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오늘이 바로 우리가 겨루기로 했던 그 날이오
엽현이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대장로를 쏘아보았다.
“대장로! 두 사람만을 위한 생사비무라 하더니, 어찌하여 끼어들어 난장판을 만드시오? 그대의 체면은 둘째 치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엽가를 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오?”
엽현의 말대로 장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여럿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이는 생사비무의 규칙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옥을 비롯한 삼 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기경에 이른 엽랑이 엽현에게 형편없이 무너지다니. 이는 큰 이변(異變)이었다. 세 가문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장로를 향해 소리쳤다.
“대장로! 비무랍시고 우리를 초대해 놓고선 고작 어린 소년 하나를 두고 다수가 핍박하는 장면을 보여주려한 것이었소?”
장렬이 코웃음 치며 맞장구쳤다.
“말로만 듣던 엽가의 생사비무가 고작 패싸움이었다니! 웃다가 내가 다 쓰러질 지경이오, 하하하하…….”
성주 강념 역시 대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소. 부끄러운 줄 아시오!”
대장로가 볼썽사나운 얼굴로 엽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엽랑이 착용하고 있던 전갑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선혈이 흐르는 걸 보니 중상을 입은 듯했다.
이 상태로 비무를 계속하다간 엽현에게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이때, 엽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대장로, 그대는 처음부터 일대일 비무를 제안할 생각이 없었군 그래. 어디 들어나 봅시다. 도대체 무슨 핑계를 들어 나를 제거하려 하는지…… 마침 여기 청성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으니, 말해 보시오!”
“엽현, 노부는 지금 이 비무가 상당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넌 속임수를 썼기 때문이다.”
엽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장로에게 소리쳤다.
“속임수? 이 노망난 영감탱이! 일대일 비무를 하자더니 진 것 같으니까 이제는 속임수라고? 네 놈의 낯가죽은 엉덩짝보다 더 두껍구나!”
대장로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엽가의 제자들은 들어라! 역적 엽현을 당장 죽여라!”
이미 대장로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사람들의 외침 소리로 장내가 들썩였다.
“엽가는 당최 체면이고 뭐고 없구나! 어째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지!”
“더구나 상대가 이기니 속임수를 썼다고 하질 않나! 대장로라는 작자가 어찌도 이리 후안무치(厚顔無恥) 하단 말인가!”
“아무리 저 천선지인이란 자가 친손자라고 할지라도 이건 너무 염치없는 짓 아니오!”
염성과 나성에서 온 남자와 미부 또한 이 상황에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생사대 한 편에서 강노를 들고 있던 보위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대장로가 다시금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게냐! 어서 쏴버려-!”
그제야 보위들이 우물쭈물 강노를 발사하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족장께서 출관하셨다!”
그 말을 들은 대장로가 몸을 움찔하며 엽부의 대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엽가의 가주이자 최강자인 엽창(葉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족장을 뵙습니다!”
엽가의 모든 무인들이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생사대 위로 올라온 엽창의 시선이 대장로에게로 향했다.
“참 잘하는 짓이오!”
얼굴이 납빛으로 변한 대장로가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조… 족장!”
엽창이 그를 무시한 채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오늘 와 주신 분들께는 결례가 많았소! 지금 이 순간부터 대장로를 일반 장로로 강등하고 그가 가졌던 모든 권한을 몰수할 것이오!”
사색이 된 대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엽창이 엽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이에 엽현이 고개를 저으며 엽랑을 가리켰다.
“아직 저 자와의 생사비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엽창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장로가 끼어들었다.
“족장, 엽랑은 천선지인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천지이상까지 불러들였습니다. 그에 반해 엽현은 오늘 승리하긴 했지만 단전이 파열한 폐인입니다. 장담하건대 평생 동안 평범한 무부에 머무르며 청성 밖을 나가지 못할 겁니다.”
엽창의 차가운 눈빛이 대장로에게 꽂혔다.
“그의 단전을 파한 이가 바로 그대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족장! 모든 것은 다 이 늙은이가 꾸민 짓입니다! 하지만 들어 보십시오! 이미 엽현에겐 아무런 미래가 없습니다. 반대로 엽랑은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머지않아 우리 엽가에 큰 영예를 안겨 줄 것입니다!”
다른 장로들 역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엽가의 영욕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인 엽랑이 이렇게 죽으면 안 될 일이었다.
엽창은 고민에 빠졌다. 천재라 할지라도 단전이 파괴된 엽현에게 엽가를 맡길 수 없었다. 반면,엽랑은 천지이상을 불러들인 천선지인이었다. 엽가에게는 더 필요한 인물이었다. 엽창이 고개를 들어 엽현을 바라보았다.
“세자로 다시 책봉할 수 없지만 오늘 부로 예전에 네가 누리던 모든 처우를 회복시켜 주겠다. 그러니 이 일은 여기서 종결토록 한다. 알겠느냐?”
엽현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미치도록 처량했다.
“사실 족장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일을 알고 계셨을 텐데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저에게 위협을 느껴서 대장로가 불공정한 처우를 함에도 방관한 거 아닙니까? 어디 아니라고 말해 보시오!”
엽창이 미간을 찌푸렸다.
“놈! 분수를 모르는 구나!”
“족장, 단전을 손상시킨 것도 모자라 급기야 저를 핍박한 저들을 징계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내가 아닌 미래가 창창한 엽랑을 보호하려는 처사가 아닙니까?”
