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595
1596화 차라리 남남합시다
범검지상(凡境之上)!
이때 엽현의 심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마치 신혼 첫날밤 막 거사를 치르려는 찰나 발기부전이 온 것과 같았다.
엽현의 입장에서는 그만큼이나 억울한 상황이었다.
분명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얻은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왜 봉인되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엽현은 평생 도움이 되지 않다가 이제는 발목까지 잡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니, 그런 아버지와 부자의 연을 맺게 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엽현은 그렇게 억울함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한편, 엽현을 바라보는 마인들은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방금 전.
두 번 검을 휘두른 것으로 너무나 간단히 두 명의 천미경 강자를 살해한 엽현이었다.
범검지상(凡劍之上)!
일반 범검조차 두려운 존재인데 범검을 초월한 검수는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란 말인가!
심지어 비검으로 마인들을 개미처럼 찍어 죽이던 목소도조차 범검 절정이지 않았던가!
하물며 범검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무인의 실력은…….
이때, 창명 곁에 있던 노인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소계주, 일단 후퇴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창명은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엽현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노인이 재촉했다.
“소계주,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정말로 범검을 초월한 경지라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때, 엽현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창명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모습을 본 창명은 등줄기가 오싹해져 이내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나머지 마인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갔다.
창명은 엽현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 전, 엽현에게서 느낀 검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검기가 거짓일 리는 없지 않은가!
바로 이때, 그들의 등 뒤에서 엽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정지!”
정지!
순간, 창명이 발길을 멈췄다.
이에 다른 마인들 또한 줄줄이 자리에 정지했다.
창명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엽현을 바라보았다.
이때의 엽현은 양손을 뒤로한 채,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자의 기색을 갖추고 있었다.
“왜…….”
“살고 싶나?”
엽현의 한 마디에 창명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봐… 우리 아버지께선 마계의 계주다. 알고는 있겠지?”
“그럼 우리 아버지는 누군지 아나?”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은 엽현은 곧바로 후회했다.
우주신정도 모르는 자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알 리가 있겠는가!
창명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이때, 엽현이 성벽 위의 한몽을 가리키며 화제를 전환했다.
“저 흉측한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역겹구나.”
이에 창명이 손을 뻗자, 한몽이 그의 손안으로 순식간에 딸려 들어왔다.
한몽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소계주…….”
창명은 한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엽현을 향해 말했다.
“이 년을 죽이고 싶은 건가?”
“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만들어 주면 좋겠군.”
엽현의 말에 창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대답을 마친 창명은 손아귀의 한몽을 쳐다보았다.
“소, 소계주! 살려주십시오! 소계주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때, 창명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끊었다.
“너 따위가?”
창명이 손을 뿌리치자, 한몽이 순식간에 성벽에 날아가 박혔다.
순간, 한몽의 몸이 갑자기 화염에 휩싸였다.
“아악-!”
산 채로 구워지는 한몽의 비명이 성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화염은 조금씩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창명이 다시 엽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됐나?”
창명의 음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때,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꺼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창명은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윽고 창명과 그의 부하들의 모습이 구름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때, 한몽이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엽현에게 소리쳤다.
“이 간사한 놈! 개자식! 널 저주하겠다! 넌 나보다도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여인일세. 네가 아무리 개처럼 충성해봐야 저들은 너를 벌레로도 보지 않는다. 아직도 모르는 건가?”
“죽어! 죽어버려! 마인들이 널 갈기갈기 찢어 사방에 뿌려버릴 거다!”
이에 엽현이 씩 웃더니 한몽을 향해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안 죽을 거지롱! 천년만년 잘 먹고 잘살 거지롱! 어쩔 건데? 어쩔 건데? 하하하하!”
급기야 방귀까지 뀌어대는 엽현이었다.
“푸흡-!”
이 모습을 본 한몽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련이 멈추는가 싶더니 그녀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분을 이기지 못한 까닭에 기혈이 뒤틀려 죽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피 흐르는 눈으로 엽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엽현은 죽어버린 한몽에 더 이상 관심 두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공이 다시 봉인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몸을 숨겨야 했다. 혹시라도 저들이 속았다는 걸 눈치채고 돌아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 * *
한편, 빠르게 마계로 복귀하던 창명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공중에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해.”
창명의 중얼거림을 들은 노인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놈이 왜 우리를 이렇게 쉽게 보내 준 거지?”
이 말을 들은 순간, 마인 강자들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그랬다.
엽현이 그토록 강한 무인이라면 왜 자신들이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속은 것 같군!”
