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84
1284화 그대는 어찌 살아있소?
엽지명의 퉁명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고승이 합장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필생의 공력을 흩어 우주에 환원했다. 이로써 우주와 나는 빚진 것이 없는 것이지.”
엽현과 엽지명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을 모두 환원하다니.
세상에 진정으로 이런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다만…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불도와 대도는 결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당시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지.”
이때 엽현이 돌연 엽지명을 돌아보았다.
“엽 소저, 갑시다.”
“뭐? 가다니? 그럼 도경은?”
“하하, 내 것은 내 것이고 남의 것은 남의 것이오. 더 이상 남의 것을 탐하고 싶진 않소.”
곧장 발길을 돌리는 엽현.
이때 고승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이야,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내가 네게 도경을 넘겨준다면 그래도 극락지계와 싸우겠느냐?”
돌아선 엽현이 고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설령 네가 천하무적이 되어 극락지계가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해도?”
엽현은 고승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를 적으로 삼는 자는 그게 누구든 간에 박멸할 것입니다. 그게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설령 내게 은혜를 베푼 자의 후예라 할지라도!”
“…….”
고승은 말없이 엽현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고승은 품 안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게 바로 네가 찾고 있는 도경 제 사권이다. 이제 네 것이다.”
이 말을 마친 순간, 노승의 손안에 있던 책이 엽현에게로 천천히 날아들었다.
엽현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승을 쳐다보았다.
“대사, 제게는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에 대해서 저는 사실 의혹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혹시 대사께서는 극락지계에 원한이 있으십니까?”
“…….”
엽현 뿐 아니라, 엽지명 역시 노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극락지계를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엽현에게 도경을 넘기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엽현의 말대로 사실 둘은 원한 관계에 있던 것일까?
이때 고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극락지계와의 원한은 없다. 네 대답이 무엇이었든 간에 도경은 넘겨주었을 것이다.”
“…어째서 말입니까?”
엽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고승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엽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라, 곁에 있던 엽지명이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됐다. 이만 가자!”
“…….”
잠시 엽지명과 눈빛을 교환한 엽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경을 챙겨서 돌아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채 못가서 다시 고승을 향해 돌아섰다.
“대사, 혹시 만법불멸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그런데 왜…”
노승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이때, 엽현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기왕 은혜를 베푸는 김에 그것도 좀 주십시오.”
“…….”
고승은 다소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엽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 한 줄기 불광이 날아와 엽현의 머릿속에 박혔다.
만법불멸체의 구결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사!”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엽현은 마지막으로 합장을 한 후, 엽지명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불전 안.
홀로 남은 고승이 양손을 모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선한 씨앗을 뿌린 만큼 부디 선과를 거둘 수 있기를. 아미타불…….”
이 음성을 끝으로 노승의 육신은 점점 사라져갔다.
막 불전을 나선 엽현과 엽지명은 문 앞에 서 있던 미존과 마주쳤다.
미존은 불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엽현이 펼친 검역이 외부로 새어 나가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엽 시주, 이제 떠나려는 것이오?”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우면 며칠 더 있다 가겠소.”
“하하, 엽 시주. 말씀이 지나치시구려. 소금을 뿌려도 모자랄 판에!”
“하하하! 대사, 그동안 실례 많았소.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합시다!”
말을 마친 엽현은 엽지명과 함께 도망치듯 순식간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엽현이 떠나고 미존은 황급히 불전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확인한 결과 불전 내에 있는 경전들은 한 권도 빠짐없이 온전하게 자리에 있었다.
“흠… 정말로 불경만 읽으러 온 것이란 말인가?”
미존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알아내려 했지만, 엽현의 방문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일 뿐이었다.
* * *
극락지계를 빠져나온 엽현은 강우 등 도계의 무인들과 다시 조우했다.
강우는 엽현을 보자마자 두 팔을 펼치며 환영의 뜻을 보였다.
“엽 공자!”
“강 각주! 오래 기다리셨소!”
주변을 본 엽현은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 각주, 이청 소저는 어디에 있소?”
“그녀는 벌써 떠났소.”
“떠…나?”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자 강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소. 내가 그대를 택하거나 극락지계를 택하거나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소.”
“강 각주, 그럼 그대는 나를 택한 것이오?”
“물론이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엽현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했다.
“강 각주,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옮깁시다.”
“좋소!”
자리를 떠난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성역을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강 각주, 사실 도경은 처음부터 내게 있었소.”
