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08
1308화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겠죠?
반나절이 지난 후.
엽현이 윤회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는 가뿐해 보였다.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만연한 상태였다.
이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엽지명과 아음이 엽현 앞으로 다가왔다.
“성공했느냐?”
아음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했소!”
“하하, 축하한다! 두 개의 신기를 가진 자는 도정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거늘!”
“모두 그대 덕분이오. 고맙소!”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한데 아음 낭자, 종종 도정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던데 도대체 도정은 어떤 세력이오?”
“후후, 쉽게 설명하자면 대도 수호자들의 집단이라 보면 된다.”
“수호자? 그럼 나도 도정의 사람이 된 것이오?”
이에 아음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론상으로 따진다면 그렇겠지만, 진정한 도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책봉’이란 걸 받아야 한다. 참, 듣자 하니 나하교에서 피안화를 도와주었다는데 사실이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음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그렇다면 도정에 들기는 쉽지 않겠구나.”
“어째서 말이오? 그들에게 저주를 걸었던 여자 때문이오?”
“하하, 그녀는 ‘보통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신분은 도정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그녀에게 밉보인 이상 책봉을 받는 일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대는 혹시 그 여자가 피안화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소?”
아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를 보자 엽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만약 도정의 인물들이 모두 그런 식이라면 굳이 그 멍청한 집단에 들어갈 이유가 없소!”
“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집단이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한 단면만 보고 도정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하하, 그럼 그대가 한번 말해 보시오. 그 여자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데 왜 아무도 만류하지 않았던 것이오?”
아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같으면 고작 꽃 한 송이 때문에 지체 높은 인물과 싸우려 하겠느냐?”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소!”
“이미 늦었다. 몰랐다고 해서 악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 아음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엽현이 물었다.
“아음 소저, 그대도 호도자의 한 사람이오?”
아음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다만 나 역시 도정의 사람이다.”
도정!
심각하게 고민하던 엽현이 불현듯 정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일단 이곳을 떠납시다.”
하마터면 진짜 목적인 황천성수를 깜빡할 뻔한 엽현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말없이 이동하던 중, 아음이 손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앞으로 백리 정도 가면 연화성대(蓮花聖台)가 나온다.”
“연화성대?”
엽현이 호기심을 보이자 엽지명이 설명했다.
“남장보살의 도량(道場)이다. 그가 직접 머물면서 영혼들을 제도하던 곳이지.”
남장보살!
그의 이름을 듣자 엽현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기… 달리 돌아가는 길은 없소?”
“하하하! 듣자하니 네가 극락지계를 멸망시켰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하하… 잘 알고 있구려.”
이때 아음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는 길은 금계산(金雞山)을 넘는 것뿐인데, 그건 몇 배나 더 오래 걸린다.”
“그래도…….”
“하하, 걱정할 필요 없다. 남장보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연화성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어째서 말이오?”
“윤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서 저승으로 유입되는 영혼의 수도 크게 줄었다. 때문에 남장보살 역시 영혼들을 제도하러 나올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 그러니 그와 마주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아음은 문득 회상에 잠겼다.
“예전에는 남장보살을 한 번 보기 위해 영혼들이 여기서부터 줄을 서 있었다. 그의 계도를 통과하면 가벼운 죄 정도는 사라지고 선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 게다가 환생했을 때 평안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아음의 말을 들은 엽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로 지나쳐 가도록 합시다.”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설마 남장보살이 나타날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계속 전진한 세 사람은 어느덧 연화성대 앞에 도착했다.
연꽃을 쌓아 올린 제단은 지면으로부터 대략 아홉 장 높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 주변으로는 방석이 놓여 있었는데, 이미 먼지가 두껍게 깔린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연화성대 주변에도 군데군데 거미줄이 걸려 있는 것이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엽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찬가지로 황량함이 가득할 뿐이었다.
“오래전 이곳은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저승의 성지였다. 한데 지금은…….”
말하는 아음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잠시 연화성대를 응시하던 엽현이 시선을 돌렸다.
“슬슬 이동합시다.”
아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막 떠나려는 그 때!
연화성대 중앙에서 갑자기 한 줄기 불광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를 본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엽현의 안색 역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제기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렇게나 재수가 없단 말인가!’
엽현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연화성대 위에 금색 가사를 입은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승려의 등 뒤편에선 은은한 불광까지 물결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남장보살이었다.
순간 엽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승려는 마치 광활한 우주처럼 그 기운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만약 극락지계를 멸망시킬 죄를 물으려 한다면 반항조차 하지 못하리라!
