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497
1498화 검심자재
여인이 떠나자 성사가 비석을 향해 돌아섰다.
“상신(上神), 그 아이는 액체(厄體)입니다. 이 일은 관여하지 않는 편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천지현전(天地玄殿)을 보고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성사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천지현전!
천지현전은 이 우주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선사시대 최고의 보물이다. 도(道), 생(生), 사(死), 선(善), 악(惡), 겁(劫), 여섯 가지 진리에 대해 서술해 놓은 책이었다.
북황족 최고의 신물인 북황무경(北荒武經) 또한, 이 천지현전의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수많은 비밀이 존재했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미지의 전승이나 문명 혹은 어떤 신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천지현전은 원래 북황족의 소유였지만, 선사시대가 격변하던 그 당시, 아무도 모르게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보물이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물건이 왜 그 여자 손에 있던 것입니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천지현전이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거래용으로 쓸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상신, 그 여자가 천지현전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게다가 엽현이란 아이의 내력 역시 대단히 특수하긴 마찬가지… 외람되오나 자칫 그들 사이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부족 전체에 큰 재앙이 내려질까 두렵습니다.”
“…….”
“우리에게 천지현전이 매우 중요한 물건이긴 하지만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여인은 실력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지략 역시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 그녀가 엽현을 죽이는데 굳이 우리를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엽현의 배후가 무섭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조사 결과 그녀의 편에 선 무인들 역시 하나같이 보통 존재들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그녀는 아마… 우리를 희생 재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비석 안에서 상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 직접 그 아이를 만나보고 결정하겠다.”
“그럼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간다!”
상신의 말에 성사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 알도록 하겠습니다.”
* * *
무변성지, 대나무 집.
방 안으로 돌아온 여인은 검은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때, 방 안에 존재하던 또 다른 여인, 수무변이 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상자가 북황에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중요히 여기는 건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이다.”
“무슨 물건?”
“후후,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지.”
“그런 물건을 이렇게 줘 버려도 되는 건가?”
이에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고 난 후부터는 신물이나 전승 따위는 큰 의미가 없더군.”
수무변은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상자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얻은 거야?”
“훗, 당시 온몸이 새하얀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사탕 두 개를 주고 얻어냈지.”
이 말에 수무변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온몸이 하얀 아이!
그녀는 여인이 말한 하얀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식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사탕 두 개에 신물을 내어 주리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수무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때,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
수무변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지금 바로 출수하려고?”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니야. 그 여자가 더 멀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음… 그렇지!”
아직은 시간이 일렀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천명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테니.
그 누구도 그 여자를 막을 순 없다.
“엽현은 여전히 수련 중인 것 같아. 내버려 둬도 괜찮겠어?”
“후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수련할 시간도 얼마 없을 테니까.”
여인은 검은 상자를 회수한 뒤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냐?”
수무변의 질문에 막 밖으로 나가려던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전혀 그렇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감탄하고 있지. 그 나이 또래에 그 정도 경지에 이른 자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자들. 그 어린 녀석 하나 당해내지 못하면 애당초 복수는 꿈도 꾸지 않았겠지.”
말을 마친 여인은 자리를 떠났다.
수무변은 침묵에 잠겼다.
그 시대!
그녀는 문득 한 여인을 떠올렸다.
하얀 소복을 입은 검수.
그녀 앞에서는 그 어떤 대능(大能)조차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시절, 그녀는 무적이었다.
* * *
오유계.
엽현은 여전히 계옥탑 구층에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튼 그의 주변으로 검역이 짙게 펼쳐져 있었고, 그의 눈앞에는 무상검이 공중에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엽현이 손을 뻗어 무상검을 쥐었다.
순간,
쾅-!
한 줄기 강대한 기운이 탑 전체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았다.
엽현은 죽을힘을 다해 무상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는 오십 년 치의 수명지력이 담겨있는 상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십 년의 수명을 태워 힘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엽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무상검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비록 검역이 깔려 있긴 하지만, 검이 함유한 힘이 너무나 강대한 나머지 탑 구층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만약 탑에 걸려있는 도칙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무너져버렸으리라.
