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55
1355화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단숨에 전력을 다해 죽여야 하오!”
백제자의 말에 진무신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음? 진무, 왜 그러시오?”
“놈이 이미 떠났소.”
진무신군의 말에 백제자가 표정이 기이해졌다.
“갔다고? 겨우 욕 한마디 지껄이고 말이오?”
진무신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제자가 침묵하는 이때, 진무신군이 허리춤에 잠자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놈이 검을 흡수한다는 게 사실이오?”
“그렇소.”
“체질인가? 아니면 비술?”
백제자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아마도 타고난 특성인 것 같소.”
“알았소.”
진무신군이 백제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목적은 결국 우리와 도총이 다시 전면전을 치르게 만드는 것이오. 전투가 격렬해지면 이득을 보는 건 그놈뿐이오. 아무래도 나후를 만나 봐야겠소.”
백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함께 가겠소!”
그렇게 두 사람은 대전을 나섰다.
* * *
한편, 엽현은 원래 본보기로 무인 몇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하고서 곧장 퇴각을 결정했다.
예전에 비하면 대단히 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다.
그가 천궁에서 멀어졌을 때, 흑의인 하나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흑의인은 엽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후께서 보자고 하시오.”
나후!
도총의 대장이 왜?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엽현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시오.”
흑의인이 돌아서자 엽현이 뒤를 쫓았다.
잠시 후, 엽현은 어느 성 앞에 도착했다.
별을 배경으로 성공에 우뚝 서 있는 성의 모습은 존재 자체만으로 위압감을 주었다.
도총성(道塚城)!
성안에선 수많은 강자들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엽현의 표정이 다소 딱딱해졌다.
오유계와 비교했을 때, 도총과 도정의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다시 한번 느꼈던 것이다.
이 힘의 차이는 엽현 혼자의 힘만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흑의인은 엽현을 어느 대전 앞에까지 안내한 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엽현이 고개를 들자 대전 상석에 꼿꼿이 서 있는 중년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장포를 입고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중년인은 허리춤에 다소 기이하게 생긴 도를 걸친 상태였다.
나후!
엽현은 문득 상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나후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오셨으면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제자와 진무신군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본체가 아닌 분신의 모습이었다.
“엽현, 여기서 또 보는구나.”
백제자가 아는 척을 했지만, 엽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때 나후가 운을 뗐다.
“진무신군, 백제성군. 보아하니 여기 엽현의 일로 온 것 같은데 할 말이 있으면 시간 끌지 말고 바로 하시오.”
이에 진무신군이 나후를 향해 말했다.
“나후, 그대가 보기에 신녀를 죽인 것이 우리인 것 같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오. 그대들 짓이었소?”
“하! 근 천년 가까이 싸워왔는데 아직도 내 성격을 모르시오? 나 진무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추잡한 일은 단 한 번도 행한 적이 없소!”
“…….”
이때 엽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경이 연관돼 있다면?”
이 말에 나후가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엽현은 말을 이어갔다.
“진무신군 그대야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이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소.”
엽현이 손을 들어 백제자를 가리켰다.
“바로 너 같은 쥐새끼라면!”
“엽현, 그게 무슨 소리냐!”
“흥! 진무신군처럼 자존심이 강한 자라면 앞에서는 웃고 뒤로는 칼을 휘두르진 않을 거다. 하지만 너는? 백제성군 너는 오유계를 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지탄받을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지!”
“하하하! 웃기는군! 내가 도총 한복판에 들어가서 신녀를 암살할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겠지. 도정에는 그만한 강자들이 즐비할 테니까.”
백제자의 눈빛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 놈의 장기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건 내가 할 소리. 너희 도정이야말로 뻔뻔하게 도경을 빼앗아 가고서, 오히려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울 셈인가?”
“하하하! 네가 신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으냐?”
엽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제성군. 고맙다. 나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해 줘서.”
백제성군은 나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후, 그대가 보기에 뭔가 수상하지 않소?”
나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제자, 그대는 엽현이 신녀를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거가 있소?”
“물론 없소. 하지만 그건 엽현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이때 엽현이 끼어들었다.
“그런 짓을 할 곳이 도정 말고 또 어디 있느냐!”
이에 백제자가 엽현을 보며 대꾸했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네 녀석이 아니었더냐?”
“내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죽인단 말이냐? 혹시 그럴 의도가 있다손 치더라도 내게 그녀를 단번에 죽일 만한 실력이 있던가?”
“하하, 여러 정황상 네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심스러운 거다!”
“네 논리대로라면 누가 보아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네 아버지인 게 아닐까?”
순간 백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로는 못 당하겠구나.”
