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98
1198화 조건이 있소
잠자코 천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엽현.
천도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소복의 여인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녀는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죽이기 싫으면 살려둔다. 자, 그녀는 살인자인가 아니면 자비로운 사람인가? 그녀의 원칙은 뭐지? 본심은 뭘까?”
“…….”
“훗날 알게 되겠지만, 마음의 자유는 검념의 상위 개념이다.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나야 검도 역시 자유를 얻는 것이지.”
“천도,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소.”
엽현의 말에 천도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 말 해 보거라.”
“내 생각에 사람은 선과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없으면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소?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상관없소. 어쨌든 나는 내 방식이 있으니 말이오. 날 귀찮게 하지 않으면 나도 상대를 귀찮게 하지 않고, 누구든 날 건드리면 철저하게 복수한다. 이게 바로 나의 방식이오.”
엽현이 곁에 있는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의미로, 이 여인이 나의 적이었더라면 주저하지 않고 죽였을 것이오. 하지만 짐승처럼 몸을 범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이때 소유가 천도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막념, 내 생각에도 저 아이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이에 막념이 엽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계속해 보거라.”
“그대가 말하길 약자는 선을 지키고 자비를 베풀 자격이 없다고 했소. 하지만 약할 때부터 무자비했던 자가 강해져서 자비롭게 변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대의 이론에 따르면 강자인 그대는 절대 나에게 손찌검해선 안 되는 것이지 않소?”
“음….”
천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엽현이 말을 이어갔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만약 그대와 음양합일을 하게 되면 매우 큰 효과를 얻을 것 같소. 만약 그대가 약해졌을 때, 내가 그대를 범하고자 한다면 그대 무슨 생각을 하겠소?”
이 말에 천도가 눈을 깜빡였다.
“오… 나랑 하고 싶었던 거구나. 진작 말을 하지.”
“아니!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요! 비유하자면!”
당황해하는 엽현을 바라보며 천도가 가볍게 귀밑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실 내게도 모순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나는 네가 조금 더 모질어지는 한편, 그렇다고 너무 나쁜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네 말대로 원칙도 없이 여기저기 싸질러 제끼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느냐?”
“처, 천도. 말이 너무 험한 것…”
“아아, 실수. 아무튼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건 참 어렵단 말이지….”
이에 엽현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건 생각보다 간단 한 일일 수 있소.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잘 해주고, 적에게는 잔인해 지면 되는 일 아니오?”
“…….”
한동안 말없이 엽현을 응시하던 천도가 마침내 미소를 보였다.
“그 말도 맞구나.”
이때 천도가 손가락으로 엽현 곁에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인의 무공 수위가 순식간에 봉인됐다.
“저 여자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풀어주면 매우 골치 아파질 거란 걸 기억 하거라.”
말을 마친 천도는 엽현에게 계옥탑을 돌려주고선, 소유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성공 중앙으로 빠져나온 천도.
그녀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혹시 화났어?”
소유가 묻자 천도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화나기는커녕 놈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올바른 사람이라면 원칙과 신념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게 옳지. 녀석은 약했을 때나 강해진 지금이나 이 점에선 달라진 게 없어. 그저 내가 너무 조급했던 거야. 다만… 나도 시간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시간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소유가 눈을 깜빡이자 천도가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이 우주에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런 사람이 있어야만 오유계도 평화로울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 다행이군. 가자! 출출한데 고기나 빠싹 구워먹자!”
말을 마친 천도는 소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천도가 사라진 후.
계옥탑을 수거한 엽현은 곁에 있는 여인을 향해 돌아섰다. 여인은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표정에서는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저, 이야기 좀 하겠소?”
“…….”
“수치스러웠다면 자결을 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로 봐선 살고 싶은 게 분명하겠구려.”
“나와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거지?”
여인이 엽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엽현 역시 진지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직설적으로 말하겠소. 우리가 관계를 맺은 건 맞지만 나 역시 피해자일 뿐이오. 복수할 생각이라면 조금 전 그 여인을 찾아가 하는 게 맞다고 말해주고 싶소.”
“…….”
잠시 고민하던 엽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그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소. 하나는 이미 나와 동침을 했으니 나의 여인이 되어 그대의 세력과 귀순을 하는…”
“두 번째!”
여인이 차갑게 말을 끊자 엽현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두 번째는 얼마간 내 곁에 머물면서 무공수위를 회복한 후, 나와 막념에게 복수하는 것이오.”
두 가지 제안을 들은 후, 여인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표정으로 보아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엽현이 물었다.
“그대는 조금 전 그 여인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소?”
눈을 뜨고 엽현을 바라보는 여인.
“알고 있다. 그럼 너는 얼마나 강하지?”
“혹시 내게 복수할 생각이거든 그만두시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그대와 나 사이의 일은 모두 그 여자 때문이란 걸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이오? 복수를 하려거든 응당 그녀를 찾아가야 옳소!”
“미친 소리! 네가 보기에 내가 그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여인이 소리치자, 엽현 역시 발끈했다.
“그렇다고 죄 없는 나를 대신 치겠다는 거요? 미친 거 아니오!?”
“하지만 나를 범한 건 결국 그녀가 아닌 너였다! 너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어!”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아니래도 그러네! 나도 엄연한 피해자인 걸 왜 몰라주는 것이오!”
