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297
1297화 아니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소?
도정.
대전 앞,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의 앞에 도포(道袍) 차림의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눈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검기라니…….”
이때 정신을 차린 여인이 노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신군(神君), 상대의 위치를 확인했소?”
신군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꽤나 멀리에서 공격한 것 같습니다.”
“크윽… 죽이시오. 그게 누구든 간에 찾아내서 찢어 죽이시오!”
여인의 노기 어린 음성이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먼저 흰 수염 노인의 주검을 수습한 신군은 고개를 들어 성공 깊숙한 곳을 응시했다.
“도조(道祖)께서 폐관하시니 별의별 하루살이들이 판을 치는구나. 육공주(六公主), 도조께서 출관하실 때까지 이곳에서 안전하게 계십시오. 저는 가서 흉수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순간, 신군의 모습은 이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육공주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서야 자신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때 문득 뭔가 떠오른 육공주가 갑자기 표정을 흉악하게 구겼다.
“건방진… 일개 하룻강아지 주제에 감히 내 저주를 깨뜨려? 용서할 수 없어…….”
* * *
저승.
피안화 앞, 엽지명이 멍하니 서 있는 엽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괜찮은 게냐?”
이 말에 엽현이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이거… 너무 괜찮아서 오히려 이상한데?”
“…….”
“지명, 그 저주가 내게 영향을 끼칠 것 같소?”
엽지명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없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있다손 쳐도 영향이 클 것 같지는 않다. 그 저주는 혈맥을 겨냥한 것인데, 네 혈맥이 어디 보통 혈맥이더냐? 아무리 봐도 치명적인 결과로는 이어지는 것은 어려울 듯싶다.”
이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선 몸에 아무런 징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고작 저주 따위가 자신의 변태 같은 혈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바로 이때, 피안화가 가볍게 몸을 떨더니, 또 한 명의 여인이 만주의 곁에 나타났다.
연녹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만주와 닮아 있었다.
엽현은 이 여인이 사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만주와 사화 두 여인은 곧장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부둥켜안은 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보자, 엽현과 엽지명 역시 시선을 마주치며 뭉클한 감정을 교환했다.
어느 절대 강자의 이유 없는 심통에 두 여인은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해야 했던가!
한참 후, 서로를 떼어 낸 두 여인은 엽현과 엽지명 앞으로 다가오더니 동시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엽현이 황망히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에헤이, 이러지들 마시오. 내가 무슨 큰일을 했다고 이러시오!”
“하지만 공자, 그대는 우리를 위해…….”
엽현이 웃으며 만주의 말을 낚아챘다.
“고마워할 것 없소. 아까 말했듯이 그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거니와, 목생과 한 약속이 있어 그대들을 돕게 된 것이오. 그러니 너무 예 차릴 것 없소.”
하지만 만주는 기어코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어쨌거나 우리를 구해 준 것은 사실이오. 그대에게서 받은 은혜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절대로 잊지 않겠소!”
“하하!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고 일단 어디로든 떠나도록 하시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부디 행복하게 사시오. 그러다 혹시 인연이 닿거든 다시 만납시다!”
“공자…….”
이때 만주와 사화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앞으로 다가와 동시에 엽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두 여인은 얼어있는 엽현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엽현이 황당하다는 듯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것은 소위 ‘피안의 입맞춤’이란 것이다. 두 여인이 네게 축복을 내린 것이지.”
“축복? 그럼 이후로 내게 큰 행운이 찾아온다거나 뭐 그런 것이오?”
엽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피안의 입맞춤이 행운을 불러오는지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어쩌면 그것과는 별개로 단순히 너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
“호감? 저 여인들… 동성애인 것 아니었소?”
“그야 모르지. 그사이에 바뀌었을 수도.”
“…….”
“그나저나 목생과는 무슨 거래를 한 것이냐?”
엽지명이 화제를 전환하자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오. 소소한 대가를 받기로 했소.”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론적으로 손해를 본 셈이다. 어느 초절정 강자와 적이 된 것은 네 앞길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테니까.”
“하하, 그녀와의 거래가 아니었더라도 도와주려 했을 것이오. 그대도 그랬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엽지명이 무심하게 대꾸하자 엽현이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다고? 그럼 피안화의 몸속에서 저주를 강제로 꺼낸 것은 어디의 누구셨더라?”
“그 정도는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그 존재’의 미움을 산 것은 너지 내가 아니니까.”
“하하하! 실컷 미워하라고 하시오! 누가 무서워할까 봐?”
엽지명은 자신감 있게 웃어젖히는 엽현을 보자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만 가자!”
두 사람은 곧 피안도 너머로 전진했다.
목표는 도경이니만큼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 후.