창명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노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가 단 두 초식 만에 천미경 강자 둘을 제거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순간의 기운은 이미 우주신정에서 왔다는 여인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창명이 고개를 저었다.
“놈이 정말로 범검지상의 경지였다면 우리가 이대로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리 없다. 우리를 순순히 보내 준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우리를 죽일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지. 당연히 놈이 범검지상이라는 것도 우리의 착각이었던 거다.”
“그럼… 회군합니까?”
창명이 인계성이 있는 쪽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만약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면 그건 놈이 두려울 것이 없는 범검지상의 강자라는 의미일 테지. 하지만 만에 하나 이미 도망친 후라면…….”
순간, 창명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회군한다!”
말을 마친 순간, 창명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나머지 마인들 역시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창명 일행이 성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땐 이미 엽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창명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속았다! 놈에게 속은 거야!”
순간, 마인들 전체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명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 줄이야!
“놈은 절대 범검지상이 아니다! 천미경 둘을 죽였던 것도 필시 어떤 비술이나 신물을 사용했던 게 분명하다!”
창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찾아! 당장 놈을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말에 마인들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번에 엽현을 죽이지 못하면 마계의 명예는 크게 실추될 것이 분명했다.
특히, 대군을 이끌고 온 창명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마계의 소계주가 미천한 인간에게 농락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그의 평판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귀에 이미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순간, 창명의 표정이 귀신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곧, 수많은 강자들이 마계를 벗어나 엽현 찾기에 나섰다.
엽현이 살아서 도망쳤다는 소식은 마계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마인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엽현을 추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마계 역사상 가장 단결된 순간이었다.
한편, 이름 모를 산맥 깊숙한 곳을 찾은 엽현은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한번 심검을 생성해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매번 성공하려는 그 찰나, 청삼남의 검기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실패를 거듭했다.
청삼남의 검기는 엽현의 경지뿐 아니라, 검도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던 것이었다.
엽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청삼남이 자신을 이리로 보낸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 검도를 수련하라는 의도였을까?
그런 생각이었다면 범검을 돌파한 후, 봉인이 사라졌어야 한다.
그렇다면 검도 수련 외에 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혹시 육신의 수련을 위해서?
엽현은 고개를 숙여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 중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자기와 불사혈맥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터라, 회복 또한 매우 더뎠다.
이때, 엽현은 은연중에 육신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구력이 좋아졌다고나 할까?
엽현은 의구심을 잠시 접어 두고서 방금 전의 싸움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비록 많이 얻어맞긴 했지만, 수확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은 바로 잠시나마 범경을 돌파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경지와 혈맥에 봉인이 걸려있지 않은 상황이었더라면, 당장 목소도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청삼남이 남겨 놓은 검기는 범검지상의 경지가 된 지금에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단 한 줌의 검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엽현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삼검 사이에는 여전히 엄청난 실력 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엽현은 다시 육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경지와 검도가 봉인 당한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경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요수의 피가 필요하다.
물론 부상을 당하고 회복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육신의 강도를 조금씩 강도를 올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 수백 년이 걸릴 법한,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불사혈맥이나 자기가 없다면 맞다가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역시 가장 쉬운 방법은 작은탑이 보관 중인 요수의 피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엽현은 천천히 눈을 감고 작은탑과의 감응을 시도했다.
하지만 작은탑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옥탑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때, 엽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삼남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다는 의미는 이전에 이미 마역에 방문한 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건 소백 역시 이곳에 왔었다는 것!
소백은 자신이 들른 곳에는 언제나 상자를 남겨 놓는 습관이 있었다.
상자!
엽현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소백이 남긴 상자에는 그녀의 분신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소백의 분신이라면 작은탑을 소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아가 자신의 몸에 걸린 봉인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다!
제아무리 청삼남의 검기라도 소백의 체면을 무시할 순 없을 테니까!
상자를 찾아라!
하지만 엽현의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계의 지리에도 익숙지 않은 자신이 무슨 수로 상자를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이곳의 인간들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니, 비협조적으로 나올 게 뻔했다. 아니, 만나는 즉시 마인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 시킬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때, 갑자기 엽현 머리 위의 공간이 갈라지면서 신비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엽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의 주변은 온통 붉은 실선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액난인과선!
액난인과선의 등장과 함께,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뒤이어 먹구름 안에서 무수히 많은 뇌전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액난겁과 천겁이 동시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 장면을 본 순간, 엽현의 표정은 더욱 망연자실해졌다.
“이제는 액난법칙조차 막아주지 않다니…….”
이때, 엽현이 허공을 향해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부자의 연을 끊읍시다! 이럴 거면 그냥 남남으로 지내자고! 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