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16
1116화 무성
소도의 말에 흑의인이 엽현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이려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탑과 서옥이 필요한 것뿐.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녀석이 순순히 내놓을 리 없으니 우리도 할 수 없이 거칠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강력한 배후를 생각해 보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생존 때문이다.”
순간 소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희 상계가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란 건가?”
“…애석하게도 그렇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육유계로 돌아가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지금 이 상태라면 우리 역시 오유겁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때 엽현이 물었다.
“헌데 애당초 쫓겨난 이유가 뭐지?”
흑의인이 엽현을 바라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계의 법칙을 바꾸려 했거든.”
“음?”
이 말을 듣자 엽현은 속으로 다소 의아했다.
“육유계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법칙 때문이 아니었나?”
이에 흑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식은 확실히 육유계를 안정화 시키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또 문제가 생겼다. 바로 계급이 생겨버린 것이다.”
“계급?”
“그렇다. 알다시피 육유계에서 평범한 자들은 영기를 사용하지도, 무공을 익히지도 못한다. 이런 것들은 오직 연합전이나 몇몇 강대세력의 제자만이 가능한 것이지. 평범한 자들은 날 때부터 그렇게 살다 죽는 것으로 운명이 정해져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백 년도 안 되는 삶을 살다 죽는 것이지. 반면 선택받은 자들은 처음부터 영기와 각종 수련 자원을 지원받는다. 이러한 자들이 커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또한 무공을 수련하게 되고 보통 이의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수명을 보장받는다.”
흑의인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육유계의 수련 자원과 자격은 모두 강대 세력들에 의해 통제된다. 같은 사람이라도, 날 때부터 등급이 매겨지게 되지. 노력? 자질? 이런 것들은 허상이나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시작점부터가 다른 자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이래도 육유계가 나은 세계처럼 보이나?”
이에 소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생 신분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도 한마디 하겠다. 네 말대로 사람의 출생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 후의 인생은 개개인에게 달린 것이다. 신분이 좋지 않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평민으로 태어났는데 거기에 노력까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닌가?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세상에 나타났던 초절정 고수들 중, 신분이 좋지 않았던 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소도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흑의인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물론 네가 말한 부분은 불공평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통제가 없다면 육유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평범하게 태어난 자들에게는 다소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 왜냐하면,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기도 쓰지 못하고, 수련도 할 수 없고, 나아가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할 수도 없을 테니까. 단…”
잠시 말을 끊은 소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옳고 그름이란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공평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정말로 이 세상이 공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소도의 말에 장내 무인들은 침묵에 잠겼다.
공평?
이는 부여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인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아무런 실력도 없이 공평을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때 흑의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다. 육유계나 상계나 어느 한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있을 뿐이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서옥을 노리는 것을 잘못됐다 할 순 없는 것이다.”
“헛소리!”
엽현이 소리쳤다.
“너희가 하려는 짓은 엄연한 도둑질이다. 어딜 어물쩍 묻어가려고! 그렇게 따지면 홀아비인 자는 남의 부인을 마음대로 뺏어도 되는 건가? 평생 홀로 살기는 싫으니 남의 부인을 빼앗고서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일 뿐, 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되는 일인가?”
엽현의 말에 한쪽에 있던 아목 등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비유가 꽤나 그럴싸했던 것이다.
소도 역시 엽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그의 말은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도둑질을 입장 차이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이때 흑의인이 엽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엽현, 어쨌거나 우리는 서옥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도대체 서옥으로 뭘 할 셈이냐? 그게 있으면 육유계에 대항할 수 있는 건가?”
흑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선각자가 대관절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서옥 안에 육유계의 지보들이 들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당시 선각자가 육유계로부터 지니고 나온 것이었지.”
“지보? 무슨 보물?”
“하하, 그걸 네게 말 해 줄 순 없지.”
엽현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이때, 돌연 청명한 검명 소리가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무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지상으로부터 한 줄기 검광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감과 동시에 그 사이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라!
은갑을 입고 허리춤에 장검을 장착한 아라. 분명 그들이 아는 아라가 확실했으나, 이때 그녀의 외모는 다소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한 명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완전히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아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황국의 수많은 강자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러댔고, 이 소리는 구름을 뚫고서 성역 전체에 울려 퍼졌다.
대황국의 자랑이자 신앙, 불패아라!
아라를 바라보는 대황국 백성들의 눈에는 열광과 흥분의 기색이 가득했다.
