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078
1078화 내가 틀렸구나
“미안하지만 남은 날 배신할지라도, 나는 절대 동료를 저버리지 않소!”
소리를 버럭 지른 엽현은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인가?
엽현은 황급히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인의 주먹에 관통당했던 복부가 배가 멀쩡한 것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 이것도 일종의 시험 과정인 것이오?”
엽현이 당황해하며 묻자 여인이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요?”
이때 여인이 엽현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무족엔 아직 대제사장이 건재하다. 즉, 너는 대제사장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니란 소리지. 혹시 무시의 자격으로 들어온 것인가?”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게다가… 순수한 무족의 혈통이 아니로구나.”
“그게 무슨 상관이오? 무족 역시 인간과 같은 뿌리를 지녔거늘!”
“그 말은… 대제사장이 한 것이냐?”
“그렇소!”
“그 아이는 확실히 나보다도 시야가 더 넓은 것 같군.”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엽현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 갇히게 된 것이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아목 낭자가 말하길 그대는 무족 역사상 가장 강한 대제사장이라 했소. 그 말은 무족 전체에서 그대를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소리겠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대가 이곳에 갇힌 것은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순간 엽현을 보는 여인의 눈에 이채로움이 흘렀다.
“꽤나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럼 말해 주시오. 왜 스스로를 이곳에 가둔 것이오?”
“…….”
엽현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과 마주 섰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오?”
엽현의 계속된 질문에 여인이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물이었다.”
괴물?
“그게 무슨 소리요?”
이에 여인이 엽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제사장이 된 후, 나는 무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다른 부족은 물론 무족 무인들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지. 그렇게 해서라도 부족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것이었으니까.”
“…….”
“무슨 생각 하느냐? 너도 나를 괴물이라 여기는 것이냐?”
엽현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해할 수 없소. 세상 그 어떤 이익도 주변 사람들의 목숨과 바꿀 순 없소.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오?”
“…….”
“어쨌거나, 그 후로 죄를 깨닫고 스스로를 가둔 것이오?”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냐? 나는 한 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 없다.”
“…….”
“하지만 사부는 내가 틀렸다면서 이곳에 들어와 스스로 고민을 해 보라 하셨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이때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이에 여인이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난 틀리지 않았다!”
잠시 여인의 눈을 응시하던 엽현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의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소. 다만…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이 말을 들은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 이해한다고?”
엽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리 행동한 까닭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무족 전체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자신의 부족을 위하는 마음을 누가 잘못됐다고 할 수 있겠소?”
이때 여인이 엽현에게 한 걸음 다가가 얼굴을 마주했다. 이 순간 그녀의 눈빛에 깃들어 있던 살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너… 인제 보니 좋은 놈이었구나.”
여인의 표정은 겨울이 녹아 봄이 찾아온 것처럼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 해 준 것은 엽현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던 엽현이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다소 듣기 거북할 수도 있는데 들어 보겠소?”
“상관없으니 말 해 보거라.”
여인이 허락하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족을 생각하는 그대의 마음은 전혀 틀리지 않았소. 다만 그 방식은 잘못 됐소.”
“무슨 말이냐?”
“그대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했소. 하지만 희생당한 소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매우 불공평한 일이오. 그렇지 않소?”
“…….”
“짐작건대 무족을 위해 그대가 희생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리할 것이오. 내 말이 맞소?”
“물론이다! 부족의 이익이 나의 목숨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소? 다른 이들도 그대처럼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 보시오? 아마도 살고 싶어 하는 자가 더 많지 않겠소?”
엽현의 말에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등!”
“평등?”
여인이 엽현을 쳐다보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족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대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는 부족 전체의 생사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소. 그렇기에 결정은 언제나 공평하고 평등해야 하는 것이오. 그대는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 했소. 하나 묻겠소. 희생당한 자들의 대부분은 약자이지 않았소?”
“그렇다.”
“또 하나 묻겠소. 이 약한 무인들은 무족 백성이 아닌 것이오?”
“그들도 똑같은 백성이다.”
여인이 대답하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소. 강하건 약하건 모두 그대가 보호해야 하는 무족 백성들인 것이오. 이 점, 인정하시겠소?”
