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071
1071화 마음에 들었으니까
말없이 아목의 입만을 바라보는 엽현.
“그가 말하길 네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수많은 인과들이 부담스럽다고 하더구나. 이제 알겠느냐? 그 누구도 단지 네 배후만 보고서 널 택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그는 선각자와 그 여인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주저했었지.”
“아목, 이해가 되지 않소.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그는 왜 날 인왕으로 택한 것이오?”
아목이 엽현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마음에 들었으니까.”
마음에 들어? 내가?
엽현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도 아목의 말은 계속됐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느냐? 당시 나는 네 운명을 엿보다가 소복의 여인에게 죽을 뻔 했었다.”
“그때… 분명 기억나오. 하마터면 오유계가 날아갈 뻔 했었지.”
“그럼 왜 나를 구해 줬는지도 기억나느냐?”
엽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구한 이유?
그때 이유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던가?
“표정을 보아하니 기억이 나질 않는가 보구나. 그럴 만도 하지.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유 따윈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너는 아라와 만났을 때도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흔쾌히 그녀를 거둬 주었다. 이용할 목적이 아닌, 단순히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지. 훗날 그녀가 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것은 모두 먼저 네가 심어둔 선한 마음의 결실인 것이다.”
“결실…….”
“그래. 호의를 보인 사람에게는 한없이 잘해주고, 적의를 보인 자들에게는 귀신보다 더 악랄하게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너 엽현이지.”
“…….”
“소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있어 자기란 생명연장의 수단. 너는 그 귀중한 자기를 소도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지.”
이에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알다시피 소도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소. 그에 비해 내가 베푼 호의는 별것도 아니었소.”
아목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엽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시오?”
“너는… 네 주변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너에게 한 가지 말 해 주고픈 것이 있다. 너의 전생이 어떻든, 운명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꿋꿋이 네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거라.”
네 인생을 살아라!
엽현의 안색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처음엔 그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운명을 벗어나서 사는 것은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때, 아목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엽현이 그 뒤를 쫓았다.
다시 나란히 걷게 된 두 사람.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너는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다. 앞으로 무엇이 닥치던지 이 점을 잊지 말거라.”
“아목. 그대가 조금 전에 하다가 멈춘 말이 있지 않소.”
“무슨 말?”
“선각자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요?”
“…….”
잠시 침묵하던 아목이 다시 운을 뗐다.
“아까 말했듯이 이 우주에 대한 선각자의 이해는 천도조차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아목이 엽현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너는 선각자가 어디서 온 것 같으냐?”
“…….”
“처음 나는 이 모든 일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훗날 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와 같더구나. 네 몸에 걸려 있는 인과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려면, 먼저 선각자의 신분부터 파헤쳐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 그럼, 여기서 문제. 그렇다면 그 여인이 너를 위해 막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야… 내게 걸려 있는 인과가 아니겠소?”
“누구와 연관된 것이지?”
“…….”
엽현이 대답하지 못하자 아목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네 몸에는 분명 선각자의 인과가 붙어 있지만, 그녀가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인과는 네게 무해하기 때문이지.”
이 말을 들은 순간, 엽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설마… 선각자의 것보다 더 커다란 인과가 걸려 있단 말이오?”
다시 엽현을 돌아 본 아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각자의 인과보다 더 큰 인과!
엽현이 다급히 질문하려 하자, 아목이 고개를 저으며 선수를 쳤다.
“아무 질문도 받지 않겠다. 더 이상은 나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아목 낭자…….”
아목은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입이 굳게 닫힌 것을 본 엽현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아목이 엽현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성 안에 있는 한 객잔이었다. 그들이 실내로 들어서자 점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황송한 표정으로 아목을 향해 달려왔다.
“대제사장을 뵈옵니다!”
이에 장내에 있던 무인들 또한 아목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때 엽현의 시야에 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객잔의 사장이었다.
평범한 회색 장포 차림의 남자는 외부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는 듯 한쪽에서 무덤덤하게 밀가루를 치대고 있었다.
“자, 모두 고개를 드시오.”
아목의 말에 무인들이 모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 이곳에서 긴밀히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모두 자리를 비워 주면 고맙겠소.”
이에 무족 무인들이 앞다투어 객잔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장내가 정리되자 아목은 중년인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강숙(江叔).”
강숙이라 불린 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엽현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네가 선택한 아이더냐?”
“그렇습니다.”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강숙.
“네가 선택한 것이니 틀림없겠지.”
“한 가지 청이 있어 왔습니다.”
“내게 부탁을? 말 해 보거라.”
“이 아이를 위해 연옥(煉獄)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연옥!?
순간 중년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연옥을 열어달라고?”
“그렇습니다.”
“흠…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진심입니다.”
아목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중년인이 어두워진 얼굴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과도 말이 끝난 것이냐?”
아목은 그제야 엽현을 향해 설명했다.
