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74
1274화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것
수미신국 강자들은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영토가 겨우 세 사람에 의해 유린당하는 걸 지켜보는 것은 이들에게는 큰 치욕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내린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꽉 들어차 있던 수미신국의 보고는 정말이지 깔끔하게 비워졌다. 보물 한 점은커녕 엽전 한문까지도 남기지 않았다.
약탈을 마친 엽현은 도삼생과 소령을 데리고 중년인과 백발노인 앞에 섰다.
이때 엽현 등을 노려보는 백발노인의 눈빛은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매서웠다.
“흠, 흠! 이 엽현은 신용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오. 오늘 그대들에게 빌린 것은 훗날 이자까지 쳐서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이만!”
짧은 한마디를 남긴 엽현은 두 여인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미성역 외곽.
엽현과 나란히 날아가던 도삼생이 문득 엽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까 말은 진짜요? 정말로 돌려줄 생각이오?”
도삼생의 물음에 엽현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무슨 강도도 아니고 당연히 돌려주는 게 맞지 않겠소?”
“언제쯤 돌려줄 생각이오?”
“음… 다음 세대에.”
“…….”
다음 세대!
도삼생은 멍하니 엽현을 쳐다보았다.
“와… 이거 진짜 대단한 도둑놈이네.”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도삼생의 말에 엽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수미신국을 멸망시키진 못했지만,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수미신국을 털어서 모은 재물은 오유계를 탈바꿈시키기에 충분하리라!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한 두 사람은 이내 어두운 성공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수미신국.
엽현과 도삼생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엽현이 어찌나 철저히 털어갔는지, 황궁에 있던 금수저까지 싹 사라졌던 것이다.
치욕!
수미신국이 언제 이런 치욕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엄밀히 말해 건국 이래 이런 모욕적인 상황은 처음인 것이다!
사실 엽현이 떠나려 할 때, 몇몇 강자들이 참지 못하고 추격하려 했지만, 중년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이에 무인들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자신들의 선조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들. 단체로 죽고 싶은 게냐?”
“선조, 하지만…”
백발노인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때 중년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엽현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여인은 절대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이때 뭔가 고민하던 백발노인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선조, 저승과 손을 잡는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조금 전 태도로 보면 도삼생이란 여인은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보았다.
“혹시 내 본체가 남아 있었다면 모를까, 너희들의 실력으로는 그들과 연락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곳에 들어서는 즉시 사라질 테니까. 둔일은 고사하고 증도경 강자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여인을 어찌할 방법이 정녕 없다는…”
백발노인의 표정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설령 도삼성을 어찌한다 해도 엽현의 뒤에는 막념이란 괴물이 버티고 있다.
둘 모두 자신들이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강자들.
정녕 이 치욕을 갚을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때 중년인이 물었다.
“여전히 도경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게냐?”
“선조, 그것은…”
“되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설령 나였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중년인이 문득 한숨을 쉬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도경…….”
“…….”
백발노인은 말없이 중년인만 쳐다볼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중년인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를 들은 백발노인은 눈을 부릅뜨며 불신의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져 갔다.
* * *
수미신국을 떠난 엽현 일행은 곧바로 오유계로 향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된 듯했지만, 도삼생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오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눈치챈 엽현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삼생 군사, 낙심하지 마시오.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는 온갖 변수들이 난무하기 마련이오. 이런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쓸 것 없소.”
“…….”
“군사, 정신 차리시오! 그대의 한 마디에 백만 대군의 목숨이 달려있소. 이런 중요할 때에 의기소침해선 안 된단 말이오!”
“낙심한 적 없소!”
발끈해서 소리친 도삼생이 엽현을 향해 물었다.
“이번엔 그대가 말 해 보시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내 생각엔 당장은 숨을 죽이고 실력을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소. 조만간에 있을 전쟁을 대비해서 말이오.”
이에 도삼생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말이 맞소! 내가 보기에 오유계의 실력은 여전히 부족하오. 지금은 병사들을 채찍질해서 전력을 끌어 올려야 할 시점이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일단 훔쳐 온, 아니, 빌려 온 자원은 충분하니 이것부터 무인들에게 분배해야겠소!”
이때 도삼생이 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대도 아직 부족하오.”
“…….”
도삼생의 말은 화살이 되어 엽현의 정곡을 찔렀다.
