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26
1326화 누나의 의무다
잠시 후.
엽현과 육사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진 산맥이었다. 그리고 이 산맥 깊숙한 곳에 몇 개의 건물이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엽현은 이곳에서 검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검의가!
“육이, 저곳이 검종입니까?”
“아마도 사형 중 한 명이 세운 곳일 것이다. 가까이 가 보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산문으로 보이는 곳 앞에 도착했다. 산문 위에는 거대한 현판이 달려있었는데, 힘 있는 필체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종(劍宗).
검으로 쓴 것 같은 글자는 유려하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필시 보통 검수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산문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자갈이 깔린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 양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하니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했다.
“매우 썰렁하군요.”
주변을 둘러보던 육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보아하니 오래전에 멸문한 듯하구나.”
“…….”
전투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침략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자연스레 전승이 끊겼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곳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곧, 두 사람은 어느 한 대전 앞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대전 앞에는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어김없이 청삼남을 조각해 놓은 것이었다. 물론 청삼남의 어깨 위에는 언제나처럼 하얀 아이가 걸터앉아 있었다.
엽현은 곧장 소령을 소환해 냈다.
소령은 마치 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조각상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엽현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없단 말인가?”
“어쩌면 조사는 이곳에 온 적이 없는가 보구나.”
엽현은 풀이 죽어 있는 소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상심하지마. 언젠가는 그 아이와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웅…….”
“자 그럼 육이, 다른 곳으로 가 보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들이 막 떠나려는 이때, 등 뒤의 대전으로부터 날카로운 검명이 울려 퍼졌다.
자리에 우뚝 선 두 사람.
이때 엽현의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기운… 혹시 종주?”
상대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종주!
순간 엽현과 육이가 시선을 마주쳤다.
“들어가 보자꾸나.”
“가시지요.”
잠시 후, 건물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대전 중앙에 둥둥 떠 있는 검 한 자루를 불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음성은 이 검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바로 이때,
“너는… 종주가 아니로구나!”
엽현이 잔뜩 경계한 채 검을 향해 대꾸했다.
“그대는 누구시오?”
“너의 그 혈맥은…….”
이때 육이가 소리쳤다.
“누군지 정체부터 밝히시오!”
그러자 검이 가볍게 진동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육이의 시선이 곧장 중년인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자로군.”
검종의 무인이라면 그녀가 모를 리 없다. 물론 예외가 없진 않지만.
이때 중년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의 종주요. 그러는 그대들은 누구시오?”
“종주? 그럼 조사는 누구지?”
“조사?”
“검종을 처음 이곳에 세운 사람 말이다.”
중년인은 그제야 육이의 말을 알아들었다.
“청운(聽雲) 조사를 말하는 것이오?”
“청운!”
이 이름을 듣자 육이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어쩐지… 그녀가 이곳을 세운 것이었구나.”
“육이, 그게 누굽니까?”
엽현이 의아해하며 묻자 육이가 설명했다.
“그녀는 조사를 제외하면 검종 최강의 검수로 꼽힌다. 자질 역시 검종 역사상 최고였지. 그런데…”
육이가 문득 중년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곳 검종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이냐?”
이 물음에 중년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그 물건 때문이었소.”
“물건?”
육이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이곳엔 검경(劍經)이라는 성물이 있었소. 조사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었소. 그런데 조사께서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정이……”
“도정? 도정에게 검경을 뺏긴 것이냐?”
중년인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정은 처음부터 검경에 눈독을 들여왔었소. 단지 조사께서 버티고 계시니 감히 어쩌지 못하다가, 그분께서 자리를 비우신 걸 알아차리자마자 마수를 드러냈던 것이오.”
육이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감히 검종의 신물을 노려? 놈들이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다더냐?”
“후… 다 내가 무능했던 탓이오. 청운조사께서 계셨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이르진 않았을 텐데…….”
“청운은 어디 있느냐?”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지 못하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없으셨소.”
“흠… 그 지지배가 갔을 곳이야 뻔하지. ‘그’를 찾으러 간 게 분명하다!”
지지배!
순간 육이를 보는 중년인의 눈빛이 크게 바뀌었다.
“종주를 지지배라 부르다니… 그대는 도대체 누구시오?”
“나는…….”
이때 엽현이 황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분은 육사제라고, 그대와 마찬가지로 검종의 제자요.”
“뭐? 그대 역시 검종 사람이었소?”
육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보자 중년인이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원래 동문이었구려! 미처 몰라봤소이다!”
이때 육이가 손을 들어 청삼남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이곳에 온 적이 있느냐?”
“있었소! 당시 청운 사조를 찾아왔던 것으로 기억하오!”
“그래? 혹시 뭔가 남기고 간 것이 없느냐?”
중년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기로 그런 것은 없었소.”
“그래… 없단 말이지…….”
“하하! 육이, 여기 없으면 됐습니다.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을…….”
바로 이때, 중년인이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런데 그분 말고 같이 왔던 하얀 아이가 무슨 상자 하나를 두고 가긴 했었소.”
상자!
엽현과 육이가 동시에 눈을 부릅뜨고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 상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중년인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뒤쪽에 놓여 있던 탁자를 가리켰다.
그곳엔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저것이오. 조사께서 하얀 아이에게서 받은 선물이니 잘 간직하라 하셔서 지금까지 손도 대지 않고 지켜왔소.”
이 말에 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검종이 멸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상자를 열지 않았단 말이오?”
중년인이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때 중년인이 문득 궁금한 얼굴로 상자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상자 안에 뭐 쓸 만한 물건이라도 들어있소?”