“우리 무족에는 ‘연옥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는 일종의 수련 장소로써 대제사장이 되려는 자들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 그 길을 걷게 하려는 것이오?”
엽현의 질문에 아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렇다면 너를 여기서 내 보낸 후, 무술절(巫術切)을 이용해 너와의 인과를 모두 끊을 것이다. 그리되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목.
하지만 엽현은 그녀가 진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다만 하나 알아 두시오. 내가 승낙한 것은 그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라는 것을.”
이 대답에 아목이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엽현에게서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럼 기본적인 것을 알려 주겠다. 일단 길에 들어서게 되면 무공은 일절 사용할 수 없고, 불멸금신도 제거될 것이다. 즉, 보통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멸금신을 제거한다고? 그런 게 가능한 것이오?”
“물론이다.”
아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족 대제사장을 무시하지 말거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불멸금신은 물론이고 불사지체와 태극순도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다.”
“…….”
충격적인 이야기에 엽현은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그 동안 속도나 빠르게 해 주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목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건 없다. 버티지 못하겠다 싶을 땐 언제든 포기할 수 있으니까.”
“아목, 하나 묻겠소. 내게 연옥의 길을 걷게 하려는 생각은 원래 계산된 것이었소? 아니면 이곳에 와서 떠오른 것이오?”
이 질문에 아목이 엽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네게 꼭 필요할 것 같아 권하는 것이다.”
“음… 좋소. 그럼 바로 시작하겠소!”
“확실히 결정한 게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여 의지를 내비쳤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받아들인 거지?”
“왜냐하면, 그게 나와 그대를 위한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이오!”
아목은 엽현의 확신에 찬 듯한 얼굴을 잠시 응시하고는 강숙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숙. 부탁드립니다.”
이에 강숙이 다소 주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녀석아, 어쩌려고 이러느냐? 이 아이의 실력으로는 절대……”
“얕보지 마십시오.”
이때 엽현이 갑작스레 끼어들자 강숙이 엽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 일단 들어가게 되면 곧장 후회부터 할 게다. 알고 있느냐?”
“상관없습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더 후회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강숙이 아목을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친 아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주십시오.”
“이 녀석들이…”
크게 한숨을 내쉰 강숙은 결국 두 사람을 데리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뒤이어 그가 손을 펼치니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검은 돌풍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사람 크기만 한 차원문으로 변했다.
연옥의 길!
이때, 세 사람 주위로 무족의 강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검은 문을 확인한 순간, 그들의 안색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들에게 있어 이 연옥의 길은 연옥 자체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게다가 무족 역사상 이 길을 끝까지 가본 것은 단 세 명.
바로 아목을 포함한 세 명의 대제사장들뿐!
자칫 목숨이 위험할지 모르는 이 길을 대체 누가 도전하려 한단 말인가!
바로 이때, 차원문에 정신이 팔려있던 무인들이 마침내 엽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대제사장이 새로 뽑은 무시가 아닌가!”
이 사실을 몰랐던 이들의 표정이 다소 기이하게 변했다.
아목을 제외한 다른 두 제사장들의 무시는 무족 내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청년은 그에 비하면 다소 모자라지 않은가.
물론 아목이 결정한 바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다만 몹시 의아했을 뿐.
이때 아목이 엽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잠시 구결을 외우던 그녀는 눈을 번쩍 뜸과 동시에 한 손가락으로 엽현의 가슴을 가리켰다.
“귀원(歸元)!”
쾅-!
순간 엽현의 육신이 덜덜 떨리면서 그의 안색이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창백해져갔다. 이와 함께 그의 몸 안에 충만했던 기운도 순식간에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탄탄했던 근육과 골격도 변화를 보이더니, 어느 순간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
털썩.
순간 기운이 빠져나간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갓난아기가 된 양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아목이 재차 수인을 맺었다.
“화경(化境)!”
쾅-!
한 줄기 묵광이 엽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 엽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 되면서 그의 경지가 완전히 봉인됐다.
이로써 육신과 경지 모두에 금제가 걸린 것이다.
범부(凡夫)!
한 명의 보통사람으로 탈바꿈한 엽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목이 손을 뻗자 계옥탑이 그녀의 손으로 딸려 나왔다. 계옥탑 뿐만 아니라, 그의 몸 안에 있던 신물이며 신병들도 마치 자석에 딸려가듯 아목에 의해 수거되었다.
아목은 몸을 굽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엽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듣거라.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본심과 초심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자는 극히 드물다. 왜인줄 아느냐? 왜냐하면, 인생이란 길 위에는 언제나 문제가 네 발목을 잡고, 도처에 유혹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
“지키는 것은 어렵고, 포기하는 것은 쉽다. 이것만 명심하거라.”
말을 마친 아목은 시선을 강숙에게로 돌렸다. 이에 강숙이 소매를 펄럭이자 엽현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