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73
1373화 싸움을 피한다?
비구산으로 향하는 길.
엽현은 검 위에 몸을 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파도자와 백포군.
이들을 본 후, 그는 오유계에도 이런 강력한 무력집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격과 방어를 위해 체계적으로 훈련된 무인들의 존재 여부는 집단 간의 싸움에서 단단한 기둥 역할을 할 것이다.
엽현은 문득 검종의 검수들을 떠올렸다.
검종의 무인들은 확실히 저력이 있었다.
심경이나 타고난 자질을 놓고 보면 결코 파도자와 백포군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수련이 아닌, 조화신정이었다.
조화신정의 보급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검종 검수들이 파도자나 백포군급이 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엽현은 막념의 죽음을 통해, 우주란 한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가능한 많은 강자를 길러내는 일이 오유계 수호의 핵심과제인 것이었다.
검종의 무인들은 이미 모두 둔일경에 이른 상태였다.
여기에 정순한 조화신정만 더해진다면 증도경까지는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엽현에게는 도경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증도경에 도달해 경지의 차이를 없앨 수만 있다면,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검수의 특성상 파도자나 백포군에도 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조화신정이 필요하다.
조화신정!
생각을 정리한 엽현은 곧 속력을 끌어올렸다.
비구산.
비구산 역시 한 줄기 최상급 영맥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최상급 영맥이 매년 생산할 수 있는 조화신정은 대략 십여 만개 정도였다.
이 정도면 상당수 증도경 강자, 심지어 어도경 강자까지 양성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설령 어도경 이후를 바라보는 무인이라 할지라도 조화신정은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조화신정만큼 정순한 영기를 제공하는 신물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궁무진한 효용을 지닌 조화신정이기에 천계연 내의 광맥을 차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쉽게 말해, 이 광맥들은 도정과 도총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편, 비구산을 지키는 백포군은 대략 삼십 정도로 그 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들 중에는 신군급 무인 하나가 섞여 있었다.
이곳에 병력이 많지 않은 이유는 그간 도총이 수비에만 치중할 뿐, 도정의 영맥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엽현 일행이 막 비구산에 도착했을 때, 노인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신군!
어도경의 강자였다.
엽현을 대면한 노인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엽현!?”
“그렇소. 나는…….”
“전군 퇴각!”
노인은 엽현이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와 함께, 비구산에 주둔하던 백포군 역시 일제히 물러났다.
이 모습을 보자, 엽현 뒤에 서 있던 무인들은 황당함을 느꼈다.
엽현 역시 멍하니 도망치는 무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싸움을 피한다?’
순간 엽현의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다소 딱딱하게 변했다.
도정이 엽현을 두려워해서 도망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엽현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왜 후퇴하는가?
이는 쓸데없는 병력손실을 막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엽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도정이 자신을 단번에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 사생결단을 펼칠 것이 확실하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엽현과 그 일행은 비구산으로 진입했다.
무혈입성한 무인들은 곧바로 비구산 내부의 조화신정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인들 앞에 조화신정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얼핏 봐도 만 개 이상은 될 것처럼 보였다.
이 귀중한 조화신정을 챙겨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비구산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엽현의 기습을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때 엽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재 도정은 삼십 개가 넘는 최상급 광맥을 보유 중이다.
이 가운데는 분명 조화신정이 생산되는 광맥도 있을 것이다.
그가 알기로 도총이나 도정이나 한 달에 한 번 꼴로 조화신정을 거둬들였다. 일단 조화신정이 형성되면 보통 한 달 정도 숙성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야만 조화신정이 더 크고 정순해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엽현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엽현은 비구산을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무인들을 대동하지 않은 단독 행동이었다.
비구산에서 가장 가까운 산맥은 삼천리 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남산(南山)이었는데, 이곳은 무려 여섯 명의 신군과 수백 명의 백포군이 수비를 맡고 있었다. 게다가 비구산에서 퇴각한 무인들까지 합류하여, 말 그대로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도정은 엽현의 다음 목표가 비구산에서 가장 가까운 남산일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남산에 존재하는 최상급 광맥은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도정의 의지였다.
하지만 이들의 예상과 달리 엽현은 남산을 지나쳐 천 리 가량 더 멀리 떨어진 태행산(太行山)으로 향했다.
태행산에도 마찬가지로 최상급 광맥 하나가 존재했다.
얼마 후, 태행산에 도착한 엽현은 곧장 잠입을 감행했다.
이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엽현이 마음먹고 기운을 숨겼을 때, 이를 감지할 수 있는 무인은 도정 내에도 몇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곧, 태행산 깊은 곳에 들어온 엽현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태행산 안에 무려 만 개가 넘는 조화신정이 존재했던 것이다!
두고 볼 것도 없이, 엽현은 산맥 안에 있는 조화신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담았다.
바로 이때, 어디선가 고함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강대한 기운이 태행산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산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엽현은 사라진 직후였다.
사라진 것은 엽현만이 아니었다.