엽창이 말없이 엽현을 노려보았다.엽현이 천재이긴 하나 엽랑처럼 족장의 직계 후손이거나 배후 세력이 있는 게 아니니 배척되는 게 당연했다. 굳이 이 일을 내버려 둔 건 엽현과 대장로가 서로 마음껏 싸우도록 하여 양측의 힘을 빼놓으려는 엽창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엽가의 가주로서 엽창은 할일을 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장내가 잠잠하자 모두의 시선은 엽현의 입에 쏠렸다. 이옥도 이때만은 엽현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세가 내의 속사정을 모르지만 집안을 일으킨 공신을 두고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돌연 엽현의 입에서 비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그는 번민이 가득한 눈으로 엽부를 바라보았다.
“나 엽현! 세자가 된 열두 살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엽가를 지켜왔건만, 그에 대한 보상이 너무도 비참하구나.”
엽현은 자신의 가슴에 달려있던 엽가의 표식을 떼어 내어 땅에 내던졌다.
“나 엽현은 선언한다. 오늘 이후로 나와 동생 엽령은 더 이상 엽가와 관련이 없다. 설령 우리 남매가 죽더라도 엽가에 묻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말에 장내가 떠들썩해졌다. 특히, 엽가의 무인들은 경악하며 엽현을 바라봤다.
그 누구도 스스로 집안을 박차고 나간 적은 없었다. 적어도 청성에서는 발생한 적이 없었다. 이옥을 비롯한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현이 엽가와 반목하는 것인가! 엽창이 엽현을 향해 말했다.
“이는 너의 선택이니, 누구를 탓하지 말거라!”
엽현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비무대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이때! 대장로가 소리쳤다.
“멈춰라!”
대장로의 말에 엽현이 걸음을 멈췄다. 엽현을 가리키며 대장로가 엽창에게 말했다.
“족장! 비록 엽현이 단전을 잃었다고는 하나 일신상의 전투력을 약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이대로 저자를 곱게 보내준다면 훗날 우리 엽가의 후환이 될 게 분명합니다!”
다른 장로들도 비슷한 말을 쏟아내며 동조했다.
“족장! 엽현은 가문을 배신한 배반자입니다.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다른 무인들에게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겁니다. 게다가 대장로의 말대로 만약 실력이 강한 엽현이 다른 세력에 들어간다면 우리 엽가에겐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엽창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엽현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위들이 일제히 엽현을 향해 강노를 겨눴다. 동시에 엽창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가문을 배신한 자는 규율에 따라 즉각 처형한다. 살(殺)!”
보위들이 강노에 손가락을 걸고 발사하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멈추시오!”
장창(長槍)을 든 한 여인이 비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확인한 대장로의 안색이 급변했다. 비단 그만 놀란 게 아니었다. 강념이 황망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녀의 앞에 달려가 예를 올렸다.
“청성 성주 강념, 국사를 뵈옵니다!”
국사(國士), 안란수!
강국 역사상 최연소 국사로 등극한 여인!
강국에서 국사의 지위는 국주(國主)라 할지라도 간섭할 수 없었다. 국주 휘하의 어떤 관원(官员)이라도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위치였다. 염성의 남성과 나성의 여인 역시 안란수에게 달려와 예를 올렸다.
“염성의 막행, 국사를 뵈옵니다!”
“소신 우가, 나성을 대표하여 국사를 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대표할 때만 국사와 말을 섞을 자격이 주어졌다. 그렇지 않고는 개인적으로는 말을 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안란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 일이 있어 왔소.”
세 사람은 급히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안란수를 향해 쏟아졌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생사대 앞에 섰다.
능공경(凌空境)!
그녀의 경지를 알아본 자들이 숨을 들이켰다.
강국 최연소 능공경 무인인 안란수가 엽현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이 바로 우리가 겨루기로 했던 그 날이오.”
그녀의 말에 모든 이들이 흠칫했다. 대장로가 넋을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단전도 없는 무인에게 비무를 신청한단 말인가…….”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된 그때 엽현의 입이 드디어 떨어졌다.
“좋소!”
엽현의 손바닥에서 한 자루의 검이 떠올랐다.
영검(靈劍)!
순간 장내의 모든 이가 마치 돌처럼 굳었다.
“거… 검수(劍修)?”
고요한 장내에 울려 퍼진 누군가의 이 한마디가 모두의 귓가에 바늘처럼 박혔다.
검수(劍修)!
이전까지 청성은 단 한 명의 검수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런데 엽현이 검수가 되다니! 엽현을 바라보던 사람들 모두 얼굴이 창백해졌다. 엽가의 족장 역시 넋을 잃은 사람 같았다. 장로들은 화석처럼 굳어버린지 오래였다.
안란수가 말하려는 찰나,옆에 있던 대장로가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니야, 이럴 수 없어… 네가 어떻게 검수란 말이냐!”
엽현이 반쯤 미쳐버린 대장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다. 왜,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신가?”
“쿨럭!”
대장로가 선혈을 토해냈다. 그는 흉악한 표정으로 엽현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러고는 엽창을 향해 소리쳤다.
“족장, 이 놈을 결코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엽가에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안란수가 인상을 썼다.
“이토록 심성이 간악한 자는 그대가 생전 처음이오!”
대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안란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그대 어깨 위가 허전해질 것이오.”
대장로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대장로를 바라보는 강념 등의 눈빛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안란수가 장로를 무시하고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을 뽑으시오!”
엽현이 그녀에게 예를 차린 후 지면 쪽으로 영소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그의 몸은 땅에 고정된 것처럼 일말의 움직임도 없었다. 안란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정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이때, 엽현이 바람처럼 가볍고 빠르게 전진했다. 영소검이 안란수에게로 향했다.
일검(一劍)!
지극히 간단하고 빠른 일 검이었다. 안란수가 상체를 약간 비틀며 창을 내밀었다. 그러자 창끝이 엽현의 검 끝에 부딪쳤다.
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