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14
1114화 기분 나쁘지는 않죠?
무성.
이때의 무성 상공에는 스무 명의 흑의인들과 열아홉 명의 정신들이 대치 중이었다.
정신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태일과 신공이었다.
두 사람을 포함한 정신들은 모두 주재경의 강자다.
경지로만 놓고 본다면 소도나 아라, 그리고 천도를 제외하고는 오유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검종 같은 특수한 세력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잠시 눈앞의 흑의인들을 노려보고 있던 태일이 짧게 외쳤다.
“출수!”
그의 말과 동시에 열아홉의 정신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반대쪽의 흑의인들 역시 물러남 없이 정면으로 이들을 마주했다.
한편 지상에서는 무족 족장인 무시와 천신족의 호천이 나란히 서서 전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천은 미리부터 천족을 이끌고 무성에 와 있었다. 이는 각개격파 당할 걸 우려한 엽현이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손을 잡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군.”
무시의 말에 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있나. 역시 생존이 가장 중요한 것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원수이길 고집한다면 두 부족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두 부족은 각각 신사와 대제사장이 존재함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만약 이 둘이 없었더라면 설령 둘이 동시에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손을 맞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대황국 상공.
허공을 들여다보던 노인은 한참 후에야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흥, 꽤나 머리를 굴렸구나. 허나 너의 약점은 저들만이 아닐 텐데?”
“혹시 부문종과 만유서옥을 말하는 건가?”
엽현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하자 노인이 황급히 한 쪽 공간을 응시했다.
부문종 상공.
이때의 부문종 상공에는 다섯 명의 흑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앞에는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정신이 서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 불주신산에서 온 정신들이었다.
오대오의 대치 상황!
이와 똑같은 장면은 만유서원에서도 벌어졌다.
이 날 만유서원 상공에는 열세 명의 흑의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주재경의 강자들.
만유서원에 부문종보다 많은 인원이 배치된 것은 장문수가 엽현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목표 역시 장문수였다.
하지만 이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 앞에 다섯 명의 정신들과 검종의 고노, 그리고 진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만유서원 상공에는 거대한 팔괘진이 설치돼 있었다.
이 진법 하나에 만유서원의 모든 무인들이 달라붙어 있으니 단 시간 내에 영기가 부족해 멈출 일은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부문종, 만유서원, 그리고 무성이 해야 할 일은 매우 간단했다.
그저 버티는 것. 아라가 출관할 때까지 버티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일단 아라가 나오게 되면 판도는 급격하게 변하리라!
* * *
무성 상공.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노인은 크기 인상을 찌푸렸다.
엽현이 미리 방비해 놨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엽현은 히죽히죽 웃으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아라가 돌파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시간은 엽현과 아라의 편이었다.
엽현은 고개를 돌려 아라가 폐관 중인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소도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소도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 설령 천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아라를 방해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모든 면에서 엽현 쪽이 유리한 상황.
엽현 역시 이를 느끼고 있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한편 공중에 있는 노인의 표정은 다소 침착하게 내려앉았다.
출수하지도, 물러나지도 않는 모습.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를 보자 엽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상황은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저 영감탱이가 뭘 기다리는 거지?
바로 이때, 허공에 돌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치마를 입고서, 한 손에는 먹다가 반쯤 남은 물고기를 들고 있는 여인.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돌아선 여인은 다름 아닌 천도였다.
천도!
천도의 등장에 평정심을 보이던 노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와 함께 다소 긴장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여인이 왜 여기 나타났단 말인가!
엽현 역시 천도를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무슨 일이지?
이때 노인이 먼저 천도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당초, 개입하지 않기로 했던 것 아니었소?”
이에 천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이다. 방해할 생각은…”
바로 이때, 천도 곁으로 바람처럼 달려온 엽현이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침내 왔구려! 올 줄 알고 있었소!”
“…….”
엽현의 돌발행동에 아천이 곁에 있던 아목에게 속삭였다.
“저 둘이 원래 잘 아는 사이였소?”
“글쎄 말이오.”
한편 당사자인 천도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친하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엽현이 그녀가 들고 있던 물고기를 크게 한 입 베어 먹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음! 역시 일품이군! 역시 그대가 구운 고기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 같소. 아니, 지난번 것보다 요리 실력이 더 늘은 것 같은데?”
“……”
장내 무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하는 한편, 노인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저 둘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던가?
그렇다면 천도는 중립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때 천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어라 말하려 하자, 엽현이 빠르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천도, 걱정하지 마시오. 나 엽현이 버티고 있는 한…”
말을 하던 엽현이 성난 표정으로 흑의 노인을 가리켰다.
“저런 악당들에게 오유계가 짓밟히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소. 누구라도 그대나 오유계를 괴롭히려는 자들은 먼저 이 엽현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할 것이오!”