산맥 내부에 영롱하게 달려 있던 만여 개의 조화신정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를 본 무인들은 순간 머리가 멍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조화신정을 도둑맞았다!?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무인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엽현, 이 쥐새끼 같은 놈! 이렇게 대놓고 도둑질을 하다니! 으아아아-!”
한편, 태행산을 빠져나온 엽현은 복귀하지 않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도정의 광맥들은 하나둘 텅텅 비어가기 시작했다.
* * *
신궁(神宮).
신궁은 남연의 핵심지역으로 백포가 직접 수비를 맡는 곳이기도 했다.
이 시각, 신궁 대전 내부는 남연의 거의 모든 어도경 강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매우 어두웠다.
엽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조화신정을 훔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엽현이라는 노련한 전문털이범 앞에서 도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엽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웬만한 포위는 쉽게 뚫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지금까지 엽현에게 털린 광맥은 무려 열다섯 개였다.
엽현의 도둑질을 막기 위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화신정의 수거를 서두르는 것뿐이었다.
빠르게 손을 쓴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미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추산 결과 엽현이 훔쳐 간 조화신정은 무려 이십여 만개에 달했다.
조화신정 이십여 만개!
보통 신군 한 명에게 매달 떨어지는 조화신정은 삼천 개 남짓이다.
그런데 엽현은 일거에 이십여 만개를 훔쳐 가 버린 것이다!
대전 안, 무인들은 모두 울분에 찬 표정으로 엽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바빴다.
바로 이때, 대전 안에 한 노인이 들어서더니, 대뜸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해산하라는 명령이오!”
이 말에 무인들이 어리둥절했다.
이대로 해산하라니?
백포신장은?
혼란에 빠진 무인들이 무언가 질문하려 했지만, 이미 노인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이에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조화신정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겠다는 건가!?
한편, 엽현은 비구산이 아닌 치요요가 있는 요왕전으로 직행했다.
대전에 이르자 치요요가 반가운 얼굴로 엽현을 맞았다.
“천하의 대도가 납셨군! 도대체 얼마나 훔친 것이냐?”
엽현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겨 치요요를 향해 납계를 날려 보냈다.
치요요가 확인한 결과, 납계 안에는 십여 만개의 조화신정이 들어 있었다.
치요요가 고개를 들고 엽현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냐?”
“보호비.”
“…보호비?”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엽현의 말을 이해한 치요요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정이 정말로 사람이 없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엽현을 내버려 두는 걸까?
그건 절대 아니다.
도정에도 엽현보다 강한 무인이 존재한다.
백번 양보한다 해도, 백포라면 엽현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는 나서지 않았다.
왜?
그가 나서봐야 치요요가 등장하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치요요는 존재만으로 엽현을 보호하고 있는 셈이었다.
치요요는 문득 엽현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욕심을 억누를만한 지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탐욕이 강한 자보다는 선을 지킬 줄 아는 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치요요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물었다.
“그런데 백포는 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까?”
“기다리는 것이오.”
“기다리다니? 무엇을?”
“나와 그대를 단번에 쳐부술 때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 말에 치요요가 엽현을 향해 싱긋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구나. 두렵지 않느냐?”
“음… 잘 모르겠소. 그대가 보기에 백포와 당장 싸운다면 내게 승산이 얼마나 있을 것 같소?”
치요요가 고개를 저었다.
“백포 앞에서 너는 승산을 따질 수준도 아니다.”
“그럼 그대라면?”
“후후, 사대 육 정도. 물론 내가 사다.”
“…….”
치요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분명 뭔가 있다.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건 백포의 성격과 맞지 않아.”
“만약 그대가 백포라면 내가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겠소?”
치요요가 고개를 돌려 엽현을 바라보았다.
이때 엽현이 말을 이어갔다.
“만약 내가 백포라면 전 병력을 모아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이오.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말이오.”
“…….”
치요요 앞으로 다가간 엽현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요왕, 그대 생각에 백포가 그리하지 못할 것 같소?”
“내 생각엔… 백포는 동귀어진을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은 것 같다.”
이에 엽현이 씩 웃었다.
“동귀어진? 저쪽도 피해를 보았겠지만, 그대들은 전멸할 게 분명하오. 이걸 동귀어진이라 할 수 있소?”
“어째서 전멸할 거라 생각하지?”
“기세! 백포는 그 이름만으로도 도총 무인들을 떨게 할 수 있소. 만약 백포가 마음먹고 들이닥친다면 나후가 구원에 나서지 않는 한, 그대들은 결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
엽현은 대전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요왕, 도정은 도총에 비해 기세뿐 아니라, 단합도 잘 된 상태요. 이것만으로도 도정에게 매우 유리한 싸움이오. 다만, 지금까지 저들이 주저했던 이유를 찾자면, 그대들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대들 뒤에 있는 상주 때문이었을 것이오. 내 말이 틀렸소?”
치요요는 침묵했다.
침묵은 곧 엽현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