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048
1048화 이대로는 죽는다
지면에 도착한 엽현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천봉은 어디 있소?”
“글쎄다. 나도 여긴 처음이라.”
“설마 이미 죽은 것은 아니겠지 말이오?”
“천도가 죽이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라면 분명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가로 양손을 모았다.
“천봉 어르신! 계십니까?”
엽현이 소리쳐 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마 모습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모양이구나.”
“그럼 어쩌면 좋겠소?”
“꼬셔야지.”
“꼬셔? 어떻게 말이오?”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해 보거라.”
“끙….”
잠시 고민하던 엽현이 천봉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천봉 어르신! 여기 무족의 대제사장이 와 있습니다! 우리는 어르신을 구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순간 아목의 눈빛을 느낀 엽현이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상대를 꾀려면 이쪽도 그럴싸한 걸 제시해야 하지 않겠소?”
“그건 맞는 말이지만… 너는 천도가 두렵지도 않은 게냐?”
“나도 사람인데 왜 두렵지 않겠소? 다만 천도와 소도는 잘 아는 사이고, 그 소도는 또 나와는 친구이니 죽이진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그 생각이… 정말 맞는 생각인 것 같으냐?”
엽현이 막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천봉산 깊은 곳에서 한 덩이 화염이 솟구쳤다. 뒤이어 이 화염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불꽃같이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은 긴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에, 양 손목과 발목에는 얇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이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바로 오유계 최후의 천봉이다.
“조심해. 오래전 이미 오유계 최강자 반열에 올랐던 여인이다.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절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니다.”
아목의 말에 엽현이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목, 그런 말은 전음으로 해야지 그냥 말하면 어쩌자는 거요?”
“헤헤, 미안. 까먹었다.”
아목이 전음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전음으로 이야기해봐야 상대방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엽현은 이런 것도 모르고 아목에게 책망의 눈빛을 보냈다.
“에휴… 그대 같은 사람도 실수하는구려.”
바로 이때,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천봉.
천봉의 눈빛은 곧장 아목에게로 향했다.
“무족의 대제사장?”
“그렇소.”
“옆에 있는 자는 무시인가?”
아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봉의 고개가 엽현에게로 향했다.
“실력은 다소 보잘것없군. 다만 천운을 타고난 데다 신분도 범상치 않구나.”
천봉이 아목을 향해 물었다.
“너희 무족이 이 아이를 택한 것은 천운에 편승하기 위함이더냐?”
이에 아목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아이는 보기보다 유능하다오.”
“하!”
천봉이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너희 무족의 대제사장들과 천족의 신사들은 날로 음흉해지는 것이 천도와 똑같구나!”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생존할 수 있겠소?”
이에 천봉이 엽현을 향해 물었다.
“이 여자가 왜 너와 다니는 줄 아느냐?”
“모릅니다.”
“그건 다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 거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음? 이 말을 듣고도 느끼는 게 없단 말이냐?”
이에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목 낭자의 속내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덕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훗날 무족이 뭔가를 요청한다면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도울 생각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목이 엽현에게 따듯한 눈길을 보냈다.
“고마워!”
“흠… 꽤 좋은 태도를 지니고 있군.”
이번에는 엽현이 물었다.
“천봉 어르신, 이번에 제가 찾아온 것은 어르신께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대가는?”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이 물음에 천봉이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자유, 자유를 얻고 싶구나.”
엽현이 눈짓을 보내자 아목이 천봉에게로 다가가 잠시 쇠사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흠… 이건 네 검으로도 자를 수 없다.”
순간 엽현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천주검으로도 불가능하단 말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아목.
“혹시 다른 방법은 없겠소?”
“엄밀히 말하자면, 부족한 건 네 검이 아니라 너의 실력이다. 네가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이 쇠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엽현은 아목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천주검이나 엽현의 부족함이 아니었다. 쇠사슬을 자른 후, 천봉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자유의 몸이 된 천봉이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면, 엽현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 상황을 눈치챈 천봉이 엽현에게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육신의 경지를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이에 천봉이 엽현의 육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멸 금신 초입이라… 진정한 의미의 불멸 금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로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느냐?”
이때 아목이 끼어들었다.
“천봉의 화염으로 전신을 불살라 주시오. 그가 열반 중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오.”
“태워 주십시오!”
아목과 엽현의 말을 들은 순간, 천봉이 지체없이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나갔다.
이를 본 엽현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무리한 부탁이었습니까?”
이때 천봉이 걸음을 멈추고 아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그렇다 쳐도, 설마 너도 모르고 있는 것이냐?”
“뭘 말이오?”
아목이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천봉이 짐짓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범인이 내 화염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내 불꽃이 몸에 닿는 순간 열반 중생이 아니라 정말로 열반에 들 것인데, 너는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것이냐?”
“저, 저 말이 사실이오?”
