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618
1619화 무적의 소녀
이 말에 엽현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황급히 시공사화를 발동시켰다.
그가 막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이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 선혈이 튀었다.
다름 아닌 엽현의 피였다.
엽현이 사라지고 난 직후, 그 자리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무명의 살수 소녀였다.
소녀가 나타난 이때, 무가 역시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순간 소녀가 또다시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를 보자 무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무언가를 감지한 순간,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가는 두 사람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소녀는 절대로 엽현을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성역.
돌연 공간이 갈라지면서 엽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발을 디딘 순간 그의 입에서 한 움큼의 선혈이 튀어 나왔다. 이때, 그는 복부에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엽현은 억지로 신형을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곧바로 시공사화를 운용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서 또다시 선혈이 솟구쳤다.
잠시 후, 무가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안색이 창백해진 무가는 곧바로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한편, 공간통로를 빠르게 이동하던 엽현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멀리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벌써 따라잡혔군!’
엽현은 즉시 공간통로를 빠져나왔다. 어느 성역에 모습을 드러낸 엽현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며 일검을 날렸다.
그는 이미 천지현경을 사용해 분신을 불러낸 상태였다.
본체까지 도합 열 한 명의 엽현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열 한 개의 검광이 일제히 공간통로를 향해 날아갔다.
이 순간, 검광이 단숨에 흩어지면서 한 자루 비수가 엽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엽현의 모습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시공사화를 발동시켰던 것이다.
이번에도 다소 늦었는지, 그의 가슴에는 또 다른 상처가 생겨난 상태였다.
그래도 우려와 달리 전신갑이 완전히 쓸모없지는 않았다. 최소한 비수의 위력을 경감하는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신갑이 없었더라면 비수로부터 입은 상처에서 빠져나가는 생기를 붙잡아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현은 억울했다.
지령족 최강의 신물이라면 이 정도 공격은 완전히 차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엽현은 소녀의 비수에 종잇장처럼 뚫려버리는 전신갑이 원망스러웠다.
이 대목에서 정말로 억울한 것은 전신갑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보고에서 나와 처음으로 만난 적이 우주신정 최강의 살수라니.
세상에 이보다 억울한 일이 있을까?
도대체 자신이 주인으로 선택한 이 남자는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기에 저런 강자와 적이 된 걸까?
전신갑의 방어력은 파범지상의 강자라 할지라도 쉽게 뚫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비수는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나 이상했다!
고요한 성역 한복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엽현이 이번에는 우주의를 꺼내 들었다. 그가 우주의의 장거리 전송기능을 활성화한 이때, 허공이 갈라지면서 차가운 무언가가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엽현이 황급히 시공사화를 운용해 자리에서 사라졌다.
또 다른 성역에 도착한 엽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앞에 살수 소녀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동은 시공사화보다도 더 빨랐던 것이다.
엽현이 다급히 시공사화를 조작해 다른 쪽 우주로 이동했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는 마치 두 사람 모두 이동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이었다.
소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엽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공사화가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엽현은 곧바로 은갑에 현기를 불어넣었다.
은갑이 활성화된 순간, 엽현은 곧장 미지의 세계로 진입했다.
이때의 엽현은 여전히 소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를 본 엽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소녀는 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 엽현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안심하던 엽현의 앞에 어느새 소녀가 바짝 고개를 내밀고 서 있던 것이다!
순간, 엽현은 놀란 표정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끝났다!
이것이 엽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도망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엽현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니만큼 반드시 냉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한편, 소녀는 엽현을 똑바로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엽현 역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녀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이를 눈치챈 엽현은 곧바로 현실로 돌아와 그 즉시 시공사화를 이용해 순식간에 자리에서 도망쳤다.
한편, 미지에 세계에 남겨진 소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성공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하얀 광점(光點)이었다.
소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 광점을 노려본 후, 어느 순간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편, 소녀에게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엽현은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는 성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무가가 엽현의 어깨를 홱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직후, 그들이 있던 자리가 길게 찢어지면서 소녀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소녀는 사방을 둘러 본 뒤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엽현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소녀는 다시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엽현은 무가에게 이끌려 어느 대륙에 도착했다. 이때, 두 사람 주변으로 은은한 광막이 존재했다. 이것이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준 것이었다.
