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48
1248화 또다시 깨닫다
소도와 헤어진 엽현은 곧장 오유계로 돌아왔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반년!
엽현은 소도와 대화를 통해 이 반년이란 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반년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는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오유맹의 대전.
소음은 마주 앉은 엽현에게 그동안 오유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짤막하게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음이 말을 마치자 엽현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 속도가 상당하구려.”
엽현이 떠나 있는 사이 오유계에는 총 다섯 명의 둔일경 강자가 탄생해 있었다. 소칠, 아라, 안란수, 장문수, 그리고 검종의 육이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아주와 사도가 이 명단에 들지 못했다는 것은 엽현으로서는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둔일이지 가짜 둔일경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실력만 놓고 보자면 일반 둔일경 강자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그녀들이었으니.
굳이 기를 쓰고 둔일에 오를 이유도 없었다.
그 외에도 반보 둔일경은 오십 명 가량이었고, 귀원파계경에 이른 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단적으로, 오유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은 후, 오유계 전체의 실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소음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는 성장세를 조절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대 의견은 어떻소?”
“물론이오. 언제까지고 성장만 할 순 없소.”
엽현의 생각에도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결국 무리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땅을 딛는 것이 필요했다.
“그럼 속도를 늦추는 게 좋겠소?”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이제는 성장 대신 각자의 무도 경지를 굳건히 다지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겠소!”
이때 엽현이 소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소음 낭자, 아무래도 우리의 미래는 갈수록 평탄치가 않을 것 같소.”
“상관없소.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는 바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소. 참, 그리고 그대도 슬슬 수련에 전념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오유계의 사무는 다른 이에게 맡겨 놓아도 돌아갈 테니까.”
소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슬슬 일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던 차였다.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니 수행에 전념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남들처럼 수련에만 집중했더라면 그녀 역시 벌써 둔일에 도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음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린 엽현은 곧 대전을 떠나 홀로 천도 전당포를 찾았다.
주인이 떠난 전당포는 적막감이 흐를 뿐이었다.
엽현은 소도가 항상 앉아 있던 의자를 차지하고선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안에 있는 작은 인형을 바라보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엽령!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엽현에게 있어 엽령은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존재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과 행복하게 오순도순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 꿈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특별한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떠올린 순간, 엽현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선각자!
청아!
청삼남!
여기에 액난지인이란 저주를 걸어 놓은 미지의 인물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인생은 이미 인과의 파도 속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심지어 때로는 자신의 운명이 정말로 스스로의 것인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실제로 천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이미 엽현이 아닌, 엽청지의 환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 아닌가.
윤회!
환생!
오래전에는 이런 것을 믿지 않았던 엽현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더불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강자라면 생사를 바꾸는 건 힘들지라도 다른 이의 몸으로 환생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엽현은 다시 엽령을 떠올렸다.
그녀 역시 자신처럼 평범한 신분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사실 엽현은 오래전부터 엽령에 대한 한 가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달리 엽령은 풍마 혈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
독고훤!
자신과 엽령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
하지만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그녀의 흔적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
엽현의 눈빛이 점점 의혹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지?
스스로를 엽현이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복잡해져 버렸다. 혹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엽현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져만 갔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막막함!
사람이 살다 보면 항상 일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길을 잃고 제자리에 멈춰 선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발버둥 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혼자만의 미로에 갇힌 채 방황의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인과와 윤회라는 혼돈 속에 침체 된 엽현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방황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바로 이때, 그의 머릿속에 일갈이 울려 퍼졌다.
[멍청한 놈! 너는 너다! 뭘 그리 고민하느냐?]다름 아닌 구층 존재의 음성이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엽현은 점점 입가에 미소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전혀 ‘엽현’답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나지 그럼 누구냐!
전생에 뭐였는지가 도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엽현에게 있어 인생이란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그것은 전생의 문제.
지금은 지금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예전에 내가 누구였건, 앞으로 어떻게 환생하건 지금 일에나 신경 쓰자!
바로 이때, 엽현은 얼마 전 고사에서 읽었던 불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오래전 어느 저명한 고승이 어떤 한 부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전혀 나아가지 못하다가, 이러한 집착을 내려놓자 훗날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엽현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 구절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와 닿았다.
오늘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무언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생은 전생, 내생은 내생(來生)일 뿐, 오늘 고민해야 할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왜?