“피해자? 하하하! 그녀는 너를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인데, 너는 오히려 그녀를 탓하는구나! 네가 그러고도 사내가 맞느냐?”
“뭐 이런 미친!”
엽현은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과 뇌 구조가 다른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엽현은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하기 전에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해야겠소. 나 엽현은 여인을 밝히지도 않을뿐더러, 주변에 여인도 넘쳐날 정도로 많소. 그대와 그 일(?)을 했다고 해서 내가 쩔쩔맬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오!”
여인은 말없이 엽현을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현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 말한 대로, 그대를 죽이고 싶진 않소. 하지만 다시 자유의 몸이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 조건을 승낙한다면 그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물론 무공 수위도 원래대로 돌려주겠소.”
엽현은 솔직히 정신이 좀 이상 해 보이는 이 여인을 당장이라도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최소 둔일경이 분명한 여인을 그냥 풀어주기엔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녀에게 한 가지 족쇄를 채우고자 한 것이다.
이때 여인이 엽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조건? 날 노예로 삼기라도 하겠단 건가?”
고개를 젓는 엽현.
“내 조건은 이렇소. 삼 년. 삼 년간 내 곁에 있으시오. 그러면 자유를 돌려주겠소.”
삼 년!
“나, 나랑 그 짓을 삼 년이나 더 하겠다는 거냐!?”
“헛소리 좀 작작 하시오! 내 말은 삼 년 동안 나를 도와 싸워달라는 소리요! 참나! 뭐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낀 것도 아니고!”
여인은 엽현에게 시성을 고정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 부위가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으로 보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듯했다.
“할 거요, 말 거요?”
“먼저 내 무공을 돌려줘!”
“흥, 여전히 꿈이 야무지시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엽현.
여인은 척 봐도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지금 금제를 풀어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크윽… 너는 그 여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다!”
이에 엽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런 험한 말을 해서야 되겠소? 뱃속에 아기가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 순간, 여인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으아아아악-!”
“아, 거 태교에 안 좋다니까.”
“죽일테다아-!”
“…….”
엽현은 발작하는 여인을 보며 다소 어이가 없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기껏 걱정해 줬더니…
엽현의 마음과는 다르게 여인의 눈빛은 점점 포악해져갔다.
이에 엽현이 웃으며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 했다.
“이 문제는 따로 이야기하고, 내가 제안한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먼저 봉인부터 풀어 줘.”
“하하, 풀어주면 나부터 때려죽이려 들 게 아니오?”
“힘이 없는데 무슨 수로 널 도와 싸우겠느냐?”
이때 엽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을 대비해 내게 그대의 혼백 일부를 넘기시오.”
혼백!
순간 여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자 엽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한, 천도는 대단히 악한 자는 아니다.
그런 천도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세워 놓았을 정도라면, 등 뒤의 여인 역시 보통 흉악한 성품이 아닌 게 분명하다.
저렇게 독한 눈빛을 가진 여인이 잠자리를 한 번 가졌다고 해서 굴복할 리도 없고, 시간이 지난다 해서 나아지리라는 가망은 더더욱 없다.
천도를 알게 된 이래로 여자라는 동물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뼛속 깊이 깨달은 상태!
방심은 금물이다!
이때 여인이 엽현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이 말에 엽현이 걸음을 멈춘 후 여인을 돌아보았다. 엽현과 눈이 마주친 여인이 손을 뻗자, 한 줌의 영혼이 빠져나와 엽현 앞으로 날아왔다.
여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엽현을 따라가지 않으면 막념이란 여인이 찾아와 반드시 자신을 죽일 테니까.
이는 일종의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직감이었다.
엽현은 고민하지 않고 여인의 영혼을 거둬들였다.
“그럼 갑시다.”
“잠깐… 금제를 풀어 줘야지?”
여인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엽현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조만간 막념에게 데려가서 풀어주게 하겠소.”
“좋아. 약속은 지켜라.”
고개를 끄덕인 엽현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자루 검이 두 사람의 발밑에 떠올랐다.
“타시오.”
먼저 검 위로 폴짝 올라탄 엽현.
하지만 여인은 주저하며 발을 떼지 않았다.
“아니면 다시 막념을 불러주면 되겠소?”
이 말에 여인이 황급히 검 위로 올라탔다.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을 태운 검이 기우뚱하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쳤다. 이에 깜짝 놀란 여인이 황급히 엽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인은 손을 놓고 싶었지만, 자칫 땅으로 떨어질까 감히 그러지 못했다. 금제가 가해진 지금, 그녀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인 것이다.
“너, 일부러 그랬지!”
“소저, 항상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보시오? 아니면 소싯적에 남자에게 크게 데인 적이라도 있소? 오유계에 도착하면 길 가는 사람 잡고 물어보시오. 나 엽현이 어디 그런 파렴치한인가!”
“흥, 척 봐도 파렴치한에 변태인데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
이때 여인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 여자의 이름이 막념이란 말이지?”
“그렇소. 그녀가 바로 오유계의 천도요. 궁금한 거라도 있는 거요?”
“…….”
“아니면 이렇게 합시다. 나한테 질문 하나 하시오. 그럼 나도 그대에게 질문 하나 하겠소. 어떻소?”
“…좋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천말(千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