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56
1256화 검변
엽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 앞에 펼쳐진 작은 길을 쳐다보았다.
검이 왜 뜬금없이 반응한단 말인가?
혹시 주변에 검을 자극할 만한 강자라도 나타난 것일까?
엽현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눈앞에 난 길을 향해 발을 뻗었다. 길 위에 첫발을 디딘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주변의 공간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심!”
엽지명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엽현은 조심스레 다시 한 발을 뻗었다.
바로 이 순간, 사방의 공간에서 갑자기 반투명한 허영들이 하나둘 튀어 나왔다.
적인가!?
엽현은 당황하지 않고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허영들은 공격 대신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일련의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은 마치 엽현에게 무언가를 시연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때 엽지명이 조용히 말했다.
“이건 전승이다.”
“전승?”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정신을 집중해서 이들의 동작을 잘 살펴보거라.”
“알겠소!”
엽현은 호흡을 가라앉힌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허영들의 움직임이 그의 머릿속으로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엽현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상대의 움직임이 뭘 의미하는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엽지명은 허영들을 응시한 채 아무 말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 여전히 상대의 동작을 깨닫지 못한 엽현이 눈을 뜨고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이건 일종의 고심무학(高深武學)이다.”
고심무학!?
엽지명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살펴보겠소.”
재차 정신을 집중한 엽현은 이번에는 검역까지 동원했다.
검역이 펼쳐지자 허영들의 움직임이 한결 더 또렷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엽현의 표정은 갈수록 딱딱해져 갔다. 마침내 허영들의 움직임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는 마치 거대한 자연의 법칙을 담고 있는 듯 그 변화가 무쌍했고 무궁무진했다.
엽현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길 양쪽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허영들이 나타났고, 이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빠르고 화려해졌다.
점점,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엽현은 금세 이들의 움직임에 푹 빠져들었다.
엽청지 역시 주변을 돌아보며 천천히 엽현의 뒤를 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매우 느렸던 엽현의 걸음은 점차 빨라져 갔다.
왜냐하면, 가면 갈수록 허영들의 움직임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기억이 나지 않을 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동작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렇게 대략 한 시진쯤이 지난 후, 엽현은 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에 있던 허영들이 일제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던 작은 길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길이 없다!?
허영의 움직임에 의지해 동작을 배워 나가던 엽현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초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중간에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엽지명은 엽현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조언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이때, 엽현은 문득 예전에 막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가 비로소 네 길을 만들 때다.
엽현은 곧장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영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다시 한 시진쯤 흘렀을 때, 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본 동작을 직접 펼쳐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엽지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이미 허영이 펼친 초식이 무엇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엽현이 물어보기 전까지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 애를 써서 터득하는 것과 남의 도움을 받아 터득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엽현 역시 도움을 청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엽지명은 서두르지 않고 엽현을 지켜보기로 했다.
한편 엽현은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들었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 봐도 허영이 펼친 것처럼 유려한 동작은커녕,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삐꺽거리기만 했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것을 깨달은 엽현은 거기서 동작을 멈추고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곧 엽현의 입에서 고사 주지가 알려 준 불경 구절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엽지명은 다소 이해할 수 없었으나 역시나 지켜보기만 했다.
반 시진 후, 엽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조금 전의 동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그의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학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것을 인정하고, 아예 가장 익숙한 검을 들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같은 동작이긴 하지만, 어색함이 덜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검을 들고 첫 동작을 취하자마자 엽현은 깜짝 놀랐다.
마치 검수를 위해 만들어진 동작처럼 움직임이 훨씬 더 부드러워진 것이 아닌가!
이에 엽현은 신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엽현의 동작은 허영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매우 매끄럽게 흘러갔다.
이를 본 엽지명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한순간에 저렇게 변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현재 엽현이 펼치는 초식은 처음 그녀가 이해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허영이 펼친 것이 무학에 궤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 엽현이 펼치는 동작은 그야말로 하나의 검술 초식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엽지명이 고개를 돌려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불청객이 찾아왔군…….”
한쳔, 엽현의 검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고 유려하고 날카로워져갔다. 사방으로 검영(劍影)이 휘날리고, 그의 전신에서는 검의가 폭발하듯 증가했다.
엽현에서 풍겨 나오는 검도의 기운은 이미 검심자재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러던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엽현 앞쪽에 사라졌던 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길이 다시 생겼다!?
