도 그렇고 지금도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너는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저라고 알 수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그것 때문에 과일을 키우고 계셨던 겁니까?”
“하하, 그런 셈이지.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점점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하게 되더구나.”
“어떤 흥미 말입니까?”
“평상심.”
“평상심?”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여인이 엽현을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
“나를 향해 출수 해 보거라.”
그 말에 엽현이 다소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인 순간, 여인이 밑도 끝도 없이 엽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엽현이 혼비백산 천주검을 꺼내 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백 장 밖까지 밀려나 버린 엽현.
제 자리에 멈춰 선 엽현은 손끝을 통해 천주검이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여인이 검을 들어 엽현을 가리켰다. 이에 엽현이 출수하려는 순간, 마치 태산 같은 기운이 그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였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엽현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여인의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네 검은 너무나 조잡하구나.”
“조잡이라고 하기엔 나는 이미 범검에…”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범검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강약이 존재하지. 그리고 너의 범검은 매우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왜 너의 검이 조잡하다고 한지 아느냐?”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 때문이다.”
“마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엽현의 물음에 여인이 엽현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검수가 검을 수련한다는 것은 사실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복잡해지면 그만큼 검의 위력도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 지금 네 마음속엔 너무나 많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네가 인간적이라 할 순 있지만, 검수에게는 매우 불필요한 것이지. 뭐든 하려면 모든 걸 내려놓고 전념해야 한다는 소리다. 내 말 알겠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알겠냐고 묻지 않느냐!”
“…왜 그리 난폭하게 말하십니까?”
“난폭?”
순간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해를 못 한 것이냐, 아니면 반항하는 것이냐? 만약 전자라면 한 번 더 말해 줄 것이고, 후자라면 네 눈에서 독기가 사라질 때까지 두들겨 주겠다!”
이 말에 엽현이 황망히 소리쳤다.
“이, 이해했습니다! 때리지 마십시오!”
엽현의 대답에 여인이 흡족한 듯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부터는 밭에 채소도 좀 심거라.”
“채, 채소를 말입니까?”
“왜, 싫으냐?”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여인이 묻자 엽현이 갑자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바깥에 저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우글우글하게 진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제가 어찌 마음 편히 채소나 심고 있겠습니까.”
말끝을 흐리며 엽현은 여인의 눈치를 보았다.
이에 여인이 엽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날 이용하고 싶은 게냐?”
정곡을 찔린 엽현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해십니다, 헤헤…….”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우는 법. 내게 의지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아,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전에는 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까?”
“훗! 글쎄, 네가 맘에 들어서?”
“…….”
“그나저나 내가 너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앞으로 나를 누님이라 부르거라.”
누님?
순간 얼어 붙어버린 엽현.
“왜, 싫으냐?”
여인이 재차 확인하려 들자 엽현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인데 누님이라 부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이때, 강대한 검세가 엽현의 전신을 휘감았다.
정신을 차린 엽현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님이라 부를 테냐 부르지 않을 테냐…….”
순간 엽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라도 해서 누님이라 불리고 싶은 걸까?
엽현은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누님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때리려 한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엽현은 조금씩 여인의 정신상태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왜, 날 누나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도 억울한 일이더냐?”
여인이 못마땅하다는 듯 묻자 엽현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뭔가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상해?”
“아, 아니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상황이 다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저를 동생으로 삼으려 하는지 영 이해가 되질…”
“되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관두거라.”
이때 엽현이 황급히 대답했다.
“모시겠습니다! 지금부터 누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어찌 불러야 좋을까요?”
“설(雪), 설이 누나라고 부르거라.”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이 누님, 누님은 탑의 검주들과 이미 비슷한 경지에 오르신 것입니까?”
“하하, 아직 멀었다. 그 세 사람 정도의 경지가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
“그럼 여기 있는 동안 채소나 기르면서 몸을 회복하도록 하거라. 절대 밖으로 나가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누님.”
엽현은 설을 만난 것이 일종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강한 검수 곁에 있다 보면 분명 배울 것이 있으리라.
그렇게 엽현은 오두막에 머물면서 낮에는 밭을 가꾸고 밤에는 수련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 * *
천마성역.
금역 밖에선 임평생과 무희가 아직도 떠나지 않고 금역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임평생의 안색이 매우 어두워졌다.
무희 역시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는 이곳에 금역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들어가려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금역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천마족 초대 족장뿐이었다. 당시 그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고, 그 이후로 이 땅은 금역으로 지정되었다.
물론 자고이래로 호기심 많은 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명령을 어기고 금역 안으로 들어간 자들은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때문에 천마족에게 있어 이 땅은 신성함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 엽현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무희가 임평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임평생, 안에서 만난 검수가 그렇게나 대단했나?”
“…내 꼴을 보면서도 그런 질문이 나오나?”
“…….”
임평생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후…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고, 잘못했다간 탈출하지 못할뻔했다.”
“그럼 엽현은?”
“그건 알 수 없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무희가 물었다.
“임평생,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너희들은 어째서 그렇게나 엽현을 죽이려 드는 것이냐?”
무희는 이점이 매우 궁금했다. 그가 아는 엽현은 결코 쉽게 죽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호도자들이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엽현을 죽이려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그의 배후에는 소도나 아라 같은 대단한 강자들이 있지 않은가.
무희가 볼 때 호도자들은 스스로 일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뜸을 들이던 임평생이 잠시 후 대답했다.
“선각자를 알고 있나?”
“물론이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선각자가 남긴 서옥 안에 우리 호도자들에게 극히 불리한 물건이 있다. 그리고 엽현이 그 서옥을 지니고 있지.”
“그게 무슨 소린가?”
무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당시 선각자는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후, 호도자들에게 치명적인 한 가지 물건을 만들어냈지. 그 물건이 세상에 나타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엽현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선각자의 궁극적 목표는 오유겁을 막는 게 아니라 영원히 없애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