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66
1166화 갈 수 없소
짐!
엽현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등에 가장 많은 짐을 올려놓은 이는 다름 아닌 선각자라는 사실을!
일면식도 없는 자를 위해 이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때 엽현 앞에 있던 큰언니가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럼 서옥을 버리던가.”
버려?
엽현은 양손에 쥔 서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음만 같아선 정말로 버리던가, 누구한테 줘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옥을 손에 넣고서 도움을 받기는커녕 언제나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엽현이 그럼에도 서옥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오유겁이 다가오기 때문.
만약 서옥을 누구에게 줘 버린다면 곧 있을 오유겁은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지금의 그는 서옥을 버리기는커녕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할 입장이었다.
이때, 문득 엽현의 시선에 눈앞에 놓인 기이한 척이 들어왔다.
엽령의 몸속에 있는 신비한 여인.
비단 그녀뿐 아니라, 말총머리 여인까지 자신이 매우 약하다고 했다.
말총머리 여인 쪽이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의견은 일치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해야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느냔 것이었다.
지금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인데, 이것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단 말인가?
엽현은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따라 엽현의 마음도 이리저리 표류하기 시작한다.
이때, 문득 천녀가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천녀는 그가 아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다.
오직 엽현이라는 남자를 위해서!
순간 엽현은 가슴이 아려왔다.
천녀는 자신을 대신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움을 해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녀가 영원히 그렇게 싸워줄 수 있을까?
물론 천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총머리 여인의 말대로 자신에게 붙어 있는 미지의 인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하….”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그 여인이 엽령을 끌고 가는 상황에서 얼마나 무기력했던가!
만약 그 여인이 영역처럼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자였더라면?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했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무기력함이라 했다.
엽현은 더 이상 이런 절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시련과 노력을 통해 지금의 경지까지 이르긴 했지만, 적은 더욱 더 강해지고 많아졌다.
특히나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인과의 존재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사람이 노력만 하면 하늘도 견딜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에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현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엽현은 이번에는 선각자를 떠올렸다.
선각자!
그가 계옥탑을 얻은 것은 하늘이 내려 준 기연이었지만, 동시에 모든 화근의 시작이기도 했다.
사유계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있기까지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은 이 계옥탑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선각자야말로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장본인이었다.
엽현은 아직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선각자의 전승자라는 신분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리라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
천녀는 먼 곳에 있고, 말총머리 여인의 분신은 소멸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
이때 뭔가 생각난 엽현이 큰언니를 불러냈다.
“도칙이 다 모이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오?”
큰언니가 엽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유계에서는 무적이라 봐도 무방하다.”
오유계 무적!
“그… 과장이 섞인 건 아니고?”
이 반응에 큰언니가 엽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선생의 실력은 탑의 세 검주만큼은 아니셨다. 하지만 계옥탑과 우리 아홉 도칙들은 그 세 사람과 싸워 살아남았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계옥탑이 천녀등 세 사람과 싸운 적이 있었다는 걸!
물론 결과적으로 상대가 되진 않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검수들과 감히 맞섰다는 것만으로도 계옥탑의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과 정면으로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이 오유계에서 계옥탑이 유일하리라!
“내 이미 다른 세 개의 도칙에게 연락을 취해 놓았다. 얼마 후 그들이 돌아오고 모든 도칙이 모이게 되면 너는 아마 놀라 자빠질 것이다.”
“하하, 그러길 바라겠소!”
“물론이지!”
큰언니가 잠시 엽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현재 너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지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만약 빠르게 경지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설령 도칙들이 전부 모이더라도,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경지!
그 말에 수긍한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소.”
엽현의 현재 경지는 윤회경.
비록 검역의 힘을 빌려서 파허경 강자의 파허(破虛)를 펼칠 순 있지만, 이는 하나의 지름길을 밟은 것에 불과했다.
즉, 진정한 파허경에는 한참 멀었다는 것.
게다가 현재 엽현에게는 경지를 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걸음을 옮긴 엽현은 곧장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는 노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필창!
그는 말총머리 여인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엽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필창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엽 공자.”
이에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예 차릴 건 없소. 앞으로도 엽현이라 불러 주시오.”
이 말에 필창이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역의 상황부터 말해 보시오.”
“오늘 이후로 영역은 함부로 그대를 노리지 못할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난밤에 그런 큰 타격을 입고도 다시 덤빈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일 테니까. 더불어 엽현 뒤에 말총머리 여인이 있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애당초 거병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필창은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다.
“참, 엽 공자. 우리 성당의 무인들을 이쪽으로 데려와도 되겠소?”
“음? 영역에 남아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필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영역의 영기는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드러낸 상태로, 무인이 머물기에 적합하지 않소. 이 때문에 우리는 그대의 서옥을 노렸던 것이오. 서옥을 차지해 육유계를 침공할 생각으로…”
“흥!”
