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710
1711화 모자상봉
성문 앞.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엽현은 성벽에 매달려 있는 무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먹은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잠시 후, 엽현이 눈을 감더니 곁에 있던 도일의 손을 꼭 붙들었다.
“도일, 예전의 나는 너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위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
도일은 말없이 엽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부의 감촉을 통해 엽현의 기분을 분명히 느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엽현과 엽신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특히, 이 둘은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만약 당시의 엽신이 엽현의 성격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들을 놔두고 도망쳤을까?
아니다.
도망치기는커녕, 이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려 했을 것이다.
설령 같은 날에 뼈를 묻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반면 엽신은 떠났다.
잠시 과거의 일을 회상한 도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엽현이 십구 명의 무인들을 향해 물었다.
“후회한 적 있소?”
이 질문에 한 남자가 미친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음…….”
고개를 끄덕인 엽현은 그대로 무인들을 지나쳐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주군!”
조금 전 남자의 부름에 엽현이 걸음을 멈췄다.
“주군, 만약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어떤 결정을 하시겠습니까?”
“…원망하는 것이오?”
엽현이 반문하자 남자가 엽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 휘하의 삼천육백 명의 형제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가족 또한 부족에서 축출됐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
“주군! 대답해 주십시오!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처럼 또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계실 겁니까?”
당시 엽신은 자신을 죽이려는 흉수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전혀 반항하려 들지 않았다.
이것이 남자에게는 한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이때, 엽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형제들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
이 말을 끝으로 엽현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벽 위, 엽현의 말을 들은 무인들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호쾌하게 웃어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열아홉 명의 무인은 웃다가 울다가 또 웃었다.
이때, 이들의 머릿속에 엽현의 전음이 흘러들어왔다.
[잠시 기다리시오. 다시 돌아와서 구해줄 테니.]잠시 기다려라!
성문 위, 엽현과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가 지친 듯한 기색을 보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미 늦었으니, 부디 주군께서는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성안은 고요했다. 거리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도일은 엽현의 손을 꼭 붙잡고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이때, 중년 남자 하나가 엽현의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은 한 손에 난옥(暖玉)을 들고 있었다.
이때, 목성과 아비도가 중년인을 향해 예를 차렸다.
“엽천 수호자를 뵙습니다.”
엽천!
중년인은 다름 아닌 엽족의 수호자 엽천이었다.
엽천은 엽현을 쓱 훑어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좀 걷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엽현은 곧바로 엽천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선두에 선 채, 나머지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엽천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돌아온 게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곳엔 길이 있단 말이냐?”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 말에 엽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엔 네가 원하는 길이 없다.”
“…혹시 그 여자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엽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부족의 모든 실권과 성물이 그녀 손에 넘어갔으니까.”
“음… 그렇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수호자님을 살려 둔 겁니까?”
엽천이 엽현을 보며 되물었다.
“몰라서 묻는 게냐?”
이 말에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머니의 편이 되셨군요.”
“…그 방법뿐이었다. 부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선.”
이번에는 엽천이 물었다.
“혹시 원망하는 게냐?”
“하하, 제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미리 내게 언질을 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을.”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저는 어머니께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음…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너와 족장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었으니까.”
말을 하는 도중, 엽천의 표정이 다소 서글퍼졌다.
“당시의 그를 비난하진 말거라. 어미가 독하다고 해서 자식이 어찌 똑같이 행동할 수 있겠느냐? 당시의 그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엽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친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엽신이 받았을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엽족 내에서의 내분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감히 이곳을 찾아왔다는 건 믿을 구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네 몸을 살펴보건대 과거의 인과뿐 아니라. 현생에서의 수많은 인과가 얽혀 있구나. 혹시 현생의 인과로 과거의 인과를 상대할 셈인 게냐?”
이 말을 듣자, 엽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득 그는 엽족의 수호자라는 사람은 과연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엽현은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되물었다.
“제가 어떤 세력을 동원해 엽족에 대항하려 한다… 뭐 이런 말씀입니까?”
“글쎄, 영생계 밖에 엽족에 대항할 세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세상일에는 절대라는 게 없는 법이니까. 혹시 이 우주 어딘가에 우리보다 강한 세력이 있을지 모르는 법이지.”