검 안에 깃든 힘은 이미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때, 곁에 있던 안란수가 물었다.
“검을 뽑을 수 있겠어?”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엽현은 천천히 무상검을 치켜세웠다. 확실히 휘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였다.
검은 이미 순살일검의 몇 배 이상의 힘을 뿜어낼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속도가 순살일검보다도 못하다는데 있었다.
“일단은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데 의미를 두자.”
안란수의 위로 섞인 말에 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순살일검의 힘과 속도만 해도 이미 그의 육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명권의 힘까지 더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도전임이 틀림없었다. 즉, 원하는 힘과 속도를 얻기 위해서는 육신의 경지가 최소 신경에는 도달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엽현은 천천히 손안의 힘을 풀었다.
이 며칠 동안, 순살일검과 명검을 합쳐보려 소모한 수명만 대략 이백 년.
하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이를 순 없었다.
문제는 속도.
무상검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속도를 내주지 못한다면 이는 결국 실패로 봐야 한다.
아무리 강해도 그 여인을 맞추지 못한다면 지금의 수련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까.
“실망하지마. 넌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안란수의 목소리에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맞아. 최선을 다해도 이길 수 없다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안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를 상대로는 효과가 없을지 몰라도, 이 세상에 지금 이 검을 받아 낼 사람은 절대 많지 않을 거야.”
명권과 순살일검을 합친 검의 위력은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엽현은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손안의 무상검을 바라보았다.
“이 새로운 기술은 명검(命劍)이라 부르겠어.”
명검!
검수의 수명을 담은 일검(一劍)!
잠시 후, 엽현은 검을 집어넣고서 작은탑이 준 책을 집어 들었다.
발검술.
한참을 책을 살펴본 엽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굉장하군.”
이때, 엽현 곁으로 다가온 안란수가 책의 내용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발검술이야.”
“이럴 시간이 필요했어. 그동안 매일 같이 적과 싸우느라 스스로의 검도에는 소홀했었거든.”
그의 검도는 매우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육신의 경지가 성장하긴 했지만, 그마저 외물에 의지한 것일 뿐이었다.
검수에게 검도가 정체돼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미 스스로의 검도를 걷기 시작한 그였기에, 자기 스스로가 돕지 않는 한 검도는 영원히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엽현은 문득 백의를 입은 청아의 말이 떠올랐다.
검심자재(劍心自在)!
사실 지금까지 진정한 검심자재의 경지에 이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걱정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엽령, 그 후에는 막념 그리고 지금은 오유계 전체가 그의 근심거리였다.
이 마음의 장애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아지기만 했다.
지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검은 검수의 마음과 같아서, 장애물이 적을수록 검은 더 빠르고 예리해진다.
이때, 엽현은 뭔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 걸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신념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념은 뭔가?
나와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자신의 신념이지 않던가!
책임!
사내대장부로 태어난 이상,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순 없다.
걸림돌?
때때로 오유계가 발목을 붙잡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지키는 건 자신의 책임이었다.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걸림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인연을 끊고 모든 것과 멀리하는 게 검심자재의 참뜻일까?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모든 것과 연을 끊는다는 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부모와 형제를 멀리하면 자유롭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책임질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자유는 엽현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바라보는 검의 용도는 무엇이었던가?
모든 적을 물리치고 천하제일인이 되려는 용도?
아니!
당초 그가 검을 든 이유는 그저 엽령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엽령, 안란수, 연만리, 척발언, 소칠, 소도, 아라, 묵운기 그리고 막념…….
사유계와 오유계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엽현은 손안의 검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청아, 네가 말했던 검심자재가 뭐였는지 이제 알겠어. 그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을 끊고, 이기적으로 되는 게 아니었어. 검심자재는 부끄러움 없이 사람답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의미였어.”
깨달음을 얻은 순간, 손안의 무상검이 갑자기 요동치더니, 사방으로 검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엽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검들과 심지어 탑에 꽂혀 있는 검들까지 몸을 떨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내린 답이 정답이라고 확인해 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