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4
14화 그의 자질이 아니라 성품에 반한 것이요
엽현이 세 사람과 인사를 마치고 떠나는 그 순간.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산에서 안란수가 긴 창에 몸을 의지한 채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한 노인이 오래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영로(靈老), 어떻소?”
안란수의 물음에 노인이 마차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무수한 전투 경험이 있는 무인입니다. 그의 사승(師承)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검수의 경지에 이른 게 분명합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 그가 괜찮은 무인임은 확실하지만, 아가씨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자입니다. 아가씨는 이미 무방(武榜)에 속한 무인이 아닙니까?”
청주 전체에는 다섯 대국 외에 수백 개의 소국이 있었다. 그 안에 수많은 세가들과 종문들이 있었다. 그곳에 속한 무인들의 공통된 목표는 무방(武榜)에 이름을 올리는 거였다.
무방은 청주 전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명단이었다. 무방에 이름을 올리는 자는 천재 중의 천재라 할 수 있었다. 강국에서 단 두 명만 무방에 속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안란수였다. 안란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영로, 내가 그에게 옥패를 준 일 때문에 그러시오? 내가 그에게 마음이라도 있을까 봐?”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영로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안란수의 시선이 사라져 가는 마차로 향했다.
“영로! 나는 그의 자질이 아니라 성품에 반한 것이요.”
영로가 눈썹을 치켜떴다. 이에 안란수가 가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저런 오빠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안란수는 이내 몸을 돌려 산 아래로 사라졌다. 침묵하던 영로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마차 안에선 엽현이 말을 열심히 몰고 있었다. 엽령은 엽현의 팔을 꼭 껴안고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던 엽현이 품 안에서 장렬에게 받은 지도를 꺼냈다.
그의 표정에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엽현은 청성 밖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들었지만 여동생을 낯선 곳에서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마차를 타고 떠난 지 두 시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청성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속도로는 꼬박 4~5일을 달려야 천산성(千山城)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엽현은 더 이상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날이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으니 더는 깊은 산속을 달릴 수 없었다. 엽현 혼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엽령이 옆에 있는 한 그럴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았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온 별빛들도 두 남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두운 숲 가운데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 위에 손질된 칠면조 한 마리를 놓고 익혔다. 이는 이옥이 그를 위해 마차 안에 실어 놓은 식량이었다.
엽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큰 구름이 달을 지나가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모닥불이 타 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엽령이 다소 무서운 듯 엽현을 꽉 껴안았다.
“겁내지 마!”
엽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광경이구나!”
세자가 된 후로 엽현은 청성 내의 다른 세력들과 광산을 두고 전투를 수없이 치렀다. 대부분 지금과 같은 깊은 산속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어둠 속에서 혈투를 벌인 적이 다반사였다. 엽령이 고개를 비스듬히 둔 채 엽현을 바라보았다.
“오빠하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무서워!”
엽현이 엽령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됐어. 기억해. 하늘이 무너져도 너는 내가 지킨다!”
엽령이 귀엽게 웃었다. 칠면조 한 마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운 후 엽령은 바로 잠에 들었다. 엽현은 잠든 엽현을 마차 안에 살포시 뉘인 뒤에 가부좌를 틀고 계옥탑으로 진입했다.
엽현은 안란수와의 일전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의 속도, 반응 그리고 전투 감각을 떠올리면서 자신은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엽현은 계옥탑으로 들어가 안란수와의 일전을 하나하나 곱씹기 시작했다. 그는 안란수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았다. 엽현은 안란수로부터 배움을 얻는 동시에 자신이 검을 내미는 시기와 각도를 점검했다.
엽현은 연검(練劍)을 시작했다. 그는 안란수라는 가상의 적을 상상하며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엽현이 검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실려 있었다.
[수확이 있었느냐?]갑작스러운 천녀의 음성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일검을 그렇게 시작한게 실수였습니다. 그 일격 때문에 기세를 잃고 압박을 받게 됐습니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검을 빼지 않았더라면 반격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겠지요.”
[잘 알고 있구나, 아주 좋다!]“천녀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누가 가르쳐 줘 봐야 아무 의미 없다!]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천녀님!”
수련을 마친 엽현이 계옥탑을 떠나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잠든 엽령을 본 엽현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마차 밖에 나왔다. 밤이 가장 어두울 때였다. 그때 긴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엽현이 주변을 경계했다.
한 여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스물대여섯 나이로 보였다. 여인은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윗옷에 몸에 꽉 끼는 긴 치마를 입고서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몸 군데군데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여인은 엽현을 바라보다가 다가왔다.
“공자님, 저 좀 살려주세요! 누가 절 죽이려 해요!”
여인이 엽현을 와락 껴안았다. 그의 두 팔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몸을 엽현의 팔에 문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세 사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도(長刀)를 든 중년 남성과 노인들이었다. 엽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짐작컨대 선두에 선 남성은 최소 어기경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기변경이었다.