이윽고 엽현 등의 곁으로 다가온 아라, 그녀의 시선은 곧 흑의인에게로 향했다.
흑의인 역시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역시… 한무기 최강의 무인다운 위용이군. 그럼 어디 그 실력이 어떤지 한 번 확인해 볼까?”
그의 음성이 떨어진 순간, 무형의 기운이 장내를 뒤덮었다.
찰나의 순간, 흑의인과 아라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소리소문없이 천 장 밖으로 옮겨졌다.
파허경 절정!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진 이때, 소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의 극성(極聖)… 저 자는 무성(武聖)이었군…….”
무성(武聖)!
엽현이 소도를 쳐다보았다.
“무성이 무엇이오?”
“무가 극에 달하면 성(聖)이란 칭호를 얻는다. 이 정도 경지는 육유계 내에서도 흔하지 않다. 어쩐지 아라를 앞에 두고도 자신만만하더니…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로군.”
엽현은 고개를 돌려 아라와 흑의인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공간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변해있었다.
둘 모두 파허경의 강자!
“잘 봐 두어라. 네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소도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아라의 엄지손가락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안으로 검이 들어왔다.
이와 거의 동시에 한 줄기 검광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흑의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흑의인이 가볍게 허리를 비틀어 검광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바로 이때,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으니, 다름 아닌 아라였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날카로운 검끝이 흑의인의 목을 향했다.
이때 흑의인의 목이 기이하게 뒤로 꺾였다. 검이 얼굴 위를 스치듯 지나쳤고, 이 틈을 타 흑의인은 자리를 박차고 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막 자리에 멈춰 섰을 때, 또 다시 한 줄기 검광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아라의 공격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혀 여유를 주지 않았다.
흑의인은 이번에는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라의 일검이 펼쳐졌을 때, 그는 이미 세 번째 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의인은 날아드는 검을 양 손바닥을 겹쳐 잡으려 했다. 바로 이때, 세 줄기 검광이 불현듯 그의 좌, 우, 그리고 후방에서 날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빛남과 동시에 세 개의 권영(拳影)이 검광들을 맞이했다.
콰콰쾅!
여러 차례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두 사람은 수십 장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아라가 착지한 순간, 그녀 손에 있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이에 다시 강렬한 일권을 뻗어내는 흑의인.
쾅-!
흑의인에 주먹에 허공에 멈춰 선 아라의 검.
이때 흑의인이 발을 구르자 검이 멀리 튕겨 나갔다. 이와 동시에 어느새 아라 앞에 나타난 흑의인이 맹렬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라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이 주먹엔 마치 범부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인 양 아무런 힘의 파동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때, 아라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흑의인의 주먹은 그대로 허공을 후려쳤고, 그 일대는 일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격에 실패한 흑의인이 가볍게 몸을 뒤틀자 한 줄기 검광이 날카롭게 그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흑의인이 몸을 완전히 돌려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 이미 피한 줄로만 알았던 검광이 기이하게 방향을 꺾어 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쉭-!
일검낙공(一劍落空)!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어느새 수십 장 밖으로 신형을 옮겼다. 이때 그의 소맷자락 끝은 날카롭게 잘려나간 상태였다.
이 순간, 아라가 검을 치켜든 채로 흑의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육신은 마치 막 소멸할 것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러자 흑의인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면서, 왼손바닥으로는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리눌렀다. 이 동작과 함께 그의 주위 공간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걸음을 멈춘 아라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를 본 흑의인은 왼손바닥을 앞으로 내밈과 동시에 오른 주먹으로 정권을 내질렀다.
쉭-!
쾅-!
검광이 주먹에 막혀 터져나간 이 순간, 흑의인의 앞 공간이 일렁이더니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다름 아닌 검을 높이 치켜든 아라였다.
파파파파팟!
찰나의 순간, 여러 개의 검광이 교차하며 흑의인의 주변에서 번뜩였다.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지만, 눈에 보이는 검광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아라의 검은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끝나지 않을 듯 난무하는 아라의 검!
잠시 후, 외부에 있는 무인들은 안쪽의 상황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공간 안에 검광과 폭발이 뒤죽박죽 혼재된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엽현은 고개를 돌려 소도를 바라보았다. 이때 소도는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했다.
이 모습을 보자 엽현의 안색도 어둡게 내려앉았다.
바로 이때, 큰 폭음이 일어나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검광이 일순 소멸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온 그림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