“당연하지. 너희 같은 짐승에게 말로 이기지 못하면 그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엽현… 저속하구나. 강자의 풍모는 어디에 내팽개친 게냐?”
“강자의 풍모?”
엽현의 표정이 일순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너 같으면 신부를 죽이고 도망간 놈들 앞에서 그런 걸 챙길 여유가 있겠느냐?”
“말하지 않았느냐? 신녀를 죽인 건 우리가 아니다!”
“그럼 누구냐!”
엽현이 몰아붙이자 백제자도 울화가 치밀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나는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느냐!”
“물어볼 필요 없지. 왜냐하면, 네가 죽였으니까.”
백제자는 순간 참지 못하고 출수할 뻔했다.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농락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이때 진무신군이 나섰다.
“엽현, 너는 신녀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죽자마자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 온 건 다소 억지스럽지 않으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죄를 지었으니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이 말에 나후가 엽현을 쳐다보았다.
이때 엽현이 소리쳤다.
“왜냐하면, 한순간이나마 날 사랑했던 여인이니까!”
“…….”
백제자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 신녀가 뭐 때문에 널 사랑했단 말이냐?”
엽현이 백제자를 향해 돌아섰다.
“백제자, 이 멍청한 놈. 도정 젊은 일대 중에 나보다 더 잘난 놈이 있더냐? 이 정도 실력에 이 정도 지위, 결정적으로 출중한 외모까지! 여인이라면 날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엽현보다 잘난 남자?
백제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분명 반박하고 싶은데 도정의 젊은 무인들 중에서 엽현보다 강한 자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도총의 경우도 마찬가지.
“자고로 미인은 영웅을 따른다 했다. 신녀가 나를 보고 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한가?”
“…….”
“한 가지 더! 청혼을 한 것 역시 그녀였다. 즉, 내가 먼저 좋아서 혼인했던 게 아니란 소리다. 백제성군, 진무신군.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인데, 혹시 여자에게서 사랑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겠지?”
백제성군은 뜨끔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때 진무신군이 말했다.
“그럼 너는 그녀를 사랑했느냐?”
엽현이 진무신군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이냐?”
이에 엽현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남녀 사이에 사랑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소. 내가 혼인을 한 것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었소. 왜 사내라면 한 번쯤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소? 왜? 내 말이 틀렸소?”
이 말을 듣자 진무신군의 눈이 커다래졌다.
백제자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건가!
묵묵히 듣고 있던 나후 역시 이 순간만큼은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엽현은 오히려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여자 몇 거느리는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오? 게다가 신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도총의 힘을 빌려 도정과 대적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소?”
이에 백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안무치한 놈. 신녀는 널 선택한 걸 죽어서도 후회하고 있을 거다.”
이에 엽현이 냉소를 지었다.
“인정한다. 그녀에게는 어쩌면 최악의 남자였을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고, 그 목적에 충실한 것뿐이다. 신녀와의 혼인에 다른 목적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운 짓을 한 건 아니다!”
나후는 엽현의 이 말에 다소 호감을 느꼈다. 그가 느낀 엽현은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자세가 되어 있었다.
“백제자, 네 말대로 나와 신녀 사이에 깊은 교감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내 여인이었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지아비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너희는 도경까지 빼앗아가지 않았더냐?”
나후는 문득 신녀와의 혼인을 유지하는 것이 엽현에게는 대단한 이익일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유계의 입장에서는 도총과 사돈지간이 되면 그만큼 도정에게서 받는 압박을 덜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엽현이 굳지 신녀를 죽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후는 문득 백제자와 진무신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때 백제자가 소리쳤다.
“엽현,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냐? 우리는 신녀를 죽인 일도 없고, 도경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그럼 누구 짓이란 말이냐!”
엽현이 버럭 소리치자, 백제자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그랬는지 우리가 어찌 아느냐! 그건 조사를 해 보면…….”
이때, 백제자가 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범인은 엽현이라 단정하지 않았던가!
백제자는 엽현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엽현…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구나.”
이때 엽현이 나후를 향해 돌아섰다.
“나후, 더 이상 저 쓰레기들과 말 섞고 싶지 않소. 놈들은 사람을 죽이고 도경을 탈취해갔소. 나는 그저 놈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반지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오!”
말을 마친 엽현은 검을 든 채 뒤돌아섰다.
이에 나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딜 가는 게냐?”
“당장 천궁에 쳐들어가서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일 셈이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 엽현은 그대로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진무신군이 낮은 음성으로 백제자에게 속삭였다.
“백제성군, 솔직히 말 해 보시오. 정말 그대가 죽이지 않았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