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17
1117화 오유겁의 이유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라였다.
미친 듯 밀려나는 아라의 앞쪽에는 무수히 많은 권인(拳印)이 날아들었다. 매 권인이 폭발을 일으킬 때마다 아라는 수십 장씩 밀려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신형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마침내 자리에 멈춰 선 아라.
그녀가 검을 세워 든 이때, 또 하나의 권인이 검신을 강하게 때렸다.
쾅-!
아라는 속절없이 수십 장을 밀려났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에 멈추기 무섭게 또 다시 권인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이를 보자 아라는 주저하지 않고 검끝을 돌려 자신의 목을 길게 그었다.
푸확-!
찰나의 순간, 그녀 앞의 공간이 쭉 갈라지면서 날아오던 권인들이 차례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갈라지던 공간은 대략 삼천 장에 이르자 멈췄는데, 이 갈라진 공간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흑의인이었다.
이때 흑의인은 미간 사이에 날카로운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비록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처에서 나온 선혈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자 상계에서 온 노인의 표정이 일순 어둡게 변해다.
흑의인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은 것은 그로서는 매우 낯선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때 미간을 더듬어 피를 확인한 흑의인이 웃으며 아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것은 훌륭했다.”
이에 아라는 아무 대꾸도 없이 흑의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 없다. 어차피 열흘을 겨룬다 해도 승부를 볼 순 없을 테니.”
흑의인의 말에 아라가 자리에 멈춰 서며 대꾸했다.
“그럼, 사람을 더 데리고 오든가.”
“하하, 그야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늘 내가 방문한 주된 목적은 네 실력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너!”
흑의인이 엽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엽현, 서옥은 네게 있어 봐야 진정한 값어치를 발휘할 수 없다. 만약 우리에게 넘긴다면 상계의 어떤 보물이라도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겠다.”
이에 엽현이 천주검을 꺼내 들었다.
“상계에 이거보다 더 좋은 검이 있나?”
천주검을 한 번 쳐다본 흑의인이 고개를 저었다.
엽현은 이번에는 진혼검과 태극순을 꺼냈다.
“그럼 얘들은?”
흑의인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엽현이 꺼낸 것은 계옥탑이었다.
“이건 어때? 너희에게 이거보다 좋은 거 있나?”
“엽현… 지금 네게 신물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하하, 서옥과 보물을 교환하자고 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가진 것들이 너희가 제안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데 왜 응해야 하지? 혹시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흥,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좋다, 조만간 다시 보자꾸나!”
말을 마치자, 흑의인과 노인의 모습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를 본 엽현이 소도에게 말했다.
“저들을 붙잡아 둘 수 있겠소?”
“불가능하다.”
소도가 대답했을 땐 남자는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엽현은 하늘을 바라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상계.
지금 엽현은 저들에게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할 뿐, 어떤 반격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분명 잘 된 것이었다.
“소도 낭자, 어떻게 하면 상계로 갈 수 있소?”
“음? 상계로 갈 생각이더냐?”
“그렇소.”
소도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되지 않았다. 상계로 가기엔 네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엽현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이때, 천도가 두 사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등장에 장내 무인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이때, 천도가 웃으며 엽현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지금 가겠느냐?”
“어딜… 말이오?”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묻자 천도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보면 안다. 네가 가면 좋은 곳이다.”
“좋은 곳이라고 해놓고 날 골탕 먹이려는 것 아니오?”
“음… 어쩌면 그럴지도?”
“…….”
“하지만 분명히 네게는 기회일 수 있다.”
“무슨 기회 말이오?”
“그건 일단 묻지 말고… 갈 테냐, 말 테냐?”
잠시 고민 끝에 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가겠소!”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상계에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엽현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하하, 잘 생각했다. 말 나온 김에 당장 가자꾸나.”
말을 마친 천도는 곧장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때 소도가 천도의 앞을 막아섰다.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이에 천도가 웃으며 말했다.
“소도, 너는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빨리 원래 실력을 되찾지 않으면 저들은 물론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때 둘 사이에 끼어든 엽현이 소도에게 불쑥 한 다발의 자기를 내밀었다.
“소도 낭자, 이걸로 먼저 회복부터 하고 계시오. 만약 무슨 흉계를 꾸몄다면 이렇게 대놓고 나서지는 못할 것이오.”
“흠….”
소도는 천도를 힐끔 쳐다보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엽현의 말대로 천도는 지금 당장 엽현을 해할 수 없다. 그가 없다면 그녀 혼자 상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엽현을 죽여 봐야 그녀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도가 자기를 받아들자, 천도와 엽현은 순식간에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이때 말없이 서 있던 아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이 곳은 시시해졌군.”
“…….”
