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645
1646화 너무나도 약하다
엽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도일에 의해 가로막혔다.
“내가 알기로 네 주변의 여인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준 적은 없지. 예를 들어, 청성에서부터 널 쫓아온… 안씨 성의 아이. 그 여인에게 미래를 약속한 적이 있느냐? 그리고 강국의 공주 강구, 저국의 척발언… 이들의 얼굴이나 기억하느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한다!”
“훗, 그들은 아직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넌? 그들의 마음을 받아주기는커녕 편지 한 장 써서 보낸 적조차 없었지.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오매불망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지.”
엽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원래는 좀 더 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 축 처진 모습을 보니 나도 동점심이 생기는군. 스스로 생각해 보거라. 너는 그 여인들을 기다리게 할 만큼 가치 있는 사내였던가?”
“…….”
“소액은 널 지켜내기 위해 액난을 배신하기까지 했다. 그녀로서는 목숨을 건 셈이지. 하지만 너는 어찌했느냐? 소액을 찾을 노력이라도 했더냐? 그녀가 위험하진 않은지 걱정이라도 해 본 적 있느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 해 보거라. 네가 정말로 그녀를 조금이라도 신경 쓴 적이 있는지. 물론 말로는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행동이다. 내가 알기로 너는 소액을 위해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는 소액을 아프게 할 자격이 없는 남자다!”
엽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 잘못이야.”
“하하, 잘못했다는 건 아느냐? 그동안 너는 무수히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책임질 일을 하질 말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느냐?”
“…….”
“전생이나 현생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매번 여자를 울리고, 또 도망치고…….”
엽현이 문득 고개를 들어 도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를 왜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말 끊지 마! 아직 할 말 다 못했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소액에게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는 거냐!”
“…….”
이에 엽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소액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적이라 생각했어. 내 머릿속에는 온통 널 죽일 생각뿐이었지.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됐고, 네가 날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질 땐 감동하기도 했어. 하지만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란 건 알아. 나는 널 좋아해. 친구라기에는 부족하고, 사랑이라 표현하기엔 지나친… 이게 너에 대한 내 솔직한 마음이야.”
소액이 엽현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하, 그 말을 들으니 조금 더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소액은 엽현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진작 찾았어야 했는데… 많이 서운했지?”
“엄청!”
“미안해.”
이때, 엽현이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내 소액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소액과 똑같이 생긴 인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액은 손안의 인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사과할게.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 이미 다 용서했으니까.”
이때, 지켜보던 도일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액 녀석… 화가 풀렸나보군.”
잠시 소액과 해후를 나눈 엽현은 도일을 향해 물었다.
“도일, 도대체 내게 뭘 부탁한다는 거지?”
도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두 가지 일을 했으니, 마지막 하나가 남았구나.”
도일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긴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책장 안에는 얼핏 보아도 만 권은 넘어 보일 정도의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저걸 다 읽거라.”
“저 책을 다 읽으라고?”
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까지 마치고 나면 가도 좋다.”
“이해할 수 없군. 여기까지 데려와서 한다는 말이 책을 읽으라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후후, 속셈 따위는 없다. 약속대로 저것만 다 읽으면 가게 해 줄 테니까. 참, 오유계에 대한 공격도 앞으로 오 년간 유예해 주지.”
“…….”
엽현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책장을 향해 다가가 마구잡이로 한 권을 골라 펼쳤다. 이 순간, 엽현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책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무학이었던 것이다!
아직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한눈에 엄청난 무학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들은 전부 주인이 모은 것이다. 심법, 무학, 비술, 심지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책들도 존재하지. 감히 말하건대, 우주를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책들일 것이다. 우주법칙이 왜 그리 강한 줄 아느냐? 바로 주인이 여기 있는 책들로 가르쳤기 때문이지. 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감히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다. 특히, 몇몇 무학과 심법은 지금의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인 것이 적지 않다. 앞쪽을 살펴보면 주인의 생각과 심득을정리한 책들이 있다. 읽어 두면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엽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도일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무슨 의도인지 도통 모르겠군.”
“후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가 기억해야 할 건 앞으로 오 년이란 세월이 남았다는 거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운명을 바꿀 소중한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게다.”
서재 앞으로 다가간 도일은 그중 낡은 책 한 권을 골라 엽현에게 건넸다.
“불사제족이 자폭하던 모습을 기억하느냐? 만약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오 년 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지금은 질문 대신 네가 뭘 할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해야 할 때다.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테니까.”
