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93
1293화 나도 부탁이 있다
소녀가 다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엽현은 허세를 부리면서 말했다.
“그래. 형님에게 널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도록 하지.”
“그 대가로 뭘 원하지?”
“원하는 건 없어.”
엽현의 말에 소녀가 살짝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거래를 하자며?”
이에 엽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도의 일부인 너를 도울 수 있다는 건 이미 가문의 큰 영광이야. 여기서 뭘 더 바랄 수 있겠어?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도록 하지!”
“정말로?”
“정말로!”
엽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소녀의 눈빛에 담겨 있던 적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너는… 저승의 냄새나는 놈들보다는 괜찮은 아이로구나.”
이때 소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얀 병 하나가 엽현 앞으로 날아갔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이야기하자!”
엽현은 소녀가 건넨 병을 받아 들었다. 뚜껑을 열자 윤택이 흐르는 하얀 단약이 들어 있었는데,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듯 상쾌한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엽현은 의심 없이 단약을 집어삼켰다.
누군가에게 맞아 죽을 순 있겠지만, 독으로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약이 몸에 들어오자, 정순한 기운이 신속하게 몸속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순간 엽현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상쾌해…….’
단약이 주는 기운은 뭔가 묘하면서도 황홀했다.
한편 엽현을 보고 있는 엽지명은 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뻔뻔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첨하는 실력 또한 일품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엽현이 무슨 말을 하든 의심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시 후, 엽현의 갈라졌던 육신은 완전히 아물어 정상을 회복했다.
“그런데 너희는 저승으로 가려 했던 것이냐?”
소녀의 질문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실력이 너무나 부족한 탓에 망설이고 있었소.”
“음… 사실 너 정도 실력이면 아주 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소녀의 말에 엽현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봐야 그대의 공격을 한 번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지 않았소?”
“실망할 것 없다. 저승이라 해도 내 일초를 막아 낼 녀석은 드무니까. 너 정도면 이미 매우 훌륭한 셈이지!”
“음… 내 실력이 괜찮은 게 아니라 그대가 너무 강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 아니오?”
“음?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소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엽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한편, 대화를 듣고 있는 엽지명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두가 인간들은 교활하다던데, 그중에서도 너처럼 건실한 녀석이 있었구나.”
소녀의 말에 엽지명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엽지명은 문득 엽현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판보다 더 두꺼운 낯짝, 능구렁이 같은 아첨 솜씨.
이는 분명 생존에 매우 유리한 것들임에 틀림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엽현이 검수란 사실이었다.
검수 중에 저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심경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녀가 알기로 엽현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었다.
이쯤 되면 엽현의 안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해부해서 살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소녀와 엽현의 대화는 이 와중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 검주에 대해 말해 보거라.”
이 질문에 엽현이 다소 주저하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형님이 아니라, 내 사부요.”
사부?
소녀가 엽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검도가 보통이 아니라 생각 했는데, 그런 자를 사부로 두고 있었구나.”
“알아봐 주어서 고맙소! 그대 같은 강자의 인정을 얻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초면에 이런 말이 실례인 건 알지만… 혹시 내 검도에 대해 지적 해 줄만한 것이 있겠소?”
지적!
소녀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자신은 검수도 아닌데 어찌 상대의 검도를 지적한단 말인가?
하지만 엽현이 자꾸 추켜세워 주는 상황에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을 마친 소녀가 자못 진지한 투로 말했다.
“네 검도는 이미 한 번의 중대한 기로를 넘어섰다. 여기서 다시금 돌파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검증도(以劍證道)를 실현해야만 할 것이다.”
이검증도!
엽현이 눈을 깜빡이며 관심을 보였다.
“이검증도… 검으로 도를 증명하라? 이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이오?”
소녀가 손바닥을 펼친 순간, 엽현의 검이 그녀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뒤이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엽현 주변으로 붉은 실선이 빙 둘러쳐졌다.
“자, 거기서 나와 보거라.”
소녀의 말에 엽현이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선 밖으로 빠져나온 발이 검게 부패되기 시작했다!
엽현이 깜짝 놀라 발을 빼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오?”
소녀가 검을 쥔 손을 펴자, 검이 다시 엽현에게로 천천히 날아갔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도(道)다. 나는 도지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결계의 근원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우주 전체를 봉인해 버릴 수도 있지.”
엽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주 전체를 봉인할 수 있다니…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군!’
“너의 검도에는 ‘변수’가 깃들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변화라도 결국 그 근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너는 앞으로 네 검의 변화에 담긴 법칙을 완전히 파악하여 세상에 하나뿐인 너만의 도(道)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증도의 의미다.”
“그럼 증도의 주체는 검이 되는 것이오, 아니면 내가 되는 것이오?”
“누가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소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엽현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소!”
검과 검수는 본래 하나.
굳이 구분을 지을 필요가 없던 것이다.
이검증도(以劍證道)!
이로써 엽현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오늘 그대의 한 마디는 열 권의 책을 읽은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소.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엽현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자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네 사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이냐?”
엽현이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분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소.”
“…….”
“너무 낙심하지 마시오. 일단 그의 위치를 알아내는 대로 곧장 연락을 취해 볼 테니.”
이 말에 소녀가 고개를 들고 엽현을 쳐다보았다.
“그가 날 도와주려 할까?”
“그대가 내게 가르침을 준 걸 알게 되면 반드시 도우려 할 것이오. 나도 그대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부를 설득하겠소!”
“음… 그럼 부탁 좀 하마!”
“물론이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대도 이름이 있소?”