이 말에 소도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아라가 상계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필경, 새로운 경지를 돌파한 아라에게있어 이 오유계는 그저 작은 우물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 * *
여유 있게 걸음을 옮긴 천도와 엽현은 이내 어느 성공 한복판에 도착했다.
“자, 주위를 둘러보거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을 내뱉는 천도.
이를 본 엽현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고작 경치나 구경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후… 우주가 막 탄생했을 땐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아쉽게도 너는 볼 수가 없구나.”
“천도, 이 우주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거요?”
엽현이 갑자기 질문을 던지자 천도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도 그런 질문밖에 하지 못하는 게냐?”
“설마 모르는 거요?”
엽현의 말에 천도가 고개를 저었다.
“우주의 기원, 그것은 우리 같은 미물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럼 생명의 기원은 어떻소? 이 세상에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이오? 그들은 또 스스로 생겨난 것이오,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오? 그리고 또… 아참, 그리고 이건 또……”
“…….”
말없이 엽현을 바라보는 천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천도의 안색이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천도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본 엽현은 아차 싶은 마음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헤헤, 미안하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소.”
“…정말이냐?”
“정말이오!”
천도의 말에 엽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저 주먹이 입으로 날아올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낀 엽현이었다.
이에 천도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조금 전 했던 질문들은 사실 나도 알고 싶은 것들이다.”
“음?”
엽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대는 천도지 않소? 그런 그대도 모르는 것이 있단 말이오?”
“하하, 나라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니다.”
천도는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시선은 곧 끝없이 펼쳐진 우주로 향했다.
“이 우주는 내가 이곳에 있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천도는 손을 들어 성공을 빼곡하게 수놓는 별들을 가리켰다.
“보거라. 이 무수한 별들은 우주의 법칙 안에서 스스로 돌고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생명체들 역시 일정한 법칙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순환하고, 생명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것…….”
천도가 엽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혹자는 말하길, 이 모든 것이 도(道)라고 하더군. 허면 이 도라는 건 또 뭘까?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일까? 아니면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걸까? 만약 스스로 존재한 것이라면, 우주 역시 자연으로부터 생성된 것일까? 이 우주의 첫 번째 생명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존재는 또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엽현은 침묵했고 천도는 말을 이어갔다.
“대의, 인과, 명운… 이것들은 또 누가 꺼내 놓은 것인가? 명운, 다시 말해 생로병사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인간은 물론, 설령 이 우주라 하더라도 언젠가 끝나게 돼 있지 않던가. 아직도 많은 자들이 역천개명(逆天改命)을 외치건만, 고금을 통틀어 생사를 거스른 자가 누가 있단 말이냐.”
천도가 엽현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주의 생령들은 제각기 주어진 명운이 있다. 도대체 뭐가 역천개명이란 말인가… 설령 명운을 거슬렀다 해도, 이것조차 명운이 아니던가?”
“천녀… 소복의 여인의 명운은 어떻소?”
엽현이 문득 질문을 던지자 천도는 침묵했다.
“시비 걸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오.”
“그녀는… 이미 너무 멀리 걸어갔다.”
“음?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다. 그녀는 이미 대도(大道)에서 한참 벗어난 상태다.”
대도에서 벗어나?
순간 엽현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치듯 떠올랐다.
“혹시 둔일(遁一)을 말하는 것이오?”
천도가 엽현의 눈을 응시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이 세계의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둔일이다. 둔일, 말 그대로 대도에서 벗어나 일체의 운명 혹은 인과에 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둔일이란 이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인 셈이지. 허나 그녀는 너 때문에 다시 이쪽 세상의 일에 뛰어들었다. 자유인인 그녀가 아직 우주의 법칙 안에 갇혀 있는 우리를 상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지. 마치 대학자가 일개 서당에 속한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처럼 말이야.”
“…….”
“그러나 그녀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너와 관련된 골칫거리가 있거든.”
“음… 언젠가 소도 낭자가 말 한 적이 있소. 아마 그녀의 골칫거리는 내 몸에 붙어 있는 인과가 아니겠소?”
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너의 그 거대한 인과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다.”
“…천도,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오?”
엽현이 의아한 듯 묻자 천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는 없다. 그냥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뿐이다.”
엽현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대의 목적은 이 우주를 보호하는 것이오. 내 말이 맞소?”
“그렇다. 생령들이 저지른 잘못을 우주가 부담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오유겁은 그대와는 상관없는 것이오?”
엽현의 말에 천도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네가 크게 오해하고 있구나. 내겐 아직 오유겁 같은 걸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거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과 다른 종족들의 행위가 정말 멸망 당하기 마땅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소.”
“하지만 이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든 종족들 중, 인간의 탐욕이 가장 강하다. 너희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이러한 탐욕은 우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매우 위협적인 것이다. 오유겁은 결국 이 우주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자정작용인 것이다.”
“…….”
천도는 고개를 들어 엽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