“인정한다.”
“사실 모든 이들이 그대처럼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오. 대부분은 그저 살아왔던 것처럼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라오. 물론 그대야 대제사장이었으니까 전체를 바라보는 게 당연하지만, 만약 그대가 일개 무족 일원일 때 상부에서 그대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소?”
여인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 갈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대의 지향점은 틀리지 않았소. 다만 대제사장이란 무족을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요.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대들 제사장들은 마치 신과 다름없소. 그대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그렇게 그대를 신봉하고 따르는 백성들인데, 어찌 그리 쉽게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이오?”
이때 듣고만 있던 여인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럼 불가피하게 누군가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전쟁을 선택하겠소. 소수의 희생보다는 부족 전체가 함께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이오. 이 편이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
여인이 물끄러미 엽현을 바라보자 엽현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나처럼 했다가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 어쩌나 생각하고 있소?”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부… 사부 말이 옳았습니다. 제 방식은 틀렸던 것입니다.”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그녀의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양손과 다리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본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사, 사부!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여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처음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교만한 나머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지. 내가 일을 행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고해하듯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친 여인은 고개를 돌려 엽현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원래 고아였다. 사부께선 오갈 곳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친히 거둬 주시고, 글과 무공, 그리고 무술(巫術)을 알려주셨지. 자질이 썩 나쁘지 않았던 나는 결국 무족 역사상 가장 강한 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잘못되었던 것 같다. 누구보다 빠르게 탄탄대로를 걸어온 나는 안하무인 격으로 모든 일을 내 멋대로 처리했다. 그러다가 결국 나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부족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었고, 이 일로 하나뿐인 사부가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이곳에 가두게 된 것이지.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억울함과 답답한 마음만 있었을 뿐,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인은 복받쳐 오르는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사부께서 떠나시던 날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 실망의 눈초리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사부를 더욱 실망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
“그렇다면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이오?”
엽현의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심이 섰다. 이제 나가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럼 나도 같이 데리고 나가 주시오!”
이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금 시험을 치루는 중이지 않느냐?”
“내가 그대를 설득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내 능력으로 쳐야 하지 않겠소?”
“음… 확실히 당사자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긴 하지. 하지만 네 말은 들어줄 수 없다.”
“어째서 말이오?”
엽현이 의아해하자 여인이 엽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느냐?”
고개를 젓는 엽현.
이에 여인이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바로 너의 됨됨이 때문이다. 만약 네 인품이 무시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면 대제사장을 대신해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너의 요수 친구는 다치지 않았다. 네가 본 것은 그저 환상이었으니까.”
“아…….”
“무족 내에서 대제사장의 무시는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다. 만약 네 한 목숨 살리고자 따르던 요수들을 내팽개쳤다면, 나는 너를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무족도 배신할 가능성이 크니까. 인제 와서 하는 말인데 대제사장이 사람 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나는 무시가 되기엔 너무 약하오.”
엽현의 말에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무시가 되려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더냐? 실력이 부족하다면야 수련으로 끌어올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품은 쉽게 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에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왜 나를 데리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오? 딱히 방해하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하, 너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혼자서 해낼 수 있다. 만약 스스로의 힘으로 이 길을 완주한다면 무족 전체가 너를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대제사장이나 무시라는 지위가 아닌 너 자체에 대해 존경심을 표할 것이다.”
여인의 말을 곱씹어 본 엽현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옳소. 내 힘으로 끝까지 가보겠소!”
“잘 생각했다. 살아서 보자꾸나.”
여인이 뒤돌아서려는 이때, 엽현이 문득 물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다시 대제사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이에 여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상상에 맡기마.”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여인은 자취를 감췄다.
이를 본 엽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그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엽현이 돌아서려는 이때, 갑자기 검은 붓 한 자루가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혹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오면 이 붓으로 ‘래(来)’자를 쓰거라. 그럼 내가 바로 달려가마.”
여인의 음성에 엽현은 후다닥 눈앞의 붓을 낚아챘다.
무족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리는 대제사장.
위기 시에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패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엽현은 온몸이 쑤셨지만,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