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727
1728화 검은 관
엽현은 엽릉천이 떠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때, 백의가 곁으로 다가왔다.
“소주, 죽이시겠습니까?”
엽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 여인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고통일 거요. 이만 갑시다.”
엽현이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백의는 주변의 엽족 무인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엽현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엽릉천은 어느 대전 앞에 걸음을 멈췄다.
흐릿한 눈빛을 보이다가 이내 실없이 웃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다.
십만 년의 수행 끝에 그녀가 얻은 것은 차디찬 공허함이었다.
무적?
복수?
그 무엇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동시에 영원히 자신을 지켜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던 그 소년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엽릉천은 마침내 대전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돌계단에 기대어 손안의 나무 인형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 어미가… 미안하구나…….”
한 시진 후.
순찰 중이던 엽족 무인 하나가 쓰러져 있는 엽릉천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왔다.
“조, 족장…”
“…….”
조심스레 엽릉천의 얼굴을 살핀 무인은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의 안색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엽릉천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사방에서 엽족의 강자들이 장내로 몰려들었다.
엽릉천을 발견한 순간, 무인들의 안색이 하나 같이 백지처럼 변했다.
엽릉천이 죽었다!
엽족이 결국엔 망하는구나!
무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엽릉천이 없는 엽족이 과연 영생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이때, 엽천이 엽릉천 곁에 다가와 그녀 곁에 떨어져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를 펼친 엽천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엽신… 복권(復權).”
복권!
이는 엽신의 실추된 지위와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의미였다.
엽천은 엽릉천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에 나머지 무인들 역시 족장의 마지막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 * *
엽계의 경계.
소천과 혁랍염이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엽릉천은… 효웅이라 칭할 만한 여인이었소.”
소천의 말에 혁랍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이 말을 이어갔다.
“엽릉천과 엽신… 두 사람 모두 앞 세대의 영광을 뛰어넘어 부족 전체의 운명을 바꿀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소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쉽구려. 내전만 아니었더라면 마가신족을 뛰어넘을 거대 부족이 탄생했을 것을…….”
“확실히 아쉽기는 하나,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끝나게 되어 다행 아니겠소?”
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 두 모자가 반목하지 않고 힘을 합쳤더라면 영생계의 나머지 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혁랍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 족장, 엽족에게 살 길을 열어 줍시다.”
소천이 혁랍염을 쳐다보자 혁랍언이 나직하게 말했다.
“엽족을 청소할 생각을 한 거 아니었소?”
“…그렇소.”
“내 생각에 엽족을 살려주는 게 좋을 것 같소.”
“…….”
“엽현은 엽족을 놓아 주었소. 엽신에게 그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엽족을 멸할 순 없었던 거겠지. 우리 역시 이번 일로 적지 않은 이익을 거두었는데, 계속해서 엽족을 노리는 건 보기 썩 좋은 그림은 아니오. 혹시 아시오? 이번에 은혜를 베풀면 또 어떤 선과로 돌아올지!”
소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살려 뒀다가 나중에 엽신 같은 천재가 또 나타나면 우리만 곤란한 것 아니오?”
“하하하! 만약 그런 자가 또 나타난다면 그땐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지 않소?”
소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갑시다!”
이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 * *
엽현은 엽계를 떠난 후, 검맹과 백의 등을 데리고 제천성으로 향했다.
엽신의 부친에 관해서는 일단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소주, 아무래도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백의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돌렸다.
“엽신의 부친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방금 전주에게 받은 소식에 의하면 그 흑의여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 합니다.”
이 말에 엽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사실이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즉, 제천성의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천성 주변에 다른 세력이 또 있소?”
이때, 오강이 끼어들며 말했다.
“상고천계(上古天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엽현이 오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상고천계는 매우 신비한 지역으로 지금까지 제천성과는 크게 엮인 일이 없는 곳입니다.”
이에 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상고천계라면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여자가 상고천계의 무인이라면 정보를 캐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제 생각에 엽신의 부친은 상고천계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엽릉천이 그렇게 강했던 것도 일전에 상고천계에 다녀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엽현의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쯤에서 일이 마무리되길 희망했었다.
불운한 엽신, 가련한 엽릉천…….
더 이상 이 구질구질한 식구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실제로 그 희망은 어느 정도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엽신의 소멸과 함께 그의 인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엔 일렀다.
