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84
1184화 일보, 일검, 일사
별빛이 쏟아지는 어느 성공 한복판.
사람이 개미로도 보이지 않을 까마득한 이곳에 여인 하나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하얀 소복을 휘날리며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여인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그 걸음걸이가 꽤나 여유로웠다.
이때,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는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엽현의 모습을 똑 닮아 있었다.
인형을 들여다보며 춘풍 같은 미소를 짓는 여인.
이때, 여인이 문득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점점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한기가 맺힌다.
“내가 이렇게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는데 누가 감히 너를 해치겠느냐?”
여인은 아주 오래전, 자신의 오라비가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게 힘이 있다면 모든 힘없는 생명들을 지켜주고 싶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오라비의 염원을 대신 이루었다.
마치 정승처럼 꼼짝 않고서 이 우주를 지켜 내었던 것이다.
그것도 수만 년 동안이나!
현재 그녀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의 오라비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 그녀의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검도?
이미 더 갈 곳이 없다.
영생?
원하기만 하면 죽지 않는다.
만약 그녀가 죽는 날이 온다면 그건 스스로가 원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때, 저 멀리 성공 한복판의 공간이 물결치더니, 이내 세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도가에서 보낸 신비인과 흑백이사(黑白二使)!
모두 둔일경의 강자들이었다!
이들의 등장에 여인은 나무 인형을 집어넣고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나 묻는다. 누가 너희를 보냈지?”
여인의 질문에 가운데 서 있던 신비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오유계 천도의 말에 따르면 그대는 엽현의 동생이라는데… 사실인가?”
오유계 천도!?
여인이 고개를 돌려 한쪽 방향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때 멀리 떨어져 있는 성역에서 생선을 굽고 있던 천도가 화들짝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정말이오!”
말을 하는 사이, 천도는 이미 오유계의 영역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대가 결코 엽현이 있는 곳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것이다.
소복의 여인에게 살심이 동했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은 단연 엽현이 있는 오유계였다.
과연 여인은 천도를 노려보기만 할 뿐 출수하지 못했다.
자신이 검을 뽑으면 엽현은 물론 그가 사랑하는 친구들까지 사라져 버리리라.
물론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엽현의 안위뿐이었다.
다만 친구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엽현은 틀림없이 슬퍼할 테고, 이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여인은 눈빛을 거두었다.
이 순간, 오유계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천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휴… 정말이지 무시무시하구나. 자칫했으면 품위고 모고 지려버릴 뻔했어! 그나저나 정말로 찾아간 마도가도 어떤 의미로 굉장한 녀석들이로군!”
천도는 마도가가 있는 허공을 향해 엄치를 척 내밀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천녀가 위치한 성공.
그녀와 눈을 마주친 신비인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 마도가는 그대를 손님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따라올 의향이 있는가?”
“…가지.”
여인의 답변에 신비인은 흠칫 놀랐다.
이렇게 쉽게 승낙을 한다고? 저항도 하지 않고?
빠르게 머리를 굴린 신비인은 이내 여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여인은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둔일경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투항해 버린 것이다.
“후후, 그럼 바로 안내하지. 마도가로!”
말을 마친 신비인은 다른 두 무인과 함께 앞장서서 어디론가로 향했다.
여인은 말없이 이들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마도가로 가는 길.
신비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여인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때의 여인의 얼굴에는 긴장감은커녕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에 신비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왜 우리가 그대를 초대하는 건지 물어보지도 않는 건가?”
“…….”
감정 없는 눈으로 신비인을 바라보는 여인. 그녀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이때 신비인이 곁에 있는 두 무인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두 분께서는 저 여자의 경지가 느껴지십니까?]잠시 후, 백의를 입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에게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모종의 비술로 경지를 감추고 있는 것 같군.]이 말에 신비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둔일경인 세 사람이 상대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면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첫째는 백의 노인의 말대로 비술을 사용해 기운을 감췄을 경우. 둘째는 여인의 경지가 자신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경우.
물론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두 번째 가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둔일경 이후의 경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역대 최강의 무인이었던 엽란정이 아직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는 불가능했다.
왜?
둔일경 이후로는 길이 없으니까!
자신들이 아는 한 무도의 끝은 바로 둔일경이니까!
이때 백의 노인, 백사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저 계집,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이에 흑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맞아. 둔일경 셋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당당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래봤자 뭐? 우리가 겁먹을 필요 있나?]자신들이 혼자인 여인을 상대로 겁을 먹어야 한다?
백사와 신비인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둔일경 내에도 강과 약이 존재하는 만큼 일대 삼을 감당할 만한 무인은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즉, 눈앞의 여인을 상대로 자신들 셋이 지는 그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이때 신비인이 문득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때 여인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평온했다.
“훗, 보기보다 슬기로운 여자로군.”
