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03
1303화 그리운 청성
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돌연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가만… 혹시 나도 이곳의 사기와 음기를 몽땅 흡수할 수 있다면…….”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네가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저승의 강자들이 죄다 몰려올 테니까. 그들이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거로 생각하느냐?”
“음… 그대 말이 맞소.”
이때 엽지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엽현을 응시했다.
“지금 느낀 건데, 너는 저승의 환경에 특화돼 있구나. 우선 진혼이라는 저 검은 영혼체에 상극이고, 너 역시 음기와 사기를 흡수해 힘으로 전환할 수 있으니, 둔일경 정도 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네 상대가 안 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천신급 강자가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겠지만.”
엽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처음 저승에 들어왔을 때부터 음기와 사기를 흡수하고 싶었다. 이 정도 양의 기운을 흡수한다면 증도경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엽지명의 말대로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엽현과 엽지명은 곧 계옥탑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각될 염려가 있기에 비행은 자제하기로 했다.
얼마 후, 내하교를 건너 반대쪽에 도착한 엽현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구리거울 하나를 발견했다.
“지명, 저것 좀 보시오. 딱 보니 무슨 골동품 같지 않소?”
“골동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건 망향대(望鄉台)다.”
“망향대?”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불계(佛界)의 어느 고승이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망향대 앞에 서면 가족이나 지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한번을 마지막으로 전생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지.”
이 말을 듣자 엽현은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사실이오?”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도 예전처럼 작동하는지는 모르겠구나.”
“되나 안 되나 한번 해 봐도 되겠소?”
엽현이 허락을 구하듯 쳐다보자 엽지명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헤헤, 그럼 어디 한번!”
엽현은 다소 흥분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거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엽현이 실망한 듯 엽지명을 돌아보았다.
“이거 고장 난 것 같소.”
“불법지력을 사용해 보거라.”
“불법지력?”
엽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거울을 보고 섰다.
뒤이어 그의 전신에서 불법지력이 은은하게 흘러나온 순간, 거울이 돌연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일련의 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거울 속 화면을 확인하자 엽현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청성!
화면 속에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청성의 엽가였던 것이다.
거울이 비추는 시점은 현재인 듯했는데, 이때의 엽가는 집안 전체에 거미줄이 가득했고, 사람도 수십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삭막한 모습이었다.
이때 엽현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오래전, 그토록 엽현을 업신여기고 괴롭혔던 대장로였다.
대장로는 한눈에 봐도 거동이 매우 불편해 보였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이때, 마당을 향해 멍하니 앉아 있던 대장로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이때 화면 밖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또 여기서 넋 놓고 있는 것 좀 보소! 얼래? 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밥 처먹기 싫어?”
이 말에 대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비질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쪽에서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저 망할 영감탱이가 엽현을 쫓아내지만 않았어도 우리 엽가가 이렇게까지 몰락하진 않았을 텐데…….”
“그러게 누가 아니래? 저런 놈들은 꼭 욕을 많이 처먹어서 그런지 잘 죽지도 않더라고. 퉤!”
거울 앞의 엽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엽가?
이미 기억도 희미해진 옛날 일이 아닌가!
엽현이 옛 기억을 겨우 끄집어내려는 이때, 거울은 이미 어느 황궁을 비추고 있었다. 엽현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대전 입구에서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여인을 발견한 순간,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곤룡포로도 감출 수 없는 육감적인 몸매의 주인.
그녀와의 뜨거웠던 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때 여인이 품을 뒤적이더니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작은 나무 인형으로, 엽현의 얼굴과 똑 닮은 것이었다.
여인은 인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콧잔등을 튕겼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다니, 나쁜 놈…….”
다시 인형을 갈무리한 여인은 그대로 대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망향대 밑에서 엽현을 지켜보고 있던 엽지명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엽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매우 재밌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 후, 거울의 진동이 잦아들더니 화면 속에 보이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엽현은 한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더니, 고개를 돌려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지명, 그대도 한번 해 보겠소?”
“내 내력을 훔쳐보려고?”
“하하, 들켰군. 그렇소!”
잠시 고민하던 엽지명은 결국 망향대 위로 올라갔다.
엽현이 불법지력을 흘려보내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거울이 가볍게 떨리더니 곧 어떤 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엽지명은 거울을 향해 가만히 서 있을 뿐, 어떤 표정의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거울 속 화면에 거대한 연못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몇 개의 거대한 산 아래 둘러싸인 연못은 마치 사람이 입을 쫙 벌린 듯한 모습이었는데, 아직 화면이 흐릿하여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연못 깊숙한 곳으로부터 천둥과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누가 감히 대연(大淵)을 엿보는 것이냐!”
