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569
1570화 족장의 무게감
엽현은 어느 장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원의 현판에는 기품 있는 글씨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소족(蕭族).
엽현이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대문이 열리고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소족의 현 족장이었다.
소족 족장은 엽현을 보자마자 공손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소족장을 뵙습니다!”
엽현이 불사제족의 소족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구유계 전역에 알려진 상태였다. 현재 구유계에서 엽현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엽현이 품을 뒤지더니 목걸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소비 소저를 만나러 왔소.”
“소비를… 안으로 드시지요.”
족장은 엽현을 데리고 장원 안의 어느 별채로 데려갔다.
족장을 물린 엽현은 홀로 차를 홀짝이며 여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시집을 가는 여인처럼 붉은 비단옷을 입고서 머리에는 봉황이 수놓아진 비녀를 꽂은 상태였다.
여인의 표정은 평안했지만, 그 표정에는 어쩐지 근심이 서려 있었다.
잠시 말없이 여인을 바라보던 엽현은 손안에 꼼지락거리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 순간, 엽현은 차라리 목소도를 마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게 한숨을 쉰 엽현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소비 소저, 그가 대신 전해 달라고 해서 왔소. 파혼을 하겠다고…….”
소비는 멍하니 엽현이 내민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엽현은 감히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걸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조금씩 차갑게 식어만 갔다.
잠시 후, 목걸이를 받아 든 소비는 여전히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엽현은 주먹을 쥔 상태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미안하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서…….”
이때, 소비가 엽현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오늘이 그와 저의 혼인날이었습니다…….”
“…미안하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여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세요… 다 보기 싫으니 나가 주세요…….”
“미안하오…….”
엽현은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방문을 나섰다.
방안에 남은 여인은 목걸이를 신줏단지처럼 껴안은 채 웃고 울고를 반복했다.
“서방님, 왜 이리 빨리 가셨나요… 천천히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랐는데…….”
이때, 막 별채를 빠져나온 엽현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황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그의 시선에 방 안에 홀로 쓰러져 있는 소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망히 맥을 짚었으나 이미 생기가 전무한 상태.
엽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소비를 바라보았다.
축 늘어져 있는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목걸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짝을 잃은 원앙이 어찌 홀로 살아갈 수 있으랴.
여인은 그렇게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치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을 저승에서 이어가려는 듯이.
엽현은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잠시 후,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미안, 미안하오…….”
자책감.
이때의 엽현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불사제족 무인들은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다.
이들은 모두 처와 자식이 있을 것이며, 더러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처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엽현은 누가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죄책감에 도저히 고개를 들고 여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때, 문이 열리고 동리청이 엽현 곁으로 다가왔다.
차갑게 식어가는 여인 앞에 무릎을 꿇은 엽현.
이런 그를 바라보는 동리청의 눈빛엔 근심과 안도가 반반 섞여 있었다.
안도의 이유는 엽현이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엽현에 대한 모든 자료를 받아 본 후, 그녀는 엽현이 의리와 인연을 중시하는 인품의 소유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설적이게도, 엽현의 이런 점이 그녀에게 근심으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정에 치우친 가주는 집안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불사제족처럼 거대한 세력에게 있어 족장이 잔정이 많다는 것은 반드시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족장의 결정은 전체적인 국면을 보면서 이성적으로 내려져야만 한다. 판단에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은 엽현은 중요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 냉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결단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어떤 경우에도 적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 않는 부분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충분한 덕목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생각을 정리한 동리청은 문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 족장.”
그녀의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소가의 족장이 문밖에 나타났다. 이때, 동리청을 향해 예를 차리려던 그의 시선에 방 안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를 본 순간, 소 족장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 족장… 비록 혼인을 올린 것은 아니지만…….”
동리청이 말끝을 흐리자, 소 족장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청(李青)은 이미 저희 소가의 사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두 사람을 합장하여 이번 생에 못다 한 인연, 다음 생에 이어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소 족장의 마지막 말은 흐느낌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에 동리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 남쪽으로 가면 극품 영맥이 흐르는 산이 있다. 후진을 양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니, 소족이 그곳을 차지하도록 하라. 이외에도 십 년마다 소족의 인재 둘에게 불사제족의 천재들과 함께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들에게도 다른 천재들과 똑같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더불어, 불사제족이 존속하는 한, 소족 역시 영원할 것을 약속한다.”
