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534
1535화 생사일검
천모는 강했다.
그녀는 만군을 순식간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먼저 움직인 이유는 기선제압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쓸데없이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천모가 출수한 순간, 엽현은 오히려 두 눈을 감았다.
포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정신이 또렷했다.
천모와 엽현 사이의 경지 차이는 무려 세 단계에 달했다.
이 정도 차이는 설령 신경 급 육신에 불사혈맥이 있던 예전이라 할지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천모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은 자질뿐 아니라, 경험 또한 일반 무인이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엽현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천모가 달려드는 이 순간, 엽현은 자신에게 아무런 승산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죽음!
얼마 전 만군과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엽현에게 있어 이번 전투는 진정한 절경(絕境)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척 봐도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는다!’
엽현은 다시 한번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육신이 파괴되었을 때보다 한층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만군과는 달리 상대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
반드시 죽는 상황이라면 힘을 아낄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죽게 되면 그 힘도 다 사라지고 말 텐데!
엽현이 문득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 순간, 엽현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홀가분함을 느꼈다.
죽음 자체는 두려울 것이 없다.
진짜 두려운 것은 죽음과 직면한 이 상황에 한정된 것일 뿐!
물론, 죽음과 직면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바로 지금의 엽현처럼!
번쩍 눈을 뜬 엽현이 크게 한 발을 내딛으며 검을 내질렀다.
발검술도, 순살일검도 아니었다.
그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찌르기에 불과했다.
다른 것은 마음이었다.
임종 직전의 일검!
마음에 어떤 두려움도 없는 일검!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죽어서도 후회 없는 검을 펼치는 것일 뿐.
검이 바람을 가른 이때,
쾅-!
굉음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튕기듯 뒤로 날아갔다.
그림자는 무려 십여만 장이나 날아가서 그대로 처박혔다.
놀랍게도 그림자의 주인공은 엽현이 아닌 천모였다.
이 순간, 장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엽현 곁에서 막 출수하려던 만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불신의 시선으로 엽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반대편, 성군의 표정에도 경악의 기색이 가득했다.
* * *
같은 시각, 대황산맥 끝자락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엽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 그의 눈빛은 기이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도가 아직 입범(入凡)을 하지도 않았는데, 범검을 펼쳐 내다니… 이런 게 원래 가능했던가?”
잠시 심각하던 남자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 * *
인류금구 안.
엽현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그건 범검이었을까?
엽현은 여전히 자신의 경지가 범검에 미치지 못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조금 전의 일검은 분명 범검이었다.
처음으로 검이 경지를 초월해 버린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휘두른 검 앞에서 경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엽현은 손아귀에 쥔 무상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사지간에 깨달은 검이니 생사일검(生死一劍)이라고 부르자.”
생사일검!
이 일검은 범검이었다.
그것도 진정한 의미의 범검!
한편, 천모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엽현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이럴 리가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모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와 거의 동시에 한 줄기 자광(紫光)이 엽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광이 지나간 자리는 그대로 얼음장처럼 쩍 갈라져 나갔다.
천모의 전력이 담긴 일격이었다.
찰나의 순간, 주변의 공간 전체가 이 힘을 이기지 못해 천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힘을 감당하기엔 인류금구의 공간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엽현은 차분히 눈을 감은 채,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자광이 그의 눈앞으로 날아든 이때, 엽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일검이 방출된 순간, 주변 일대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팟-!
뒤이어,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광은 허무하게 부서져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천모가 다시금 실이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날아갔다. 이 거리는 무려 십여만 장이나 됐다.
지면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천모는 곧바로 피를 토해냈다.
이때, 그녀의 오른팔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천모는 곧바로 엽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붉게 변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광인처럼 비쳐졌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성도경밖에 안 되는 녀석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모두 거짓말이야!”
이 모습에 엽현이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냐면 내 검은 이미 범검의 위력을 담고 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달려든 것이오? 하하하하!”
“푸흡-!”
엽현의 비아냥거림에 기혈이 뒤틀린 천모가 또다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엽현을 노려보는 그녀의 살기 어린 시선은 그 자체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도경 주제에… 성도경 주제에 어떻게…….”
천모는 다소 실성한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세 단계 차이나 나는 무인에게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경지가 뭐라고 그리 호들갑이오? 그건 그저 하나의 규칙 혹은 구속일 뿐인 것을… 그대들은 여전히 이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요. 다시 말해, 내가 막 걸음마를 뗀 아기라면, 그대들은 아직 엄마 젖도 떼지 못한 신생아라는 뜻이오!”
“푸흡-”!