엽현이 말을 마친 순간, 천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때 엽현의 눈앞에 붉은 부적 한 장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그의 미간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부적이 사라진 순간, 엽현이 화들짝 놀라며 천도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확 들었던 것이다.
한편 지상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소도의 표정에도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천도 앞에서 맹세를 하다니,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엽현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재빨리 천도를 향해 공손히 손을 모았다.
“저, 천도. 방금은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소. 흠, 흠. 조금 전 했던 말을 취소할 수 있겠소?”
“취소?”
순간, 천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이미 늦었다. 네가 한 맹세는 평생 숙명처럼 널 따라다닐 것이다.”
“…….”
숙명!
엽현은 당황한 나머지 입이 바짝 말랐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이렇게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엽현은 소도를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한 맹세는 인과를 형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엽현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한 번 만들어진 인과를 끊어낼 능력도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맹세의 대상이 천도라는 점이었다.
천도!
오유계의 수호자인 그녀와 맹세를 한 것은 곧 오유계 전체와 맹세를 한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무슨 맹세?
천도와 오유계를 지키겠다는 맹세였다.
소도는 측은한 눈으로 엽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놈.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더니… 딱 네 놈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엽현이 다급히 입을 뻐끔거리는 이때, 천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오유계의 무수한 생령을 대표해 너의 큰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
“하하… 이미 같은 편인 마당에 그리 예 차릴 것 없소.”
엽현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득실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지금의 위기부터 넘기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엽현은 흑의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잘 들었겠지? 누구든 오유계를 건드리려 한다면 나 엽현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엽현은 이미 천도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한편, 흑의 노인은 상당히 분개한 상태였다.
“천도! 분명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인제 와서 말을 바꾸겠다는 거요!?”
“무슨?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익! 지금 그놈의 편에 서 있는 것 아니오! 정황이 분명한데 이래도 발뺌을 하겠다는 거요?”
천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뭐라 대답하려는 이때, 엽현이 검을 뽑아 노인을 겨누며 소리쳤다.
“길게 말할 것 없다! 덤비던가 아니면 썩 꺼지던가 선택해라! 오유계 모든 생령을 대표해 경고하건대, 우리는 너희를 환영하지 않으니 빠른 시일 안에 떠나길 바란다. 삼일! 삼일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그땐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흥, 날뛰는 건 너희들이지. 다짜고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이냐! 그렇지 않소, 천도?”
엽현이 천도를 보며 묻자 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엽현이 만족해하며 다시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출수하지 않는 거지? 혹시 천도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녀는 출수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할 테니까. 나 엽현이 너희 전부를 상대할 것이다!”
“나는 진짜 못 도와준다.”
천도가 낮게 속삭이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나설 것 없소. 만에 하나 내가 패하게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합시다!”
“무슨 얘기를…”
천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때 엽현은 이미 흑의 노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 한 줄기 검광이 장내에 번뜩였다.
하지만 그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노인은 이미 수백 장 뒤로 신형을 물린 상태였다.
노인은 엽현과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상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엽현도, 소도도 아닌 바로 천도였다.
천도.
그녀는 얼마나 강한 존재일까?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 그녀가 개입하게 된다면 상계의 승산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왜냐하면, 상계의 정예들은 아직 오유계의 도착하지 않은 데다 오유계에서 회유한 세력들은 전력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현 상황에서 천도와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게다가 소도가 건재하고, 여기에 아라까지 출관해 합세한다면 그땐 정말 대화조차 어렵게 되리라.
노인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출수를 해야 할까? 아니면 물러나서 후일을 기약해야 하나?
물론 노인에게도 이럴 때를 대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천도가 나서게 된다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 정도 패로는 천도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 그의 눈앞의 공간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잠시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이를 본 엽현이 급히 추격하려 하자, 천도가 웃으며 그를 가로막았다.
“따라갔다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천도, 하지만…”
“후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아라의 곁을 지키는 게 먼저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엽현이 다시 천도를 쳐다보았다.
“혹시 화나지 않았소?”
“네가 조금 전 나를 이용한 것 말이냐?”
“그렇소.”
천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화낼 일이 뭐가 있느냐? 나 역시 피차일반인 것을.”
“하하, 좋은 마음가짐이오. 그대가 속이 좁지 않아 다행이오.”
“그나저나 만유서옥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물론!”
엽현이 흔쾌히 대답하고는 만유서옥을 꺼내 천도에게 내밀었다.
천도는 서옥을 받아들고 잠시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엽현에게 돌려주었다.
“혹시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소?”
“상계의 물건이 들어있다.”
엽현이 질문을 이어가려는 찰나 천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상계와 오유계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으로 형성된 것으로 그들에겐 이 장벽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 다만… 편법을 써서 넘어올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도 가능하단 말이오?”
“물론이다.”
바로 이때, 엽현의 곁에 소도가 불쑥 나타났다.
“어떻게 말이오?”
소도의 질문에 천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음령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