“목생.”
목생(牧笙)!
“목생 소저…….”
이때 말끝을 흐린 엽현이 조심스레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불러도 되겠소? 물론 나보다 연배가 한참 위인 것은 알고 있으나 이렇게 젊고 어여쁜 아가씨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질 않는구려.”
“나는 상관없다. 호칭은 그저 호칭일 뿐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럼 소저도 빼고 이름만 부르겠소. 목생!”
“…….”
이때 엽현이 고개를 돌려 저승 쪽을 바라보았다.
“목생, 내가 듣기론 저승의 존재들은 이승으로 넘어올 수 없다고 들었소. 하지만 최근에…….”
엽현은 얼마 전 저승의 강자들이 오유계를 침범한 일을 풀어 놓았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목생의 눈빛이 점점 만년한빙처럼 차갑게 변해갔다.
“그 쓰레기 자식들…….”
“왜 그러시오? 그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이오?”
“흥! 그놈들 중 누군가 내 이목을 끄는 사이 몇몇 종자들이 이승으로 탈출한 일이 있었다!”
“이런! 못된 놈들! 감히 그대를 앞에 두고 그런 짓을 하다니!”
엽현이 불을 지피자 목생의 눈빛은 더욱더 살기를 띠었다.
“최근 저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목생, 그래서 말인데 나도 저승엘 한 번 들어갔다 와야 할 것 같소.”
“네가? 저승에 들어가겠다고?”
목생이 의아해하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목생이 고개를 저었다.
“네 실력으로는 위험하다.”
“알고 있소. 그러니 더욱 조심할 것이오.”
목생이 시선을 돌려 엽현과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저승에 가서 뭘 하겠다는 것이냐?”
“그대에게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 가지 물건을 찾으려 하오.”
엽현이 진지한 투로 말하자 목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냐?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렇소!”
“좋다. 그럼 가는 길에 부탁 하나만 하자.”
“무슨 부탁 말이오?”
“저승에 만주(曼珠)와 사화(沙華)라는 두 친구들이 있다. 모종의 이유로 갇혀 있는 상태인데 네가 데리고 나와 주었으면 한다.”
“안 돼!”
이때 한편에 있던 엽지명이 돌연 입을 열었다.
이에 엽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지명, 왜 그러시오?”
엽지명은 엽현을 무시한 채, 목생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변한 지 오래였다.
“저 멍청한 녀석은 그래도 네게 나쁜 의도는 없었다. 한데 넌 저 녀석을 사지로 보낼 셈이냐?”
이 말에 엽현은 목생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이때 목생이 엽지명을 향해 말했다.
“너희가 저승으로 가려면 어차피 내 도움이 필요하다. 비록 녀석에게 조금의 인과가 묻긴 하겠지만, 배후에 저리도 강한 자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느냐?”
이 말을 듣자 엽현의 입가가 실룩였다.
상대는 이미 청삼남이 자신의 사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엽현으로서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
이때 엽지명이 엽현을 향해 돌아섰다.
“거절해라. 이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엽 소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오? 설명을 좀 해 주시오.”
“저 여자가 말하는 두 친구란 사실 저승의 사악한 요물인 피안화(彼岸花)를 뜻하는 것이다. 너는 물론이고 저승의 강자들조차 감히 어쩌지 못하는 존재들이란 말이다!”
“사악? 그래 봐야 액난지인보다 더 사악하겠소?”
“…….”
엽지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피안화가 아무리 지독해 봐야 액난지인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때 엽현이 목생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목생,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겠소. 하지만 나도 작은 부탁이 있소.”
이에 목생이 물끄러미 엽현을 쳐다보았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직접 가길 원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떠나는 순간 이승과 저승은 경계를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양쪽 세계에 큰 혼란이 찾아오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너처럼 건실한 아이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목생, 솔직히 말하면 나도 무섭소. 하지만 나 엽현은 은혜를 아는 남자, 그대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소!”
순간 목생의 눈빛이 감동으로 젖어 들었다.
“너란 남자는 정말… 어쩜 이리도 착할 수가!”
목생은 진심으로 엽현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반면, 이 상황을 꿰뚫고 있는 엽지명은 몰래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이때 목생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막상 네게 시키려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말을 마친 목생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품 안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돌 하나를 꺼내 엽현에게 건넸다.
“이건 내계석(乃界石)이라는 것이다. 내 힘을 담아 놓은 것으로 일회에 한해 결계를 펼칠 수 있다. 위기 시에 사용한다면 상대가 설령 지옥의 왕이라 할지라도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엽현은 빠르게 내계석을 받아 들었다.
“고맙소!”
이때 목생이 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줄기의 묵광이 엽현과 엽지명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체내로 들어간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모습만 보이지 않게 된 것일 뿐,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것으로 너희들의 육신과 생기는 완전히 숨겨졌다. 설령 저승 한복판을 활보하더라도 너희가 이승에서 온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도록 하거라.”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목생, 돌아와서 보도록 합시다!”
“만약 안 되겠거든 주저하지 말고 도망치도록 해라!”
이 말에 씩 웃어 보인 엽현은 가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엽지명의 팔을 붙잡고 돌아섰다. 몇 걸음 나아가던 엽현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목생을 돌아보았다.
“목생, 그대의 친구들을 반드시 구한다는 보장은 없소. 그래도 최선을 다 할 것이오. 그리고…….”
이다음부터는 전음을 사용한 대화가 오갔다.
목생은 잠시 엽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들이겠다.”
이에 엽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엽지명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목생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응시하며 한동안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방금 전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