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71
1171화 정체가 뭐냐
아주는 매우 익숙한 듯 엽현을 이끌고 적선도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이동하던 중 엽현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조각상.
남자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은 하얀 장포를 입고,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엽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각상은 다름 아닌 탑의 검주들 중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탑의 검주가 왜 여기에!?’
“저 사람은?”
엽현이 아주를 쳐다보며 묻자 아주가 조각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리 적선도의 조사님이시다.”
적선도의 조사!
“왜? 우리 조사님을 네가 알기라도 하는 것이냐?”
“사실… 아는 걸 넘어서서 전승을 이어받기까지 했소.”
“푸흡-!”
아주가 들이켜던 술을 엽현의 얼굴에 토해냈다.
“뭐라고! 네가 조사의 전승자라고!? 증거있느냐!?”
엽현이 소매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겠소.”
말을 마친 엽현이 손을 뻗자, 그의 손안에 탑의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아주가 조사라 부른 남자의 검이었다.
이 검을 본 순간, 아주의 안색이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자, 이 정도면 믿겠소?”
“이, 이 검… 어디서 얻은 것이냐?”
“사부가 물려주신 것이오!”
엽현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외치자 아주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목이 탔는지 호리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주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어린 녀석이 조사의 검을 갖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조사의 전승자라면 자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때 엽현이 웃으며 말했다.
“굳이 배분을 논하자면 사저(師姐)라 불러야 하겠군요.”
사저!
사실 조사의 적전 제자라면 이미 엽현의 배분은 아주보다 훨씬 높아야 정상이었다. 엽현이 아주를 두고 사제라 부른 것은 어느 정도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이었다.
“그, 그래… 그렇게 되겠구나. 마음대로 부르도록 하거라!”
이에 엽현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아주 사저, 엽현이 인사 올립니다.”
“크흠, 고개를 들거라. 그런데 조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그것이… 우연히 사부의 분신을 마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기개와 자질을 높이 평가한 사부께서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게… 전부?”
아주가 엽현을 위아래로 훑으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전부입니다.”
아주는 다시 엽현이 들고 있는 검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일단 한잔하고 다시 보자!”
아주는 어디선가 새 호리병을 꺼내 거칠게 들이키기 시작했다.
“…….”
그렇게 엽현을 핑계로 다섯 통째가 비워 졌을 때, 아주가 조사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탄식을 뱉어냈다.
“적선도에는 오직 두 사람 밖에 존재할 수 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다니요?”
엽현이 묻자 아주가 엽현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둘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 그러니까 왜 둘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한 사람 더 있는다 해서 섬이 가라앉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 그렇긴 한데, 이 섬에 두 사람보다 많은 인원이 있었던 적은 없으니까…”
“아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래서 지금 저더러 나가라는 말입니까? 예?”
“그런 게 아니라…”
이때 엽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조각상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고 사부, 어쩌면 좋습니까? 영역에게서 살아남고 육유계에게도 쫓겨 다니는 와중에 겨우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았나 싶었는데, 믿었던 사저라는 양반이 절 쫓아내려 합니다! 저는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아이고오-!”
“이 놈아! 그만하지 못할까! 내가 언제 쫓아냈다고 그러느냐!”
아주가 재빨리 엽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 적선도의 최대 인원은 언제나 두 명뿐…”
“아이고 내 팔자야, 박복하기도 해라! 뿌에에엥-!”
“…….”
잠시 엽현이 대성통곡하는 것을 멍하니 보던 아주는 다시 술 한 통을 비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 아주 독한 놈이 들어왔어. 술보다도 더 독한 놈이!”
“끄아아앙-!”
“에라이 이놈아! 뚝 그치지 못할까! 남고 싶으면 남던지 네 맘대로 하거라!”
“으헝… 정말입니까 사저?”
“그래! 뚝!”
“뚝!”
우는 척(?)을 그친 엽현은 이내 아주를 보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
“헤헤, 그런데 사저. 여기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참! 네 놈이 질질 짜는 통에 깜빡 잊을 뻔 했구나. 따라 오너라!”
아주가 발길을 옮기자, 엽현이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잠시 후.
아주와 엽현이 도착한 곳은 어느 대나무집 앞이었다. 이곳에서 엽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마당에 너부러져 있는 수많은 죽검(竹劍)들이었다.
아주가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엽현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뜻밖에 온몸이 눈처럼 하얀 존재가 누워 있었는데, 마치 토끼를 닮은 이 존재는 병을 앓고 있는지 기운이 매우 쇠약한 상태였다.
이때 아주가 다가가 손을 펼치자, 하얀 존재의 얼굴 위로 무수히 많은 자기들이 쏟아졌다.
잠시 후, 하얀 존재가 몸을 힘겹게 눈을 뜨고서 아주를 바라보았다.
“흡수해.”
아주의 말에 하얀 존재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는 주변에 가득한 자기를 코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사저, 이것은 영(靈)입니까?”