엽현이 놀란 토끼 눈으로 아목에게 묻자, 아목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
“그러나 네 육신은 분명 견딜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시오?”
천봉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아목의 입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네 혈맥 때문이다. 네 기이한 혈맥이라면 분명 천봉의 화염을 막을 수 있을 거야.”
혈맥?
엽현이 어리둥절할 때, 천봉이 엽현의 몸을 다시 한번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확실히, 네 녀석의 혈맥엔 분명 뭔가 있군. 게다가 이렇게 강한 혈맥 지력은 매우 보기 드문 정도야.”
“그, 그럼 제가 어르신의 화염을 정말로 견뎌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천봉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
“한번 해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않겠소?”
아목마저 천봉의 말을 거들자 엽현의 안색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도대체 남의 몸으로 무슨 시험을 한단 말인가!
이때 천봉이 아목을 향해 말했다.
“시도하는 건 상관없으나, 그 전에 이 쇠사슬부터 끊어다오. 만약 실패해서 죽어버리면 괜히 나만 힘 뺀 셈이 되지 않겠느냐?”
“그건 안 되오. 먼저 불부터 지르시오.”
아목의 말에 천봉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비록 내가 봉인돼 있지만, 이 상태로도 너희 둘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걱정하지 말거라. 사슬을 풀어주기만 한다면 그깟 화염 한 줌이 대수겠느냐? 천봉일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아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구려. 비록 이 아이의 검이 매우 날카롭다고는 하나, 지금 실력으로 사슬을 끊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요. 게다가 일단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 천벌이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소. 지금 이 아이의 육신으로는 천벌을 견뎌낼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누가 그대의 사슬을 풀어줄 수 있겠소?”
“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 아이가 불멸 금신이 된 후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죽여버리면 될 일 아니오?”
고민 끝에 천봉이 엽현을 바라보았다.
“죽을 수도 있다. 두렵지 않으냐?”
“…한번 해보겠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퇴로는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다. 나는 천도의 미움을 산 몸이다. 이런 나를 돕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천봉이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천도가 두렵진 않으냐?”
이 질문에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무서워하길 바라십니까?”
“후후, 나중에 날 원망하진 말거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봉의 손바닥 위에 한 덩이 화염이 생성됐다.
새빨간 화염을 본 순간, 엽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저건… 위험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이 순간, 엽현은 자신의 육신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에는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때 엽현과 눈이 마주친 아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져 보거라.”
이 말에 엽현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천봉을 쳐다보았다.
“준비됐습니다!”
천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안의 화염을 날려 보냈다.
천천히 날아가던 화염이 엽현의 가슴에 닿은 순간, 연기가 피어남과 함께 그의 전신이 일순 화염에 휩싸였다.
연소(燃燒)!
말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엽현의 육신이었다.
제아무리 반보 불멸 금신이라지만 천봉의 화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타버리는 수밖에!
엽현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자신 역시 반보 불멸 금신이 아닌가.
하지만 천봉의 위력을 얼마나 과소평가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봉의 화염!
한편 마구 타오르는 엽현을 보며 아목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에 곁에 있던 천봉이 말을 걸었다.
“멈추고 싶은가?”
“…….”
잠시 침묵 속에 있던 아목이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혈맥의 힘을 개방하거라!”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쾅-!
순간 한 줄기 붉은빛이 엽현의 몸 밖을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혈맥지력!
혈맥이 개방됨과 함께 엽현의 몸 전체가 피를 뒤집어쓴 듯 붉게 변했다. 이와 함께 그의 몸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처음보다 확연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보자, 천봉은 속으로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봉의 화염을 막는 혈맥.
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때 아목이 엽현에게 말했다.
“이제 좀 어때?”
“음… 기껏해야 불길을 줄이는 정도일 뿐이오.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타버리고 말 것이오.”
“그 정도면 됐다.”
뭐? 됐다고?
엽현의 당황한 표정을 본 아목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열반에 이르려면 불로 육신을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네 육신이 완전히 타버리는 시점이야말로 불멸 금신에 이르기 최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다음?”
“구태탈피(舊態脫皮)!”
“탈피?”
아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옛 심경(心境)과 육신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새롭게 태어난다…….”
엽현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곧 그의 머릿속에는 탈피라는 한 단어만 남았다.
현재 그의 육신은 한계점에 이른 상태.
더 이상 나아가려면 지금의 육신을 버려야만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때 아목이 천봉을 향해 말했다.
“천봉, 저 아이는 그대에게 붙어있는 천도의 인과를 계승할 유일한 희망이오. 다시 말해 저 아이가 이대로 죽으면 그대 역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오.”
이에 천봉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 알겠군. 너는 처음부터 저 아이가 불멸 금신에 이르지 못할 걸 알고서 나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어. 자유와 불멸 금신을 맞바꿀 요량으로 말이야. 내 말이 틀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