엽지명의 표정 역시 크게 어두워져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나타나다니… 엽현이 이렇게나 재수가 없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연꽃에 거미줄이 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남장보살이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대 우연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아음은 아무 말 없이 남장보살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때 엽현을 응시하던 남장보살의 눈빛에 기이한 기색이 흘렀다.
“액난지인…….”
이때 엽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망쳐 볼까? 아니면 늘 그래 왔듯이 환심을 사야 하나?’
하지만 눈앞의 승려에게는 둘 중 어느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때, 아음이 남장보살을 향해 합장하며 아는 체를 했다.
“남장!”
그제야 아음을 발견한 남장보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도 와 있었구려. 한데…….”
잠시 말을 끊고 아음을 바라보던 남장보살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굳이 묻지는 않겠소.”
아음은 말없이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남장보살의 시선은 다시 엽현에게로 향했다.
“영명견성이라… 너는 불가의 제자로구나?”
“하하,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음… 내가 듣기로 극락지계가 한 청년의 손에 멸망했다던데, 혹시 자네의 짓이었나?”
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일이 맞습니다.”
“허허, 왜 그래야만 했는고?”
“극락지계가 저를 죽이고 서옥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자 남장보살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탐심이 들었던 게로구나.”
남장보살이 고개를 들어 다시 엽현을 바라보았다.
“네 몸에서 무망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보아하니 도경뿐만 아니라, 불법의 전승까지 네게 전해 준 것이로구나.”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때 남장보살이 엽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이에 엽현이 잠시 고민 끝에 대답했다.
“경전에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극락지계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푸훕-!”
이때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엽지명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어도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곁에 있던 아음 역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극락지계를 멸망시켜놓고 없던 일로 하자니…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당사자인 남장보살은 엽현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수많은 망령을 상대해 온 그에게도 이런 당돌한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때 엽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남장보살, 불가에서는 공평과 공명을 중시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남장보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당시 극락지계가 아무 죄 없는 저를 죽이려 했을 때 보살께서는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이에 남장보살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이승의 일에 손을 뗀지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엽현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도 제게 책임을 묻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흠… 그것이 아니더라도 너는 이미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래서 너를 제도 하려는 것이다.”
제도!?
엽현이 황급히 주제를 바꿨다.
“남장보살, 혹시 나하교 근처에 있는 피안화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피안화? 물론 알고 있지.”
남장보살이 고개를 끄덕이자 엽현이 웃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녀들은 아무 죄도 없이 무수한 세월 동안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남장보살께서는 두 사람을 괴롭힌 여인은 왜 제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순간 남장보살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하,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리지요. 사실 그녀의 실력이 고강하고 신분이 높아 제도는커녕 피안화를 보호해 줄 수도 없던 것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남장은 엽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불가에서는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한데 여기에서의 자비란 사람을 봐 가면서 하는 것입니까?”
“후…….”
남장보살의 입에서 드디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엽현의 말에서 틀린 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아음이 그만하라는 듯 엽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엽현은 오히려 목소리를 키웠다.
“남장보살, 지옥에 죄인이 남아 있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아쉽게도 지옥은 단 한 번도 빈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실, 문제는 지옥이 아니라 이승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파도자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 아닙니까? 불평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반항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극락지계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은 불법을 추구한다면서 죄 없는 저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보살께서는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때 엽현이 자꾸만 자신의 소매를 끌어당기는 아음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거 놓으시오! 아직 작업을 좀 더 해야 하니까. 아, 아니… 할 말이 남았으니까!”
엽현은 다시 남장보살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부처님 말씀에 만민은 평등하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 점을 지적하자 내게 불법을 전해 준 대사 역시 이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남장보살께서는 어째서…….”
이때 아음이 엽현의 손을 낚아채더니 소리쳤다.
“이 멍청아! 제도라는 말은 네 몸에 붙은 악한 인과를 정화하는 의식이다! 남장보살 같은 고승이 직접 제도를 해주겠다는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왜 자꾸 논쟁을 펼치려는 게냐!”
“의식?”
“그래!”
엽현이 당황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제도란 게 먼지 나게 패버리겠다는 말이 아니었소?”
순간 아음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누가 제도를 그런 뜻으로 쓴단 말이냐! 제도중생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남장보살은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려는 거란 말이다!”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왜 지금…”
“말하려 했는데 네가 못하게 했잖느냐!”
“…….”
이에 엽현이 엉거주춤 아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어쩌면 좋소. 지금에 와서 해달라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