왜냐하면, 전생의 엽현과 내생의 엽현은 현생의 엽현과는 이미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지금 인생을 잘 살까 하는 것이지, 전생이나 미래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과거에 무엇이었든, 현재의 자신이 엽현이면 그건 엽현의 인생인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엽현의 몸 주위로 갑자기 찬란한 불광이 터져 나왔다. 이와 동시에 무궁무진한 불법지력이 엽현의 주변을 완전히 뒤덮었다.
엽현은 자신의 몸 주위로 휘몰아치는 불광을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이때, 주변을 가득 메웠던 불법지력이 순식간에 그의 미간 사이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이 순간, 엽현의 미간 사이에 ‘卍(만)’이라는 글자가 황금색으로 번뜩였다.
엽현은 너무 놀라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주지가 있었더라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금 엽현의 상태는 불가에서 말하는 영명견성(靈明見性).
즉, 스스로의 상태를 명확히 깨닫고서 진정한 도(道)에 한 발 내디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 내의 몇몇 고승들이나 겨우 가능할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특히, 엽현처럼 젊은 나이에 영명견성의 깨달음을 얻는 자는 고사는 물론 극락지계를 통틀어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엽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영명견성에 이른 후, 그의 몸에 붙어있던 몇 가닥의 인과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인과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있는 반면 자신에 의해 후천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인과가 발생한 원인이 자기 자신일 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뿐이라는 것이다.
엽현은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는 불법지력이 어쩐지 더욱 강력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 금강불체를 발현해본 엽현은 깜짝 놀랐다.
과연 금강불체의 위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던 것이다!
이때 구층 존재의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불가의 힘은 너희 검수들과 같이 깨달음에 달린 것이다. 문득 든 생각인데 빈말이 아니라 네가 떙중이 되도 꽤나 잘 어울릴 것 같구나!]이 말을 듣자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면 굳이 중이 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족한 것 아니겠소?”
이 말이 떨어진 순간, 엽현의 미간 한가운데 박힌 ‘卍(만)’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윽고, 한 줄기 금광이 천도 전당포를 뚫고 성공 깊숙이 솟구쳤다.
잠시 후, 잠잠하던 엽현의 육신에서 돌연 엄청난 양의 불법지력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흘러나왔다.
쾅-!
무변지하성 전체를 뒤흔드는 큰 기운과 함께 엽현 미간 사이의 ‘卍(만)’자의 색은 더욱 진해져 갔다.
엽현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설마 불법지력이 또다시 강해지려는 걸까?
이때 구층 존재의 볼멘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변태 같은 놈! 재수 없으니까 그만 강해져라!]“…….”
바로 이때, 엽현의 앞에 승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고사의 지무였다.
지무는 엽현 미간 사이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卍(만)’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영명견성… 그렇다는 것은……”
“지무 대사, 뭘 보고 그리 놀란 것이오?”
엽현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지무가 양손을 합장하며 대답했다.
“영명견성의 깨달음을 얻고도 그리 담담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음?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오?”
엽현의 물음에 지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엽 시주, 고사 전체 역사를 통틀어 영명견성의 경지에 오른 것은 단 한 분뿐이셨소. 이 정도면 이해가 가시오?”
이에 엽현이 지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의 어떤 것들은 집착할수록 얻기 힘든 게 있는 법이라오.”
이 말을 듣자 지무가 화들짝 놀라더니 공손히 합장을 했다.
“엽 시주의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엽현이 막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이때, 장내에 두 명의 승려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둘은 다름 아닌 고사의 주지와 지사 장로였다.
주지는 엽현 미간 사이에서 빛나는 ‘卍(만)’자를 보자 양손을 모으며 가볍게 불호를 외웠다.
영명견성!
고사 역사상 한두 명밖에 이르지 못한 이 경지를 어찌 엽현이 도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아미타불…….”
한편, 주지 곁에 서 있는 지사 역시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안 그래도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엽현이 영명견성까지 달성한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준 겪이 아닌가!
이 경지에 이른 후에는 적은 노력만으로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사의 마음은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한편, 지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엽현의 불법지력은 이때에도 계속해서 강해져 갔다.
이때 잠시 망설이던 고사의 주지가 엽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엽 시주, 어떻게 해서 영명견성에 이를 수 있었는지 말 해 줄 수 있겠소?”
이에 엽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주지 대사, 고사의 고승인 대사의 불법은 분명 나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경지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가 보기에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주지가 간절한 표정으로 묻자 엽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대사는 왜 그리 경지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까? 대사가 불법을 닦는 이유는 고작 남에게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까?”
“아…….”
이 순간, 외마디 탄성과 함께 주지 손에 있던 염주가 툭 하고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