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606
1607화 그건 불량품이다
청삼남은 엽현과 함께 어검을 타고서 이동했다.
이때, 청삼남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사실 그는 엽현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되어 다 자랄 때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엽현을 곁에 두고 키웠더라면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성장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가 경계했던 것은 엽현이 강한 아버지 밑에서 유약하게 자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엽현은 아주 강하지는 않지만, 나이치고는 매우 성숙했고, 무인이 꼭 갖춰야 할 근성과 독기도 충분했다.
한편, 엽현은 청삼남과 함께 있는 것이 다소 불편했다.
거의 홀로 자라다시피한 그로서는 부모라는 존재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청삼남이 떠나야 했던 이유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신비인의 원류를 찾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런 원망은 씻은 듯 사라졌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동생인 엽령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 어떤 변명을 들이밀어도 청삼남을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이때, 청삼남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정지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공간을 긋자,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 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산맥이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지령족(地靈族)의 땅이다. 지하 깊은 곳에 터전을 잡고 사는 자들이지. 예전에 이쪽을 지나가다가 그들이 멸망할 뻔한 걸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꾸나!”
청삼남은 엽현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나아갔다.
곧, 그들 앞에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동굴 앞에 멈춘 이때, 갑자기 웬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왜소한 체구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경계하던 노인은 청삼남을 발견한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 수호신…?”
“하하, 산구 녀석은 아직 살아있느냐?”
이때, 노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수호신…….”
노인은 감정이 북받친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바닥에 머리를 찧을 뿐이었다.
이에 청삼남이 웃으며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노인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 세워졌다.
“자, 안내하거라.”
청삼남의 말에 노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수호신께서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노인은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청삼남이 웃는 얼굴로 엽현에게 말했다.
“지령족은 매우 특수한 종족이다. 전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제련기술만큼은 일류라 할 수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최고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수많은 세력들이 이들을 노렸고, 그들의 다툼에 휘말려 멸족할 뻔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바로 이때, 동굴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윽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 중에 가장 앞에 있던 백발의 노인은 청삼남을 발견하자마자 양팔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양 형, 보고 싶어 죽을 뻔했소!”
“하하, 산구! 여전하구나!”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잠시 동안 회포를 풀었다.
“양 형, 그런데 이 젊은이는 누구요?”
“내 아들.”
엽현이 산구를 향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산구 백부(伯父), 처음 뵙겠습니다. 엽현이라 합니다.”
상대는 부친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이니, 당연히 백부라 부르는 것이 옳았다.
백부라는 소리에 산구가 잠시 당황해하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조카야! 가자!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이때, 청삼남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많이 없다. 이 분신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이에 산구가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본체로 오지 않고선…….”
“하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산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청삼남이 엽현의 어깨를 툭 치며 대답했다.
“이 아이를 부탁한다. 가능하겠느냐?”
“조카 하나 보살피는 걸 뭘 부탁씩이나 하고 그러시오?”
“하하, 고맙구나.”
“에헤이,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래두.”
산구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오자 청삼남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산구, 쇠만 만지지 말고 가끔 무공 수련도 좀 하거라. 다음에 만날 때까진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순간, 청삼남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자 엽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아버지! 혹시 뭐 남겨줄 물건 같은 거 없으십니까?”
청삼남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검 이후의 경지를 파범(破凡)이라 한다. 그럼 파범 다음은 뭔지 아느냐?”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 경지에 곧장 이르고 싶으냐?”
순간, 표정이 환해진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이 꼰대가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을 하려는 것일까?
“하하, 가서 잠이나 실컷 자거라. 꿈속에서는 뭐든 이룰 수 있는 법이니까! 어디서 날로 먹으려 드느냐!”
이 말을 끝으로 청삼남은 완전히 사라졌다.
엽현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엽현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산구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엽현은 황당했다.
아비란 작자가 이런 식으로 아들을 놀린단 말인가!
이때, 산구가 엽현의 팔을 끌어당겼다.
“조카야 이만 가자꾸나. 덕분에 오늘 하루 웃을 거 다 웃었구나! 하하하!”
“…….”
두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지령족 사람들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굴 안쪽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엽현은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성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려 백여 장가량 되는 높이의 성은 성벽이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어떤 흠이나 하자를 발견할 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일행이 성 앞에 도착했을 때, 산구가 크게 소리쳤다.
“지령보고(地靈寶庫)를 열어라!”
지령보고!
이 말에 지령족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는 지령족의 금역으로 오직 족장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지령족 최고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 달리 말해 단조사(鍛造師)들에게 가장 높은 직급은 전기단조사(傳奇鍛造師)다. 지령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은 전기단조사의 작품 중에서도 흠이 없는 것뿐이었다.