엽현을 바라본 세 사람 또한 양미간을 찌푸렸다. 중년인이 엽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놈은 누구냐!”
엽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요염한 여인이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물건은 이미 확보했으니 우선 저들을 막아라! 잠시 후에 그곳에서 보자!”
말을 마친 여인이 재빨리 달아나고자 했다.
하지만 엽현이 때를 놓치지 않고 여인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여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하니 엽현이 공격할 줄 몰랐던 것이다. 여인이 황급히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퍽!
엽현의 공격에 여인은 나가떨어졌다. 순간 엽현에게 막 돌진하던 세 사람은 당황스러웠다. 엽현이 여인이 날아간 방향을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이용하려 하다니!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 지는 모르겠소만 나쁜 짓을 했으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지!”
여인이 죽일 듯한 기세로 엽현을 노려보았다. 엽현 역시 여인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본 후 낯선 세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오. 하려던 일을 마저 하시오. 나는 관여하지 않겠소.”
엽현의 자초지종을 모르니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 여인은 그를 이용해서 도망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엽현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러니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순 없었다.
엽현이 물러나자 중년인을 비롯한 삼 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중년인이 엽현에게 포권을 취한 후 여인을 바라봤다.
“진상! 물건만 내놓으면 편안하게 죽여주겠다!”
여인이 큰 나무가 있는 곳까지 뒷걸음질쳤다.
“막촌, 만약 내가 너라면,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길을 택하겠다.”
중년인이 무언가 낌새를 챈 듯 했다.
“무슨 소리냐!”
달그닥 달그닥!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인의 안색이 변했다.
“원군을 불렀구나!”
진상이라 불린 여인이 차갑게 웃었다.
“글쎄?”
중년인이 진상을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우리 막가(莫家)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다!”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이제 엽현과 진상만이 남았다. 진상은 입가의 선혈을 닦으며 엽현을 바라보았다.
“뭐야, 넌 도망 안 가?”
엽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마차 안에서 엽령이 잠들어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진상이 엽현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야. 그러나 네 꼬락서니를 보니 그렇게 부유한 자는 아니군.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너는 지금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 찬 거야. 방금 나를 도왔더라면 너는 기연을 얻었을 테니까!”
“악연이었을 수도 있지 않소.”
진상이 비웃으며 말했다.
“악연? 그 말도 맞지. 지금 그 말로 인해 악연이 됐지!”
이때, 이불로 몸을 감싼 엽령이 마차에서 나왔다. 엽현은 들고 있던 불쏘시개를 황급히 던져 버리고 엽령에게로 다가갔다.
“시끄러웠어?”
엽령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엽현이 진상을 봤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
엽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남자들이 말을 이끌고 나타났다. 선두에 있던 남자가 말에서 내려 진상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진상이 갑작스레 그의 뺨을 갈겼다.
“괜찮냐고? 내가 죽고 나서 나타날 작정이었어!?”
남자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걸음이 더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돌아가면 합당한 처벌을 내리겠다!”
진상이 고개를 돌려 엽현 남매를 바라 보았다.
“이제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 볼까?”
엽현이 잠시 생각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남매는 그저 이 길을 지나는 중이었소. 다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소.”
엽현에게로 다가온 진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백번 절을 해라. 그러면 너희들을 보내주겠다.”
엽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대에게 이용당하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는데, 왜 그대를 도와줘야 했다는 것이오?”
진상이 흉악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똑똑히 들어라… 방금 전 나를 도와주지 않은 대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엽현이 손을 번쩍 들어 진상의 뺨을 휘갈겼다.
짜악-!
경쾌한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엽현에게 뺨을 맞은 진상은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 줄 몰랐던 진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틈에 엽현은 발로 그녀의 배를 밟고 있었다. 엽현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진상을 바라보았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편이 아니라서….”
동시에 엽현이 몸을 숙여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을 걷어붙였다.
짜악-!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부풀어 올랐다.
“건방진!”
진상에게 말을 걸던 남자가 노기 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가 누군지 아느냐! 그녀는 바로 나성 진가(秦家)의 아가씨다!”
엽현이 청성에서 가까운 나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엽현이 남자에게 대꾸했다.
“내가 그대였다면 협박 대신 당장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 텐데…….”
“미, 미안해요!”
이때, 엽현의 발 아래에 깔려있던 진상이 소리쳤다.
“소녀가 눈이 어두워 공자 같이 귀한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공자께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후에 우리 진가에서 사례하겠습니다!”
엽현이 고개를 숙여 진상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는 방금 전과 달리 가녀리고 연약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를 감지한 엽현이 발로 진상의 목을 짓눌렀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는 엽현의 발아래서 비참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