엽신의 일이 해결되자, 이번에는 그의 부친이 나타났던 것이다!
엽현은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진저리가 났고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주,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천성에 계시는 동안, 상고천계의 일은 천행전과 검맹에서 맡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이에 오강이 거들고 나섰다.
“검치가 이미 상고천계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만약 그쪽의 세력이 정말로 소주를 노린다는 게 확인되면, 우리 검맹은 즉시 상고천계에 선전포고 할 것입니다.”
선전포고!
엽현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하하! 당연하지 않습니까? 겁도 없이 소주를 노리는 무뢰한들과 대화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엽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건 원치 않았지만, 상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칠 준비가 돼 있었다.
이때, 안란수가 엽현 앞에 나타났다.
안란수가 나타나자, 장문수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엽현은 이곳에 오면서 안란수와 장문수를 데려왔다.
소령과 엽령도 있었지만, 엽령의 경우 계옥탑 안에서 폐관 중이라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안란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다 온 거야?”
“아직 좀 남았어.”
엽현이 웃으며 대답하자, 안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문제가 있는 거지?”
“그래, 맞아!”
“성가신 일이야?”
안란수의 질문에 엽현이 고개를 젓고는 성공 깊은 곳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상대가 누구든 절대 봐 주는 일 없이 끝까지 갈 거야.”
안란수는 엽현의 얼굴을 살폈다.
엽현이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엽현이 아니라 법력이 높은 스님이라도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장문수가 입을 열었다.
“백의 소저, 제천성에 강자가 많소?”
백의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영생계보다야 확실히 많소.”
“그럼 성안의 세력 분포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소?”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성 안에는 네 개의 거대 세력, 여섯 개의 대 부족, 그리고 열두 개의 종문이 있소. 이 중 네 개의 거대 세력은 검맹, 천행전, 천부(天府)와 신궁(神宮)을 가리키는 것이오.”
백의는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 개의 세력 중 신궁은 신비한 구석이 있소. 평소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오. 그나마 영생지기가 출현할 때, 잠깐 나타나는 게 전부요.”
엽현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영생지기?”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성에는 영생원천(永生源泉)이란 게 존재합니다. 물론, 영생계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정순한 것이지요. 우리 수준의 무인에게는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영생계의 영생지기는 그대들에게 별 효험이 없소?”
“물론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미세한 수준입니다. 그들이 가진 영생원천은 등급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만약, 쓸 만한 정도였다면 영생계는 이미 오래전에 침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던 까닭은 그들의 영생지기가 볼품이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영생계의 영생지기는 기껏해야 천 년 정도 후면 완전히 고갈될 것입니다. 다른 세계에서 영기를 끌어 오지 않는 이상, 곧 죽음의 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원천이란 것에 등급이 있단 말이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것부터 나열하자면, 법계(法阶), 영계(灵阶), 성계(圣阶), 그리고 신계(神阶)로 나뉩니다. 영생계의 영생원천은 최하 등급인 법계인 반면, 제천성에 있는 것은 성계로 그 차이가 작다 할 수 없습니다.”
“영생원천이라는 것이 이 우주에 얼마나 존재하는 것이오?”
백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나,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영생원천이 발견됐다 하면 피바람이 부는 것은 예삿일이지요. 제천성에 처음 영생원천이 출현했을 때에도 수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중에는 절정의 고수들도 부지기수였지요. 당시, 우리 천행전 역시 무려 여섯 명의 등천경 강자를 보내 주어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엽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제천성에 등천경 정도의 강자는 흔한 것이오?”
백의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제천성에서도 등천경은 초절정 고수로 여겨집니다. 성 전체를 다 합쳐도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 말을 듣자 엽현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천신만고 끝에 등천경이 되었는데 별 거 아니라고 한다면…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오.”
순간, 엽현을 바라보는 백의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천신만고 끝에 등천경이 되었다고?
가만히 있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백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속에 있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어리석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언짢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십만 년을 넘게 수련해 온 자신들은 고작 허무경에 머물러 있는데, 엽현은 멸신경부터 등천경까지 단 번에 승급을 한 게 아닌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일보등천(一步登天)이 아닐까?
백의는 문득 세상이 엽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갑자기 정면의 공간이 쩍 갈라지더니, 검은 관 하나가 튀어 나온 것이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검은 관은 엽현 앞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