흠이 없는 완벽한 보물!
이 정도 보물을 만드는 것은 전기단조사에게도 극히 어려운 작업으로, 적어도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수천 년 이상이 걸리는 일도 허다했다.
엽현은 보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직 보진 못했지만, 주변의 반응으로 미루어 이번에야말로 크게 횡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엽현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경솔한 행동으로 눈앞의 보물이 날아가 버리는 일만큼은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산구는 엽현을 데리고 어느 거대한 수정 전각 앞에 도착했다.
전각 입구는 두 명의 흑의노인이 지키고 있었다.
바로 지령보고의 수호자들이자, 지령족 최강의 무인들이었다.
엽현은 이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대란 걸 알 수 있었다.
파범경에 이른 엽현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가 극히 드물다는 걸 고려하면 이는 매우 진귀한 경우였다.
이때, 외쪽에 서 있던 노인이 물었다.
“방금 전 그 기운, 정말로 수호신이었습니까?”
산구가 웃으며 대답했다.
“좌 장로도 느끼셨구려. 그가 왔다 갔었소.”
“아…….”
“그리고 여기는 그의 아들이오.”
엽현이 재빨리 두 노인을 향해 예를 갖췄다.
“엽현이 두 분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좌 장로는 엽현을 자세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와 같은 혈맥이로구나…. 너무 예 차릴 것 없으니, 고개를 들거라.”
이때, 산구가 말했다.
“좌 장로, 이 녀석과 안으로 들어가 보물 몇 점을 고르게 하고 싶소.”
좌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겠지요.”
이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우 장로가 돌연 입을 열었다.
“세 점을 고르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세 점!
이 말을 들은 순간, 주변에 있던 지령족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족장이라 할지라도, 천 년에 한 번 보고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게다가 한 번에 단 한 점밖에 고를 수 없다.
그런데 저 젊은 청년에게 세 점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니!
하지만 이 결정에 불만을 가진 자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수호신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좌 장로가 말했다.
“쪼잔하게 세 점이 뭐요? 아이야, 안에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걸로 열 개를 골라 보거라.”
보물 열 점!
순간, 지령족 사람들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산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점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열 점이라니!
알다시피 보고 안에 있는 물건은 각각 성 하나와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지 않은가!
우 장로는 좌 장로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그럼 들어가십시오.”
산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엽현과 함께 보고 안으로 향했다.
이때, 청량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저도 들어가게 해 주세요!”
이 목소리에 엽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대략 십칠 세 가량으로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였으며, 허리춤에는 작은 망치를 차고 있었다.
소녀의 등장에 산구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넌 들어올 수 없다.”
“아버지! 그저 대가들의 작품을 구경해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보물을 바라는 건 아니라구요!”
“하아…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규칙이란 게 있는 법이다. 나중에 네가 족장이 되면…….”
이때, 엽현이 넉살 좋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백부, 같이 가게 해 주시지요. 장로님들 그래도 되겠습니까?”
엽현의 말에 좌 장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수호신의 아들이라면 이 정도 호의를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좌 장로.”
이때, 소녀가 웃으며 엽현에게로 다가왔다.
“오빠, 고마워요.”
“하하, 난 엽현이라 한다. 너는?”
“산령(山靈)!”
“예쁜 이름이구나! 그럼 같이 들어갈까?”
장로들의 허락도 있겠다, 엽현은 산령과 함께 보고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감동 어린 눈으로 엽현을 응시하던 산구 역시 곧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엽현 등이 보고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 우 장로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열 점이라니…….”
“너무 속 좁게 굴지 마. 어차피 그의 부친이 아니었더라면 모두 없어졌을 물건들이었어.”
“…….”
“그리고 저 아이는 파범경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우 장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좌 장로의 말뜻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엽현은 수호신의 아들이자, 파범경의 고수다.
또, 누가 알겠는가?
지령족에 위기가 닥쳤을 때 엽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올지…….
보고 안을 걷던 중, 엽현은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백부, 예전에 고대 방패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매우 낡긴 했지만, 어떤 기운이든 튕겨 내 버리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혹시 지령족의 보물일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산구가 웃으며 답했다.
“아마 무갑순(巫甲盾)을 말하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우리 무령족의 물건이 맞다. 다만, 무갑순은 불량품에 불과한 것이라 지령보고에 들어올 자격은 없었지. 당시 우리는 네 부친을 이곳에 데려와 원하는 것을 고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무갑순을 집어 들었지.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장난감으로 주겠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그가 그런 쓰레기를 좋다고 들고 가는 걸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기억이 있구나.”
불량품!
쓰레기!
엽현은 순간적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갑순이 쓰레기일 뿐이라면 보고에 있는 보물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