이 말을 듣자 엽현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엽족은 예상 외로 자만에 빠져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엽천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의 내전으로 수많은 강자들이 죽었다. 그때의 손해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고.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엽족은 끝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기필코 절 죽이려 들 겁니다.”
“…….”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입니다.”
이 말을 듣자 엽천이 우려 섞인 눈빛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네 뒤에 분명 어떤 강력한 세력이 있는 게 틀림없구나! 그래서, 기어이 복수를 하겠다는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돌아온 건 그저 살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널 죽이고자 한다면 영생계 내에서 널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여, 선조께서 중재에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선조를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족장뿐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네 편을 들어 주실지도 확실하지 않고.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당시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대세가 기운 상태다.
선조가 개입한다 한들 부족의 균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족장의 편을 들어 줄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엽현은 더 이상 그때의 촉망받던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곁에 있는 엽천조차 자신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은가.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엽천이 자리에 멈춰 섰다.
엽현이 의아함을 느낀 순간, 두 사람 앞에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인은 말없이 엽현을 바라보았다.
엽현 또한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지난날, 엽신의 또 다른 조력자인 엽간(葉幹) 사령관이 틀림없었다.
이로써 세 명의 조력자 중 둘이 엽현과 마주한 셈이었다.
이때, 엽천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내 역할은 널 여기로 데려오는 것까지다.”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엽천은 손가락으로 정면에 있는 대전을 가리켰다.
“그녀는 저기에 있다. 저곳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엽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조심하거라.”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떠났다.
이때, 도일 등이 엽현 곁으로 와서 섰다.
“걱정마. 우리가 있으니까!”
이 말에 엽현이 도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여기 남아. 들어가는 건 나 혼자야.”
“뭐? 그게 무슨…….”
“오랜만에 모자가 단둘이 대화하게 해 줘.”
엽현의 굳은 표정을 본 도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엽현은 검주령을 꺼내 도일에게 건넸다.
“만에 하나 내가 죽거든 청아와 아버지께 바로 알려 줘. 조금 전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죽여야 해. 알겠지?”
“…….”
말을 마친 엽현은 대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일은 아무 말 없이 손안의 검주령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엽현이 자신에게 검주령을 넘긴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도일은 고개를 들어 홀로 걸어가는 엽현을 바라보았다.
이때의 엽현은 더 이상 어떠한 비장의 패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즉,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였다.
이때, 도일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여기서 검주령을 사용한다면 누군가 정말로 도와주러 올까?
청삼남의 검도연맹이 영생계의 엽족을 상대할 정도로 강할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곤 엽족이 매우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 * *
엽현이 대전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흑의 노인이 엽현 앞에 나타났다.
등이 다소 굽은 노인은 엽현을 향해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엽현이 먼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날 죽일 생각이오?”
“…내가 못할 것 같나?”
엽현이 씩 웃으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럼 덤비시던가.”
순간, 노인이 살기를 내뿜으며 주먹을 쥐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기세였다.
“후후,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움직인다면 그건 좋은 개가 아니지. 그렇지 않소?”
“흥! 노부는 족장의 개가 맞다. 그런데 너는? 너는 이미 개만도 못한 존재라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응? 주인의 아들을 두고 개만도 못하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군. 주인의 아들은 마찬가지로 주인이 아닌가?”
순간,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를 본 엽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의 개가 된 것을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이가 있다니… 그대는 소탑보다도 더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구려.”
이때, 계옥탑 안에 있던 소탑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낯짝이 두껍다고 그래! 다 듣고 있는데 그런 말 하기 있기야!?”
이에 엽현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두들겼다.
“아! 그렇구나! 다음에 험담할 땐 네가 없을 때 하면 되겠구나!”
“…….”
엽현은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노인을 지나쳐 대전 안으로 향했다.
노인은 그런 엽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점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대전 문을 열어젖힌 엽현은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은 고요했고, 휑했다.
그리고 엽현의 정면, 대전의 상석에는 한 여인이 손안의 두루마리를 바쁘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엽현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여인 앞에 섰다.
“네가 적적해할까 봐, 네 친구들도 영생계로 초대했다.”
여인이 읽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아들 생각하는 건 이 어미뿐이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