엽현은 도일을 흘끔 쳐다본 후,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 볼수록 엽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소액, 너도 이리 와서 읽도록 해라.”
도일의 말에 소액이 액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액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거라.”
소액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엽현 곁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일의 말대로 서재 안의 책들은 엄청난 보물로, 아무 책이나 골라 밖으로 내보내도 전 우주를 진동하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엽현은 진지하게 책을 읽어가며 때때로 소액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액난 앞에 털썩 앉은 도일은 바둑판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액 이 녀석, 바둑 솜씨는 여전히 형편없군.”
말과 함께 도일이 흑돌 하나를 놓았다.
이 한 수로 인해 궁지에 몰려 있던 흑이 놀랍게도 되살아났다.
이에 액난이 흰 돌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글쎄, 내가 뭘 하려는 걸까?”
능글맞은 대답에 액난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기회를 준다면 죽을 수도 있다. 알고 있겠지?”
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이미 알고 있어.”
“그를 강하게 만들려고 할 생각이라면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붙여선 안 돼. 불사제족을 멸망시킨 건 분명 선을 넘은 거야.”
“아, 알고 있다니까.”
액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무어라 한소리 하려고 할 때, 도일이 바둑판을 베고는 벌러덩 누웠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녀석을 도와왔어. 절체절명의 순간이 여러 번 존재했음에도 돌이켜보면 쉽게 넘어가곤 했지. 중요할 때면 언제나 돕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다들 좋은 역할만 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도일은 고개를 들어 엽현을 흘끔 쳐다보았다.
“긴장하라구. 앞으로는 더 혹독하게 훈련 시켜 줄 테니까….”
어느 순간부턴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대나무 집 안으로 서늘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엽현과 소액은 여전히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따금씩 도일과 액난이 돌 놓는 소리를 제외하면, 집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엽현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대도귀일(大道歸一)이란 책으로, 검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대도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엽현은 장님이 길을 더듬듯 검도를 익혀왔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스승이 있었다. 눈앞에 꽂혀 있는 모든 책이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엽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을.
이후로도 그는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광적으로 책을 읽어갔다. 스스로 얻은 깨달음이 적지 않았고, 모르는 부분은 도일에게 물어서라도 이해하려 했다.
도일 역시 흔쾌히 질문에 응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전히 파범경에 불과한 그였지만, 심득에 있어서는 엄청난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투경험 뿐만 아니라, 학습과 깨달음 또한 중요하다. 학습은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식으로 노력해야 할지 알려주는 방향타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학습은 오히려 올바른 방향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물론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실전이 병행되어야 하지만.
이 한 달 동안 엽현이 얻은 것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고서를 읽어가면서 엽현은 자신이 무도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깨달음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심화됐다.
동시에 그는 우주법칙이 왜 그리 강력한 존재들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식의 교육을 받아 왔으니 강하지 않으려야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기교육의 힘!
그러던 어느 날, 도일이 대나무 집을 떠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 엽현은 보던 책을 놓고서 액난 앞으로 다가갔다.
액난은 엽현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도일은 어딨지?”
사실 엽현은 눈앞의 이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통의 대부분은 이 여인의 조작으로 이뤄진 것이었으니까.
액난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작은 일 하나를 처리하러 갔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이에 액난이 고개를 들어 엽현을 쳐다보았다.
엽현은 들고 있던 책을 액난이 잘 볼 수 있도록 바둑판 위에 펼쳤다.
“그러니까, 여기 ‘대도는 나 자신이다’라는 부분 말인데… 대강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는데, 분명 더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
“…….”
액난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례를 했군.”
엽현이 자리를 떠나려는 이때, 액난이 돌연 입을 열었다.
“‘대도는 바로 너 자신이다’. 이 말의 의미는 대도는 바로 너 자신이니 굳이 대도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알고, 이해하고, 초월하여 마침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앞에는 이해가 가는데 마지막에… 자신을 파괴한다고?”
“나비가 뭔지 알지?”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비는 나비이기 이전에 뭐였지?”
순간 엽현의 눈이 번뜩였다.
잠시, 책을 쥔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엽현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비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을 파괴하라’는 말의 의미는 말 그대로 목숨을 끊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탈바꿈을 일컫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순간, 엽현의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지를 돌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깨달음으로 파범경에 매우 근접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문을 나선 엽현은 광활한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알을 깨고 나온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사람도 변화가 있어야만 또 다른 ‘나’로 탈바꿈할 수 있다.
멸범(灭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