바로 이때, 어디선가 차가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진봉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육유계를 침공한다고? 너희 영역은 아직 주제를 잘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모르는 소리! 만약 우주장벽만 아니었더라면 영역은 벌써 육유계를 점령하고도 남았다!”
“하하하! 우습군. 만약 너희가 육유계로 가면 그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란 걸 모르는 건가?”
“끙…….”
필창은 뭔가 더 할 말이 남아있었지만, 엽현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입을 닫았다.
이때 엽현이 이진봉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도와 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리오.”
“하하, 엽 공자, 겸손하시구려. 우리가 없었다 해도 그대의 능력이라면 너끈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소.”
사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영역과의 전투는 자신들이 결정지었다기보다는 엽현의 배후들의 등장으로 정리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엽현의 진짜 배후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천녀!
만약 등장한 것이 그 소복을 입은 여인이었더라면 영역은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소복의 여인 대신 창을 든 여인이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말총머리 여인의 능력만으로도 영역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관건은 엽현의 실력이 아닌 그의 배후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린 게 아닐까?
그나저나 이런 엽현을 죽이고 서옥을 빼앗으려 했던 연합전은 도대체.
문득 이 생각이 들자, 이진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참, 그나저나 그대들은 어찌하여 우리를 돕게 된 것이오? 따로 명령을 내린 사람이 있던 것이오?”
엽현의 질문에 이진봉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구체적인 것은 나도 잘 알지 못하오.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밖에.”
“상부라면… 문전주?”
이진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니, 그 사람이 왜 나를 도우려 했단 말이오?”
한쪽에 있던 필창도 이진봉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육유계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엽현을 돕기 위해 영역의 옆구리를 친다?
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이에 이진봉이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 소복의 여인과 관련 있는 것 같소.”
천녀!
그녀의 이름을 듣자 엽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엽 공자. 이제 곳 오유겁이 닥칠 것인데, 우리와 함께 육유계로 건너가는 것이 어떻겠소? 문전주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말이오.”
육유계로부터의 초대.
필창이 고개를 돌려 엽현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엽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이 장면에서 가장 마음이 동한 것은 다름 아닌 필창이었다.
정말로 육유계로 갈 수 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조만간 닥칠 오유겁은 오유계는 물론 상계와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물론 필창 자신은 강한 실력 덕에 어찌어찌 살아날 순 있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유겁이 휩쓸고 간 뒤의 우주는 일정 기간 동안 영기가 희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기가 없으면 무인들은 당연히 수련을 할 수 없다.
때문에 필창 같은 고수들에게도 육유계로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이다.
문제는 육유계가 결코 그들에게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지금 엽현에겐 그가 바라마지 않는 육유계로의 통행권이 주어진 상황.
필창은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목숨을 걸어도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육유계를 엽현은 너무나 간단히 입장할 수 있지 않은가!
다른 것도 아닌 든든한 배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창이 속으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이때, 엽현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안은 고맙지만 가지 않겠소.”
“하, 하지만 엽 공자. 그렇다고 여기에 남아있으면 곧 오유겁을 맞게 될 것이오!”
“하하, 내 친구들이 모두 여기 있는데 나만 쏙 빠져나가서야 되겠소?”
“아….”
이진봉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으나, 이내 한숨을 쉬며 침묵했다.
사실 엽현이 육유계로 오는 것은 연합전으로서는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가 있으므로 해서 연합전은 든든한 동맹을 확보하는 셈이니까.
이런 점에서 엽현이 오유계로 남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렇다고 육유계가 엽현과 관련된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육유계의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엔 영역과 마찬가지로 오유겁을 맞게 되는 사태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엽현, 육유계가 보내준 온정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엽현이 웃으며 말하자 이진봉이 어쩔 수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리지만, 의리를 중요시하는 그대의 성품에 탄복할 수밖에 없구려. 그렇다 하더라도 혹시나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오. 곧장 사람을 내려보낼 테니까.”
“연락? 어떻게 말이오?”
“간단하오. 오유계 천도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오.”
천도!
순간 엽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혹시 이번에 육유계가 원군을 보내준 것도 그녀와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엽 공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구려. 기회가 된다면 조만간 다시 만납시다.”
이에 엽현이 빠르게 생각을 접고서 포권을 취했다.
“살펴 가시오!”
“하하, 엽 공자도 보중하시오!”
말을 마친 이진봉은 어느새 뒤편에 도열해 있던 육유계 강자들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것은 엽현과 필창.
이때 필창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엽 공자, 사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육유계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오.”
“음?”
엽현이 필창을 돌아보자, 필창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육유계를 점령하기만 하면 모두가 오유겁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은?”
“에… 그 다음은…”
필창이 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엽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우리가 그곳을 점령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소.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육유계도 오유겁을 맞게 될 테니까.”
엽현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바깥쪽 하늘을 둘러보았다.
“결국 이 우주를 바꿔야만 한다면, 내가 선봉에 설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