신비인의 말뜻은 간단했다. 상대가 주제를 알고서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을 두고 기특하게 여긴 것이었다.
이때에도 여인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드러나지 않았다.
얼마 후.
세 사람과 여인은 어느 거대한 전각 앞에 도착했다.
마도대전!
도계에서 마도가의 지위는 비록 최고는 아니지만 일류에는 속하는 만큼 그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마도가가 제족과의 혼인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왜냐하면, 제족은 도계 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대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제족과의 혼인이 성사된다면 마도가의 지위는 일류를 넘어 최고의 반열에 들게 될 것이기에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인 것이다.
네 사람은 멈추지 않고 곧장 마도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대전 중앙에는 마원 한 사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여인을 응시하던 마원이 나머지 세 사람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너희들은 나가 보거라.”
세 사람은 곧장 대전을 빠져나갔고, 이와 함께 대전 문도 굳게 닫혔다.
장내에 남은 것은 오직 마원과 소복을 입은 여인.
이때 마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듣자 하니 그대의 오라비와 우리 마도가의 첫째가 이미 혼인 한 사이라더군. 게다가 오유계 천도의 말에 따르면 이 결혼에 불만이 있다면 곧장 그대를 찾아와 따지라고 했다던데…. 자,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그대는 엽현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왔고, 나는 그들의 결혼에 불만이 있소. 어디, 해명할 것이 있으면 해 보시오.”
“…내게서 해명을 바라는 건가?”
“그렇소!”
마원이 웃으며 대답한 이때, 여인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순간, 한 줄기 검광이 마원의 눈앞에서 번뜩였다.
이를 보자 마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검광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져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검이지?
어쨌든 간에 일단 막고 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마원은 깨달았다. 검이 이미 자신의 미간을 관통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마원.
그리고 불신이 가득 한 눈동자.
어떻게 된 거지?
왜 막을 수 없던 거지?
순간 여인을 향한 마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
“이게 나의 해명이다. 더 할 말은 없다.”
일보(一步), 일검(一劍), 일사(一死).
이때의 마원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아니, 이 감정은 공포에 더 가까웠다.
위풍당당한 둔일경 절정의 고수인 그를 단 일초(一招)만에 죽일 수 있는 자가 도계에 존재하던가?
아니, 단언컨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이 거짓말 같은 일을 해냈다.
그것도 자신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과연 이 여자의 경지는 무엇일까?
마원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이 꿈에도 염원하던 둔일경 이후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이를 깨달은 순간 마원은 곧바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세상에 둔일경을 뛰어넘은 무인이라니.
하지만 이 여인은 하계에서 올라온 자가 아닌가?
하계의 존재가 어떻게 그런 지고지상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도경!?
순간 죽어가던 마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그렇군! 도경을 손에 넣은 것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둔일을 뛰어넘을 수 있던 것이었어!”
이에 여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원은 자신의 생각에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맞아… 도경… 결국 도경이었어… 도경에 답이 있던 것이었어… 하하하…….”
여인은 실성한 듯이 웃는 마원을 뒤로 한 채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마원이 그녀를 향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말 해! 제발 말 해줘! 내 말이 맞지? 도경을 보고서 둔일을 뛰어넘은 거지!?”
이때 여인인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네가 틀렸다.”
“으아아악-! 거짓말! 거짓말이야! 도경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둔일을 넘어설 수 있단 말이냐! 그건 절대 불가능이다!”
“…멍청하긴.”
말을 마친 여인은 다시 대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원은 그녀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흑백이사와 신비인이 나타나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때 마원의 모습을 본 세 사람은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가주가 죽어가는 거지!?
“비켜! 비켜서라! 그녀가 떠나도록 내버려 둬!”
마지막 생명력을 쥐어짜내 소리치는 마원.
세 사람이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이때,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지.”
마원이 막 소리치려는 이때, 여인이 마원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기껏 초대해 줬는데 금방 가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을 마친 이때, 여인이 가볍게 손으로 허공에 일획을 그었다.
순간 신비인 등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드는 검광.
이를 본 세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도 황급히 손을 들어 방어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었을 뿐, 실제로 세 사람의 머리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초살!
둔일경 셋이 꼼짝도 못 하고 동시에 죽었다!
이 장면을 보자 마원은 머릿속에 더 이상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동시에 처음 느껴보는 두려운 감정이 몸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 마원도 여기서 끝인가?
마원이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보았다.
“제발… 부탁이다. 제발 여기까지만…”
하지만 매정하게 고개를 젓는 여인.
“가지 않는다. 업보라 생각하거라.”
“이익-!”
여인이 떠나길 거부하자 마원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정 그렇다면 끝까지 가 보자! 선조를 모십니다!”
선조!?
쾅-!
마원의 외침이 흘러나온 순간, 강대한 기운이 마도대전 전체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