‘맙소사!’
엽현과 육이는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간직하랬다고 정말로 ‘간직’만 하다니, 이렇게 순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육이가 한숨을 쉬며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도정이 쳐들어 왔을 당시, 상자를 열어보았더라면 멸문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중년인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알기로 그 하얀 아이는 그렇게 강하지 않은 걸로…….”
육이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분명 강하지 않다. 다만 주변에 강한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을 뿐이지.”
강한 친구들!
모두들 배후가 가장 많은 것은 엽현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하얀 아이, 소백을 지키려는 자들은 전 우주에 걸쳐 셀 수 없을 만큼 존재했다. 소백을 건드린다는 것은 즉, 전 우주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정을 알게 되자, 중년인의 눈가에 아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니… 우리는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 줄 전혀 몰랐소.”
이때 엽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혹시 저 상자를 우리에게 줄 수 있겠소? 쓸 데가 있어서 말이오. 헤헤…….”
육이가 감탄한 기색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과연, 자연스럽게 뭔가를 요구하는 데에는 엽현 만한 선수가 없었다.
다행히 중년인은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었다.
“하하,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쓸모도 없으니 그대들이 가져가시오. 그런데 젊은이, 그대의 정체는…….”
바로 이때, 육이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여기 있는 상자는 저것 하나뿐인 게냐?”
중년인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하나뿐이오.”
육이가 엽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저거라도 가져가자꾸나.”
엽현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이미 육신도 없이 한 줌의 영혼만 남은 상태요. 어찌, 계속 이렇게 구천을 떠도는 게 좋겠소? 아니면 윤회해서 새 삶을 이어가고 싶소?”
“하하, 윤회고 뭐고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소. 그저 이렇게 있다가 소멸하게 놔두시오.”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인지상정이란 게 있지, 그렇게는 어렵겠구려. 내가 윤회할 수 있게 도와주겠소.”
말을 마친 엽현이 손을 펼치자, 신기지인이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잠시 후, 신기지인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세 사람 앞에 윤회의 통로를 만들어냈다.
이를 본 순간, 중년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 그… 그대는 대도 수호자였구려!”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뭐, 정상적인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그런 셈이오. 그럼 부디 좋은 생으로 태어나길 빌겠소.”
중년인은 엽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고맙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이 말을 끝으로 중년인은 윤회의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통로 안으로 사라지자, 윤회통로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엽현의 시선은 곧 탁자 위의 작은 상자로 향했다.
“아마도 그 아이의 분신이 들어있지 않겠습니까?”
육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이때, 소령이 갑자기 후다닥 달려가더니, 상자를 와락 끌어 앉았다.
이에 엽현이 웃으며 물었다.
“소령아,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겠어?”
잠시 고민하던 소령은 상자를 꼭 끌어안고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 가르쳐 줄래!”
이 대답에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저 상자를 어디에 활용하려는 게냐?”
“헤헤, 두고 보시면 압니다. 도정에게는 엄청난 선물이 될 겁니다! 그나저나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로군요.”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막 대전을 떠나려는 이때, 엽현이 갑자기 육이의 어깨를 붙잡더니 강제로 계옥탑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때, 육이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대전 밖의 하늘이 쩍 갈라지면서 한 자루 창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시뻘건 화염을 품은 창은 지면에 닿지도 않았는데 검종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때 엽현이 냉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 한 자루 검이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쾅-!
천지가 진동하는 충격과 함께 허공에 거대한 흑동 하나가 만들어졌다.
바로 이때, 한 남자가 엽현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칠척장신에 다부진 체구를 지닌 남자는 자줏빛이 감도는 황금 전포(戰袍)를 입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는 사람을 위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손에는 얼핏 보면 창을 닮은 극(戟)을 들고 있었다. 길이는 사람의 키만 했고, 손잡이 부분은 용암을 사용하여 만든 듯 붉게 번뜩였으며, 날카로운 극 부분은 사람의 심지를 뒤흔들어버릴 듯한 포악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공중에 꼿꼿이 서서 오만한 눈으로 엽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청객의 등장에 엽현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도정인가?”
이때 공중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도정 사대신장 중 하나인 현옹(玄雍)이다. 오늘은 특별히 네 수급을 취하러 왔으니 얌전히 목을 내밀거라.”
순간 엽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네가 여기 왔다는 것은… 막념 누님에게도 이미 사람이 갔다는 것이겠지?”
* * *
오유계.
엽현의 예상대로 막념은 이미 노인 하나와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인의 정체는 지난번에도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던 백제성군, 백제자였다.
“후후, 오유겁이 올 때까지 기다릴 줄로만 알았거늘… 보기 좋게 예상을 벗어났구나.”
이에 백제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합시다. 엽현과 현옹이 정정당당하게 싸우도록 내버려 둡시다. 우리 도정이나 그대나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걸로, 어떻소?”
막념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거대한 진법 하나가 오유계 전체를 겨냥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엽현을 구하러 자리를 비우는 순간, 오유계는 그야말로 불바다로 변하고 말리라.
이때 막념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도정… 내 약점을 알아냈구나. 내가 한번 출수할 때마다 오유겁이 앞당겨진다는 사실을 알고서 도발하러 온 것이로군.”
“오유계의 천도. 그대가 지금 경지에 이르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알고 있소. 고작 한 사람 때문에 그간 이룬 것을 다 포기할 셈이오?”
이 말에 막념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를 누나라 부르는 유일한 아이다. 누나가 되어서 동생 하나 지켜주지 못해서야 쓰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