황천길이 끊어지고 한 줄기 강이 나타났다. 바다라 불러도 될 정도로 거대한 강은 혈황색(血黃色)을 띠고 있었는데, 강물 위에는 흉측한 악귀들과 벌레들이 한데 엉켜 떠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강 전체에서 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고, 원혼들의 괴성이 고막을 후벼 파니 마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 광경을 앞에 둔 엽현의 표정도 경악으로 물든 상태였다.
‘이게 도대체 뭐지?’
엽현의 궁금증을 알고 있다는 듯 엽지명이 말했다.
“망천하(忘川河)다. 저기 있는 다리를 보았느냐?”
엽현이 고개를 드니 강 위쪽에 다리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의 다리지만, 특이하게도 세 개의 층으로 분리된 모습이었다.
“나하교(奈何橋)라 하는 것이다. 예전에 도석은 나하교 곁에서 세 가지 종류의 영혼을 판별하는 역할을 했다. 삼생석(三生石)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하지만 이제 삼생석이 없으니 그 곁을 지키던 맹파(孟婆)도 보이지 않는구나.”
엽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삼생이 이곳에 있었다고?”
“그래. 엄밀히 말하면 탈출할 때까지 이곳에 봉인돼 있던 것이지.”
“어쩐지! 그녀가 여길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소!”
엽현의 시선은 다시 망천하로 고정됐다. 불그스름한 강물에서는 여전히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영혼들은 뭐요?”
“망천하를 건너지 못해 오갈 곳이 없게 된 망령들이지.”
“…….”
“혹시라도 구할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왜 안 된단 말이오?”
엽지명은 손을 들어 나하교를 가리켰다.
“네가 보듯이 나하교는 총 삼층으로 되어 있다. 삼층은 착한 영혼들을 위해, 이 층은 선도 악도 아니었던 자들을 위해, 마지막 가장 아래 있는 다리는 악인을 위한 다리다. 그중에서도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은 아예 다리를 건널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강물에 던져지게 되는데, 혹시라도 망천하에 의해 죄가 씻겨진다면 강을 거슬러 피안에 도달할 수 있고, 윤회대전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엽지명의 시선은 망천하를 떠도는 망령들로 향했다.
“네 눈에 저들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 씻을 죄가 무겁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움을 주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한 사람의 기준이 무엇이오?”
엽현이 진중한 표정으로 묻자 엽지명이 웃으며 대꾸했다.
“예전 기준에 따르면 생전에 선행과 덕행을 쌓은 자를 선인이라 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 선인이라 할 수 있겠지.”
“음… 그런 기준이라면 나도 선인은 못 되겠구려?”
“나한테 물어본들 어찌 알겠느냐?”
“하하…….”
엽현은 웃는 얼굴로 나하교를 쳐다보았다.
“지명. 솔직히 말해서 대도가 건재하던 시절의 세상이 궁금하오.”
이 말에 엽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종종 하는 행동들은 예전이라면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들기 충분한 죄악이니까. 게다가 대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 여기에 불공정한 처사가 스며들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훗날 왜 그리 많은 자가 대도에 반기를 들었는지 아느냐? 그건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이 매우 불공평했기 때문이었다. 대도가 아무리 공평해도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
“흠… 무슨 말인지 알겠소.”
엽지명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상이 불공평하다 여겨지면 언제나 반항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수많은 강자가 궐기했고, 그렇게 조금씩 파도(破道)가 진행된 결과 지금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지. 현재는 강자만이 존재의 시대다. 강한 자의 한 마디에 흑이 백도 뒤바뀐다. 선악 역시 마찬가지. 선한 일을 했다 해서 선과를 받을 수 없고, 어떤 경우는 악인의 삶이 더 윤택하기도 하지. 심지어 착하다는 말은 종종 조롱으로까지 여겨지지 않더냐?”
엽지명의 입가에 문득 냉소가 스치듯 지나쳤다.
“사람은 힘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네가 착하다 해서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단 말이지. 반면 돈이 있는 자는 악행도 선행으로 포장할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란 말이냐?”
“…….”
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은 사람?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게 잘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면 그뿐.
간단히 말해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만사가 그리 복잡할 일은 없지 않은가?
이때 엽현이 생각을 멈추고 눈앞의 나하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리를 지킨다는 맹파는 어떤 사람이오?”
“그녀는…….”
엽지명이 대답하려는 이때, 나하교 위에 돌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파가 나타났다. 다리 위의 노파는 불 위에 솥을 올리고서 뭔가를 끓이는 중이었다.
이를 보자 엽현은 당황해서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맹파는 이미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지금 그게 문제더냐? 십만 년 전에 사라졌던 노파가 너 하나 때문에 다시 나타나서 죽을 끓이고 있지 않느냐?”
“…….”
“뭐 해? 어서 가서 뜨끈한 죽 한 그릇 든든하게 얻어먹고 오너라.”
이 말에 엽현의 입가가 실룩였다.
눈앞의 노파는 누가 봐도 자신 때문에 등장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솥 안에 있는 것이 과연 뜨끈하고 든든한 죽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