이에 강우가 다소 놀란 표정을 보였으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엽 공자,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소. 확신하지 못했을 뿐.”
“어떻게 예상한 것이오?”
“그대를 다시 보았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소. 게다가 막념 소저가 증도경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대가 진짜 둔일이거나 그에 근접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해 봄 직한 일이오. 설령 도경을 보지 않았더라도.”
사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점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한 상태였다.
막념이 이미 증도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엽현이 고작 귀원파계에 머물러 있다?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많은 무인들이 여전히 도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지만, 사실 진짜 둔일, 심지어는 증도로 가는 열쇠를 쥔 사람은 막념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간파한 강우는 엽현이 이미 진짜 둔일에 도달했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예상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강 각주, 혹시 나와 오유계로 가시겠소?”
엽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강우가 멈칫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소!”
“하하, 좋소. 하지만 나를 노리는 적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이에 강우 역시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적이 백이든 천이든 어떻소? 진짜 둔일을 이룰 수만 있다면 우주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해도 따를 것이오!”
강우의 대답은 명쾌했다.
내가 너를 따를 테니 그 대신 나를 둔일로 이끌라는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강우는 순간 자신이 무리한 제안을 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진짜 둔일? 하하하! 강 각주 포부를 좀 더 크게 잡는 게 어떻소?”
“좀 더 크게… 설마……”
강우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당장 도계로 돌아가서 둔일경 강자들에게 전하시오. 만약 오유계로 향한다면 나 엽현이 둔일일 때 그들 또한 둔일일 것이고, 증도일 때 똑같이 증도경이 될 것이라고! 물론 나의 처지를 알고도 원하는 자들이 대상일 것이오!”
“엽 공자,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장담컨대 이 제안을 거부할 자는 없을 것이오. 오히려 둔일의 길을 알려준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자들이오!”
“하하, 그럼 좋소! 그럼 준비되는 대로 오유계로 오시오. 그곳에서 그들을 지도할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소.”
이 말에 강우가 감동 어린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엽 공자! 잠시 후에 뵙겠소이다!”
강우는 대답하기가 무섭게 바람처럼 신형을 날렸다.
“제법 머리를 좀 굴렸구나.”
곁에서 들려온 음성에 엽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엽지명이 웃으며 말했다.
“저들은 모두 자신들의 한계에 매우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들이다. 네가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저들에게는 마치 새 생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둔일경 강자들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네가 앞으로 상대할 적은 둔일이 아니라 증도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두 명의 증도경 강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한 명이 막념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하나가 활개를 친다면 진짜 둔일이 제아무리 많아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전력을 보충하면 되는 일 아니오? 엽 소저, 혹시 놀고먹는 증도경 강자 어디 없겠소?”
“네가 보기에 그런 자가 있겠느냐?”
엽현은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민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순순히 도경을 넘겨받은 것은 다소 의외였소. 그대는 그 승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소?”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 첫째는 혹시라도 도경이 극락지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우려했을 가능성이다. 전성기에 비해 한참 내려온 그들의 실력으로는 절대 도경을 지켜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
“하지만 도경이 내 손에 넘어와도 그들이 위험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니오?”
엽지명이 한심하다는 듯 엽지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얻은 도경은 누가 준 것이냐?”
“그야 물론 극락지계의 고승 아니겠소?”
“그가 네게 도경을 주고 만법불멸체까지 별말 없이 넘긴 것은 네게 빚을 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한번 말해 보거라. 이런 은혜를 입고서도 극락지계를 공격할 수 있느냐?”
“그건…….”
“그가 심은 것은 비단 하나의 선인(善因)일 뿐 아니라, 정상인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인정(人情)이었다. 물론 혹시라도 네가 죽어버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엽지명은 고개를 들어 엽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공짜로 이것저것 얻어서 좋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늙은이 역시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이 절대 아니다.”
“흠… 그가 극락지계에 도경을 물려주지 않은 것은 정말로 도경이 극락지계에 화를 초래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 것이오?”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성기였더라면 모르겠지만, 현재의 극락지계는 도경이 가져올 인과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도경을 차지하고서 끝이 좋은 자가 있었더냐? 심지어 선각자마저 비명에 횡사하지 않았더냐?”
“…….”
“극락지계 내의 승려들 중에는 이런 혜안을 가진 이가 없다. 때문에 그 늙은 중은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이다. 너 역시 그 소복의 여인이나 막념이 없었더라면 이미 죽어도 백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느냐?”
“엽 소저,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된 것이오? 그대 역시 도경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어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