이 말에 소 족장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엎드려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족장… 감사합니다!”
소 족장은 알고 있었다. 이건 소가 전체의 명운을 바꿀 기회라는 것을.
하지만 딸의 목숨과 바꾼 기회이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몸을 일으킨 소족장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식어가는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이 독한 것아… 어쩌자고 이렇게 간단 말이냐… 남은 애비는 어떻게 살라고… 아이고, 이 멍청한 녀석아…….”
이때, 동리청이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엽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만 가자꾸나.”
동리청과 엽현은 그렇게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소가에는 처량한 곡성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동리청은 엽현을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그들을 알아보는 이들이 황급히 자리를 비키며 예를 차렸다.
성안에서 엽현을 모르는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엽현은 여전히 혼이 나간 것처럼 눈빛이 흐릿했다.
“우리 불사제족이 관장하는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 아느냐?”
“…….”
“칠유계, 팔유계, 구유계, 십계, 그 외에 작은 세계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다.”
동리청이 한숨을 쉬며 성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무수한 이들의 생사가 걸려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이때, 엽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동리청을 쳐다보았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동리청이 지긋한 눈빛으로 엽현을 보며 대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그들은 네가 아니라 자신의 가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불사제군에 들어가길 소원하는 무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다. 이들은 불사제군에 들어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청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 아이는 약관의 나이에 군인이 된 후로, 불사제군의 일원이 되는 것을 평생 숙원처럼 여겼었다.”
동리청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불사제족이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많은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불사제족 구성원들도 불사제족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말이다. 물론 나 역시 필요하다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청성에 있었을 시절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정을 갖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네게 목숨을 바치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불사제족의 소족장이 된 이상,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너를 믿고 따를 것이고, 네가 하는 말이라면 죽음도 불사한 채 따를 것이다. 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
엽현은 말없이 동리청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장면은 그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세력이 이렇게 강하게 단결된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불사제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진심으로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널 찾아서 목숨을 걸고 데려온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네가 불사혈맥의 한계를 뚫는다면 불사제족 전체가 한 차원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는 네 몸속에 우리와 같은 불사혈맥이 흐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불사혈맥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불사제족 같은 거대 가문에게 개개인의 감정은 사치에 불과하지.”
“…솔직하시군요.”
“훗, 너 같은 똑똑한 아이 앞에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봤자 통할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당시 제 부친이 불사제족에게 행한 일은…….”
동리청이 고개를 저으며 엽현의 말을 끊어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가 방금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족장의 말 하나, 행동 하나는 무수한 사람의 생명과 연관된다는 말. 당시 불사제족의 족장, 즉, 나의 부친은 탐욕에 눈이 멀어 가문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 뻔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바로 네 풍마혈맥을 흡수해 불사혈맥의 한계를 돌파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 이로 인해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네 부친은… 육유계부터 불사계에 이르기까지 불사제족의 시체로 길을 만들었지. 당시의 그 전쟁은…….”
동리청이 문득 엽현을 보며 물었다.
“한번 보겠느냐?”
“제가… 그 상황을 볼 수가 있습니까?”
엽현이 묻자 동리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비술을 사용해 저장해 둔 장면이 있다.”
이때, 동리청의 표정이 문득 심각해졌다.
“나는 네가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알길 원한다. 불사제족과 그의 은원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너뿐이니까.”
“…그분을 증오하십니까?”
“증오? 후후… 불사제족 족장의 신분으로서 이야기하자면, 많은 부족 사람을 상하게 한 그를 좋아할 순 없겠지. 하지만 네 이모된 사람으로서 보자면 증오는커녕, 오히려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족장이란 자리는 분명 괴로운 것이겠지요?”
동리청이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사실 이 족장 자리는 네 친모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그녀의 자질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네 모친은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고, 심지어 가문을 증오하기까지 했지. 그랬던 그녀가 널 위해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
“너와 그녀 사이의 일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네 어미를 너무 미워하진 말거라. 그녀 역시 너를 잃었다는 슬픔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 테니까… 그녀가 했던 일들은 어떻게 보면 아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
엽현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심각해진 엽현의 표정을 본 동리청이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아주 재미난 싸움 구경이나 하자꾸나!”
말을 마친 동리청이 엽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