사실 엽현의 경지는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도삼생이나 막념을 제외하고는 현재 엽현이 두려워할 만한 상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수미신국의 선조라 할지라도 한 판 붙어 볼 자신이 있었다.
현재 그의 경지는 ‘진정한 둔일’, 게다가 검도는 ‘검변’이다.
검도 경지만 놓고 보자면, 막념을 제외하고는 검수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最高)인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수미신국이나 극락지계가 아는 엽현의 경지는 예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엽현이 가진 비장의 한 수라 할 수 있었다.
천하무적이 아닌 이상, 실력의 반 푼은 숨기는 것이 병법의 기본!
미리 알고 있다면 몰라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당한다면 그 어떤 적이든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때 도삼생이 말했다.
“하루빨리 증도에 이르도록 하시오. 그때가 되면 삼생결을 배우고 삼생지력(三生之力)을 사용할 수 있소.”
상념에서 깨어난 엽현이 도삼생을 쳐다보았다.
“삼생지력?”
“그렇소. 감히 말하건대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삼생지력일 것이오!”
이때 엽현이 문득 물었다.
“군사, 혹시 도경에 대해 아시오?”
도경!
“저승에 있던 그 책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도삼생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건 쓰레기요, 쓰레기. 땔감으로도 못 쓰는 쓰레기.”
“…….”
“못 믿나 본데, 삼생결은 도경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오!”
엽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하지만 삼생결은 꼭 증도에 이른 후에야 익힐 수 있으니…”
“다 그대를 위한 것이오. 지금 몸으로 수련해 봐야 삼생지력을 버티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그대 몸 안에 있는 기운도 완전히 흡수한 것은 아니지 않소?”
엽현이 손바닥을 펼치자 한 줄기 금광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걸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엽현이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불법지력이었다.
도삼생의 말대로 그의 불법지력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영명견성을 이루긴 했으나 불법 수련의 기간이 짧은 탓에 난잡할 부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때 도삼생이 말을 이어갔다.
“또한 혈맥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오. 혈맥지력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려면 지금보다 더 확실히 통제해야만 하오.”
“그건… 알고 있소.”
엽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혈맥지력을 통제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오유맹 대전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엽현은 소음을 시켜 도삼생이 오유계의 무인들의 훈련을 시찰할 수 있도록 했다.
자칭 군사 전문가인 도삼생은 군사를 다루는 데 있어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를 아는 엽현은 소음을 따로 불러 도삼생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실력에 비해 머리가 나쁜 도삼생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달래듯 살살 구슬리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두 여인을 보낸 엽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막 누우려는 찰나, 엽지명이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느냐?”
엽현은 웃으며 수미신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자가 저승을 알고 있었다고?”
엽지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한둘이 아니게 됐소.”
엽지명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좋지 않아. 도삼생의 존재까지 아는 것으로 보아 그자가 저승에 갔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정황상 저승은 도삼생의 위치를 모르는 것 같다만, 만에 하나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엽 소저, 우리가 그리로 쉽게 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 역시 이곳까지 오기 어려운 것 아니오?”
“…확실히 네 짐작이 맞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다.”
“예전?”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 말은 지금은 얼마든지 넘어올 수 있다는 뜻이오?”
“비슷하다. 저승과 이승 간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아느냐?”
“음… 우주장벽?”
엽지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바로 결계(結界)지.”
“결계?”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세계 사이에는 도지계(道之界)라는 대도에 의해 형성된 결계가 존재한다. 우주장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간이지. 원래대로라면 이승과 저승은 절대 왕래할 수 없어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상황이 변하다니…”
엽지명이 엽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대도를 구성하는 법칙들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지. 지난번 대화에서 언급했던 윤회선악도(輪迴善惡道)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법칙들이 누군가에 의해 일제히 붕괴되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지계 또한 위력이 약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지.”
“누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이오?”
엽지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대도를 역전(逆轉) 시킬 정도의 강자라면 결코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 감히 예상하건대 제아무리 막념이라도 대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건 그저 추측일 뿐이다. 그 음험한 여자가 날 놀래킨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이에 엽현이 웃으며 말했다.
“엽 소저, 사실 막념은 좋은 사람이오.”
“그건 너에 한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
“하하, 그건 그렇지만. 어쨌거나 악인은 아니니 그리 두려워할 건 없다는 이야기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