엽현은 검무를 추며 천천히 길을 따라 이동했다. 이때, 사라졌던 허영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허영들은 조금 전과 달리 엽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그가 하는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엽지명은 말없이 엽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반 시진 쯤 걸어 들어갔을 때, 엽현이 자리에 멈춰 섰다. 이와 함께 길 양쪽에 있던 허영들이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엽현의 검무는 계속되었다.
엽현은 허영의 무학 대신, 자신이 지금껏 배워 온 모든 종류의 무학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천녀의 일검정생사나 청삼남이 알려 준 발검술 또한 포함돼 있었다.
엽지명은 진중한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엽현이 펼치는 검술, 특히 일검정생사와 발검술은 단순한 초식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하나의 검도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의 그는 단순히 이 초식들의 형(形)만 따라 배웠을 뿐이었다.
반면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형이 아닌 신(神)을 연마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엽현을 지켜보던 엽지명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중년 남자 하나가 엽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자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은 머리는 산발해 있고, 수염은 오랫동안 다듬지 않아 너저분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집착을 버리지 못한 망령이었구나.”
엽지명은 더 이상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시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의 초점은 처음부터 엽현에게 향해 있었다. 엽현이 검무를 추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었어…….”
이때 중년인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중년인은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찾았던 무인이었다. 그 역시 깨달음을 얻고자 이곳을 찾았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허영들의 동작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만 년 동안 이곳을 서성이던 그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엽현에 의해 모든 의혹을 풀 수 있었다.
엽지명은 사라져가는 중년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살아생전 한 가닥 하는 강자였다는 의미이리라.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 이상 과거의 그 어떠한 영광도 뜬구름에 불과한 것이니까.
무도라는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스러져 갔던가. 물론 그 중의 몇몇은 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묘비 하나 없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던가.
바로 이때, 엽현이 검무를 멈췄다. 그가 멈춰 선 순간, 그의 주변에 수십 개의 허영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검을 들고서 제각기 다른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검변만화(一劍變萬化)!
눈을 뜬 엽현이 손안의 천주검을 바라보았다. 이때 천주검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낮게 진동하고 있었다.
엽현은 천주검을 응시하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검변(劍變)….”
검심자재 다음의 경지는 무엇인가?
엽현은 알지 못했다.
막념은 그 다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의 엽현은 이미 검심자재를 뛰어넘는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한 상태였다.
검변!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만 가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개념이었다.
청성에서 처음 검을 잡은 이후로 처음으로 다른 이가 만든 것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검심자재 이후의 경지가 무엇이든 이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것을 학습하고 모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개척한 길을 묵묵히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의 너는 둔일경 안에서라면 무적이다.”
엽지명의 말에 엽현이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둔일경 밖에서는 어떻소?”
“여전히 적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엽지명은 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예전의 엽현이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였다면 지금의 그는 환골탈태 수준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특히나 무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오유계와 육유계 그리고 도계를 통틀어 이 경지에 이른 자는 단 한 명 뿐이었다.
막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세상은 엽현이라는 새로운 선구자를 품에 안게 된 것이다!
표현한 적은 없지만, 엽지명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막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지 않았더라면, 엽지명은 감히 엽현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념은 자신이 온 ‘그곳’의 존재들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 여전히 막념과 엽현의 실력 차이는 극명하다. 하지만 오늘로써 그 간극이 크게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세상에 새로운 검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검변!
앞으로 수많은 검수들이 이 길을 따르게 될 것이고, 검변을 창시한 엽현은 검수들 사이에서 지고지상한 존재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도경을 익혔거나 익힌 자들은 더 이상 엽현의 상대가 아니다.
그가 앞으로 경쟁해야 하는 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지를 창조한 일대종사들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은 다름 아닌 도경을 창시한 존재일 것이다.
도경의 주인!
모두가 대도를 섬기며 따를 때, 가장 먼저 도를 깨부수고 나온 자!
막념이 대도의 수호자라 한다면 도경의 주인은 정반대인 대도를 거부하고 거스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엽현이 막념의 뜻을 이어받게 된다면 양측 진영은 언젠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바로 이때, 두 사람이 서 있는 자갈길 끝에 돌연 검은 돌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돌문이 열리자 한 줄기 희멀건 빛이 튀어나오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