사저!
순간 아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일인전승을 이어 온 그녀에게 사저라는 호칭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영맥이다. 적선도의 영맥.”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쇠약해진 것입니까?”
아주가 머리에 손을 짚으며 대답했다.
“말도 말거라. 소성과 몇몇 멍청이들이 영역의 본령을 흡수하는 바람에 다른 영맥들이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이곳의 영기는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고, 보다시피 이 녀석도 시들시들한 상태지.”
“아….”
엽현은 힘겨워 보이는 적선도의 영을 보며 천도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찬가지로 오유계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적선도의 영은 아주가 건넨 자기들을 전부 흡수했다. 그 덕분인지 안색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엽현은 큰 눈망울을 글썽이며 아주를 바라보는 영이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이때 엽현이 영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적선도의 영이 화들짝 놀라며 벽으로 바짝 붙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적선도의 영.
이때 엽현이 손을 펼치자, 허공에 한 다발의 자기가 떠올랐다. 정순한 자기를 본 순간 영의 눈이 반짝였지만,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고 엽현의 눈치만 볼뿐이었다.
이에 엽현이 자기를 앞으로 밀어 넣고 한 걸음 물러났다. 적선도의 영은 그제야 눈앞의 자기를 미친 듯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엽현이 아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저, 당시에 왜 소성 등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사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그때 폐관 중이었다. 폐관이 끝나고 나오니 다들 죽어 있었고.”
“아….”
“듣자 하니 놈들은 널 찾아갔다가 되려 네게 당했다더구나. 사실이냐?”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흠… 그래? 그나저나 네 몸에 붙어있는 인과는 보통이 아니구나. 인생이 매우 고달프겠어.”
이에 엽현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아주를 쳐다보았다.
“사저의 눈에 제 인과가 보이는 것입니까?”
“물론!”
엽현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신비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육유계는 왜 또 널 죽이려 드는 것이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느냐?”
아주의 질문에 엽현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아마 만유서옥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만유서옥?”
“그렇습니다. 영역 역시 제게서 서옥을 강탈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서옥… 한 번 볼 수 있겠느냐?”
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옥을 꺼내 들었다.
엽현 손 위에 서옥을 본 순간, 아주의 표정에 기이한 기류가 흘렀다.
“왜 그러십니까?”
“호…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구나. 잘 간직하고 있거라.”
“하지만 육유계가 또 덤벼들 것입니다.”
“죽여.”
“…….”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적선도의 영은 또 다시 자기를 모두 해치운 상태였다.
이어 엽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미 경계심은 온데간데없고 호감을 띠고 있었다.
이를 보자 엽현이 씩 웃으며 다시 백 개의 자기를 영에게 건넸다.
영은 이번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엽현의 손에서 직접 자기를 낚아채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기를 흡수할수록 영의 기운은 점점 더 강해져갔다.
엽현은 다시 아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저, 일전에 저를 죽여 달라고 사주한 육유계의 무인이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음… 잠깐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가서 둘러보고 오마.”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사라진 아주.
엽현은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검광을 응시하며 다소 심란해졌다.
도대체 어떤 세력이 서옥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후… 육유계.”
한숨을 푹 내쉰 엽현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자기를 깨끗이 흡수한 영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더 줄까?”
영이 어미새에게 먹이를 구걸하는 새끼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쩌지? 이제 없는데?”
엽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적선도의 영이 마치 애원하듯 엽현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소령이 적선도의 영을 세차게 밀쳤다. 밀려 넘어진 영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소령은 양손을 허리에 짚더니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야! 너 뭐야!”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엽현을 찾는 적선도의 영.
하지만 소령은 엽현 앞을 가로막으며 그 시선을 원천 차단했다.
“자기가 그렇게 필요해?”
적선도의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자기가 무슨 배 채우려고 있는 건지 알아! 그렇게 주는 대로 날름날름 다 먹어버리면 어떡해!”
순간 엽현은 소령이 이렇게 화내는 것이 자기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사실 엽현이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요구한다 싶었다.
하지만 적선도의 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억울한 표정이었다.
이에 소령이 영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자기를 먹는 건 좋아! 하지만 그만큼 노동을 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적선도의 영이 채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소령이 그의 손을 잡고서 계옥탑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엽현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자기네 식구도 아닌데 이렇게 맘대로 데려가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엽현은 골치 아픈 생각은 접어두고서 자리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검념!
현재 그가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검념을 깨닫고 자신의 검도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 *
영역 외곽의 어느 성공.
고요하던 이곳에 한 줄기 검광이 번쩍이더니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아주가 주변을 둘러보던 이때, 그녀의 정면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참, 안타까운 선택을 하셨소.”
상대가 쉰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아주가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너희는 누구지?”
“…도대체 무엇이 그대를 돌아서게 한 것이오?”
“뭐긴 뭐야, 돈이지.”
퉁명스러운 대답에 움찔한 그림자.
바로 이때, 아주의 검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