“무가 소저, 방금 그 소녀는 도대체 누구였소?”
이에 무가가 엽현을 슬쩍 바라본 후 대답했다.
“우주신정의 살신(殺神)이다.”
“경지는?”
“최소 멸범.”
최소 멸범의 경지!
이 말에 엽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말은 멸범 이상일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가 사용하는 비수는 ‘시신(弒神)’이라 한다. 제 일대 신정 정주가 그녀를 위해 친히 만든 것으로, 흔히 삼대지존신기(三大至尊神器) 중 하나로 여겨진다. 네 갑옷은 물론 우주법칙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지.”
무가의 시선이 엽현의 전신갑으로 향했다.
“그 갑옷이 강한 건 맞아.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흠집 하나 내는 것조차 쉽지 않겠지. 이 세상에 그 갑옷을 쉽게 파괴할 수 있는 존재는 다섯을 넘지 않아. 문제는 그녀가 그중 하나라는 사실이지.”
“…….”
대화하는 사이 무가와 엽현은 어느 거대한 대전 앞에 도착했다.
돌로 만들어진 대전은 겉보기에 무수한 세월을 겪은 것처럼 낡아 있었다.
이때, 무가가 대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선조를 뵙길 원합니다!”
선조!
바로 이때, 대전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대전 안쪽에서 하얀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허공에 떠올랐다.
그림자의 정체는 백의를 입은 노인이었다.
긴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은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눈빛은 초연하기 그지없었다.
노인의 시선은 곧장 무가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로 날 불렀느냐?”
무가가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순간, 노인이 갑자기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선 한 소녀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를 본 순간, 엽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이렇게 빨리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낼 줄이야!
이때, 무가가 재차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조, 저 여자가 저를 죽이려 합니다.”
이 말에 노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죽이려는 건 네가 아닌 것 같다만?”
그의 말대로 소녀는 등장할 때부터 줄곧 엽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이에 무가가 노인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여기 이 남자는 제 부군입니다.”
부군!?
이 말을 듣자 엽현은 귀를 의심했다.
노인 역시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엽현을 자세히 살펴본 순간 그의 표정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파범경… 이렇게 젊은 나이에 범경이라니, 훌륭한 사윗감이로군! 그래…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신고?”
엽현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난데없이 부모님에 대해 묻자 무어라 대답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때, 무가가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
엽현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부친은 저와 같은 검수이십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 대답을 듣자 노인의 미간이 도로 쭈글쭈글해졌다.
무족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강력한 외척이었다.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무가를 향해 말했다.
“일전에 말한 대로 남리족(南離族)의 아이와 혼인을 약속한다면 이번 한 번은 도와주도록 하마.”
엽현은 그제야 노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노인이 물은 것은 부모가 뭘 하는지가 아니라 가세(家世)였던 것이다.
“이 정도면 훌륭한 신랑감 아닌가요?”
무가가 따지듯 묻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우수해봐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사돈 집안의 실력이다.”
이에 무가가 진지하게 엽현을 향해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지?”
엽현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게… 말했듯이 검수인데… 번듯한 집안을 일으킨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꽤나 검을 잘 쓰긴 합니다.”
이때, 노인이 끼어들었다.
“혼자서 잘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젊은이, 그 나이에 파범이 된 걸 보면 장래가 매우 유망하다고 할 순 있겠다. 하지만 이 세상은 혼자서만 잘나서는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개인의 능력은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 잔인한 소리일 순 있겠지만, 이 세상은 결국 배경이 전부다. 강한 배경이 없이는 제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금수저를 물고 타고난 자를 이길 수 없다. 결국 그들의 출발점은 너의 종착점보다도 더 앞서있는 게 현실이니까.”
“…….”
“나도 이런 말 하기가 조금 민망하다. 하지만 너의 집안은 우리 무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이때, 엽현이 무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무족이 우주신정보다 대단한 세력이오?”
“…아니.”
엽현의 시선이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불쾌한 감정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말만 들어서는 우주신정 저리 가라 할 세력인 줄 알았건만 실은 별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때, 노인이 무가를 향해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번 한 번은 대신 출수해 주마.”
“그럼…….”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