천모가 다시 한번 크게 각혈했다. 그녀는 벌건 피를 주르륵 흘리면서도 엽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할 수만 있다면 엽현을 생으로 씹어 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는 건 부끄럽지 않았다. 실력이 모자라면 언제든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엽현의 말투는 그녀의 심기를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패한 것도 화가 나는데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한쪽에 있던 만군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엽현과의 전투는 실력은 둘째 치고,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신력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그녀는 문득 엽현이 검술보다도 화술에 더 능한 게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때, 엽현이 성군과 천모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많이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약해서 실망이오.”
“…….”
“…….”
만군은 엽현을 보며 점점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바로 이때, 장내에 누군가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도저히 못 봐주겠군. 좀 닥치고 싸울 수 없겠어?]“음?”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엽현은 액난문을 밖으로 소환했다.
방금 전에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액난문이었던 것이다.
엽현이 액난문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꼬우면 한 판 붙던가!”
“…좋지. 단, 정정당당하게 다른 이의 개입 없이. 어때?”
액난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하는 말들은 모두 참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강자니까.
하지만 엽현마저 ‘삼검’이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는데, 이건 도무지 눈 뜨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못 참아!
액난문은 엽현이 저렇게 된 것도 사실은 그 남자 탓이 크다고 생각했다.
한편, 액난문의 말을 들은 엽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문짝 하나 처리하는데 형님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너 정도는 내 일검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맹세해! 죽더라도 그자를 부르지 않겠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만군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액난문은 왜 이리도 엽현의 배후를 두려워하는 걸까?
이때 엽현이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이리 혀가 길어? 붙을 거야 말 거야?”
“흥! 먼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겠노라고 맹세부터 해라!”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진심으로?”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나?”
이때, 액난문이 갑작스레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액난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묘령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대략 십팔 세 정도의 용모로, 붉은 머리에 마찬가지로 피처럼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가진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이한 점은 여인의 미간 사이에 두 줄기 검광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만군과 성군, 그리고 천모의 표정이 다소 딱딱해졌다.
그리고 이 순간, 성군과 천모는 지난 번 자신들을 찾아 왔던 신비인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이었다!
이때, 엽현이 여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액난문, 질문 하나 해도 될까?”
“…….”
액난문은 말없이 엽현을 응시할 뿐이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엽현을 쳐 죽일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액난계는 어디에 있지?”
“…그건 왜 묻지? 찾아가 보기라도 하려는 게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을 모시고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서.”
“…….”
“음?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속이라도 안 좋은 건가?”
능글맞은 엽현의 태도에 액난문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자신 있는 놈이 뭘 망설이고 있느냐? 어서 검을 뽑아라!”
이때, 엽현이 기다렸다는 듯 일검을 날렸다.
그 역시 액난문과 자신의 차이가 얼마나 될지 매우 궁금하던 차였다.
엽현은 처음부터 생사일검을 펼쳤다.
엽현이 다시 범검을 꺼내 든 것을 보자, 성군과 천모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일검에 담긴 위력은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이미 크게 넘어선 상태였다.
한편, 액난문은 날아오는 검을 보고도 전혀 두려움 없이 일권을 내질렀다.
쾅-!
한 줄기 붉은 뇌전이 뿜어져 나간 순간,
콰쾅-!
엽현이 검을 잡은 채로 그대로 만 장 뒤로 날아갔다.
이와 동시에,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공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액난문의 주먹에 담긴 위력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액난문이 재차 출수하려는 이때, 멀리서 엽현이 소리쳤다.
“잠깐!”
“…또 무슨 수작이냐?”
엽현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고수는 한 수만 겨뤄 봐도 서로 알아볼 수 있지. 이만하면 됐으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
한쪽에서 이 말을 들은 천모가 이를 바득 갈았다.
“여기까지 한다고? 못 이길 것 같으니까 또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저 빌어먹을 놈!”
이에 곁에 있던 성군이 눈을 크게 뜨고 천모를 바라보았다.
“천모, 그대가 욕하는 건 처음 봤소.”
“…….”
사실 그녀는 살면서 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엽현을 만난 이후, 그녀는 자신 안에서 뭔가 끊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뻔뻔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욕이 나오는 걸 어찌하겠는가!
이때, 액난문이 엽현을 향해 대꾸했다.
“범검이 되려면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한다고 했었지? 그럼 내가 좀 도와줘야겠군.”
말을 마친 순간, 액난문의 두 주먹에 붉은 뇌전이 응집됐다.
이를 보자 엽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액난문이 엽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왜, 무서우냐?”
“하하, 스스로가 그렇게나 강하다고 생각하나?”
“그럼 아닌가?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지금 바로 덤벼 보던가.”
엽현이 막 대꾸하려는 이때, 대황산맥 끝자락에 서 있던 남자가 액난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남자의 말은 오직 액난문만이 들을 수 있었다.
이 순간, 액난문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이내 한 줄기 뇌광으로 변해 순식간에 계옥탑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