음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줄기 강대한 힘이 하늘로 솟구쳤다.
쾅-!
강한 충격과 함께 거울 속의 화면이 뚝 끊기고 말았다.
대연!?
엽현이 몹시 궁금한 얼굴로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지명, 그대가 온 곳이 대연이라는 곳이오?”
“그렇다.”
“그게 어떤 곳이오?”
엽현의 질문에 엽지명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좋은 곳은 아니다.”
“…….”
“가자,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다.”
엽지명이 발길을 옮기자, 엽현이 그 뒤를 황급히 쫓았다.
“저승과 비교하면 어떻소? 음… 그곳 강자들의 실력 말이오.”
“저승이 건재했을 땐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대연이 더 강하단 소리요?”
엽지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불조와 ‘그 존재’가 관여하지 않았을 때를 전제로 말이다. 그 두 사람이 개입하게 되면 현존하는 최강의 세력 셋을 제외하고는 감히 저승을 넘볼 세력은 전무하다. 물론… 너 같이 겁을 상실한 금수저는 빼고.”
“…….”
“얼굴을 보아하니 불조와 그 존재에 대해 물어보려는 것이겠지?”
“헤헤, 어떻게 알았소?”
엽지명은 엽현을 한 번 흘겨본 후 설명했다.
“여기서 말한 불조란 남장보살(南藏菩薩)을 뜻한다. 불계 내에서 실력과 명성이 자자한 존재지. 당시 그는 성불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째서 말이오?”
“그건 그가 한 맹세 때문이었다. 지옥의 악귀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자신 역시 성불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지.”
이 말을 듣자 엽현은 다소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꽤 어려운 일 아니오?”
엽지명 또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불가능에 가깝지. 특히나 대도가 붕괴된 후로 악귀의 수는 줄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상태다.”
“아…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극락지계를 멸망시키지 않았소? 혹시 그 남장보살이란 자가 화가 나서 찾아오면 어떡하오?”
“후후, 난들 알겠느냐?”
순간 엽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자가 그렇게나 강하오?”
“물론! 이미 수만 년 전에 증도를 이룬 강자다. 거기에 삼천대도 중 삼십 위 안에 드는 초도대도(超度大道)의 수호자이기도 하지. 그 실력은 천신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역대 저승의 주인들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는 게 관행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지명… 그렇게 이야기하니 오싹한 기분이 드는구려.”
“하하하! 겁먹을 게 뭐 있느냐? 너의 그 천하무적 검으로 단칼에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
엽지명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엽현이 재빨리 옆에 따라붙었다.
“지명,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또 누구요?”
이때 엽지명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파도(破道) 한 것을 후회하여 스스로 지옥 십팔 층에 자신을 가두고 불멸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이.”
엽지명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엽현은 기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가다니. 그 정도로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소!”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자기혐오가 극에 달한 인물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소?”
엽현의 물음에 엽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정체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신비인이 지옥에서도 금단의 구역이라는 십팔 층에 갇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 저승의 주인이란 자는 어떻소? 그자는 얼마나 강한 것이오?”
“그것도 알 수 없다. 역대 저승의 주인들은 모두 비밀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주인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왜 그리 비밀이 많은 것이오?”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
“다만 막념이 저승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지만.”
“지명, 그대조차 막념 누님의 진짜 실력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오?”
엽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말하느냐? 전혀 읽을 수가 없다고!”
이에 엽현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맞소. 게다가 약한 척도 잘하고.”
약한 척!
이 말에 엽지명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확실히 막념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실력을 전혀 과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어느 산봉우리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음기가 가득 느껴지는 봉우리는 보기만 해도 으스스했고, 이따금 귀신의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지명, 이건 또 무엇이오?”
숲속을 들여다보던 엽지명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했다.
“이곳은… 말로만 듣던 악구령(惡狗嶺)이 틀림없다.”
“악구령?”
엽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대기근 시절에 존재했던 악구령(惡狗嶺)이 있는 곳이다. 심성이 포악한 악구령은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혼을 잡아먹을 때는 한 번에 숨통을 끊는 법이 없고, 조금씩 갉아 먹으면서 먹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긴다고 한다.”
순간 엽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혼이라면 뭐든지 잡아먹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