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오늘은 싸울 기분이 아니다
“내가 그런 쓰레기로 보이시오?”
“그런 사람으로 보이오.”
연만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자 엽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 소저,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뭐, 상관없나? 나 역시 그대에게 흥미가 없으…….”
이때, 연만리가 갑자기 몸을 숙이며 엽현을 향해 일 장을 뻗었다. 가히 번개 같은 속도였다.
엽현이 순간 당황하며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연만리의 장에 주먹이 닿는 순간, 엽현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건 마치 솜뭉치를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엽현이 급히 손을 빼려 할 때, 연만리가 그의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엽현을 복부를 향해 날아드는 그녀의 무릎!
퍽-!
엽현이 그대로 삼십여 장을 날아갔다.
“미쳤어!?”
연만리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손이 근질거려서.”
그 말을 들은 엽현이 순간 울컥하여 연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만리 역시 엽현을 향해 보법을 밟으며 다가갔다. 이때, 그녀의 신형에 기이한 변형이 발생했다. 심지어 그녀가 지나가는 공간마저 심하게 뒤틀렸다.
이때, 엽현의 전의가 담긴 일 권이 떨어졌다.
쾅-!
하지만 밀려난 것은 오히려 엽현이었다.
그는 원래 있던 곳에서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나갔다.
연만리를 바라보는 엽현의 눈빛이 어두웠다.
“검을 뽑는 게 좋을 것이오.”
연만리의 말과 거의 동시에 한 줄기 검광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연만리는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검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겨우 반 장 가량 남았을 때, 검광이 갑자기 비행을 멈추더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는 것은 검광이 아닌 그 공간이었다. 마침내 공간 안에 완전히 갇힌 검광이 그대로 소멸됐다.
이에 엽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만리가 천천히 엽현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만법경에도 가짜 만법경과 진(真) 만법경이 있소. 가짜 만법경은 그저 만법의 경지에만 이르렀을 뿐, 아직 만법의 비밀에는 다가가지 못한 자를 일컫는 것이오. 만법경의 비밀은 바로 공간에 있소. 진정한 만법경에 이르러 공간의 비밀을 깨우친 자라야만이 공간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오.”
연만리가 엽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청주의 만법경 강자 중 대부분이 이 비밀을 알지 못하지만, 중토신주에는 적지 않은 진 만법경 강자들이 있소. 어쩌면 만구산에서 이러한 만법경 강자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소. 만약 그때도 만법경 강자들을 얕보았다간 지금처럼 낭패를 보게 될 것이오.”
엽현이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에 감사하오.”
눈앞의 연만리는 두말할 것도 없는 진(真) 만법경 강자였다.
비록 방금 전의 일 전이 목숨을 건 싸움은 아니었지만, 단 두 합만으로도 진정한 만법경 강자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무도는 한 순간도 소홀할 수 없었다.
“만구산 까지는 하루 반나절의 여정이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렇게 연만리와 갑옷의 여인은 자리를 떠났다.
창란전에 도착한 엽현은 기안지와 묵운기 등을 불러 들였다.
곧, 창란학원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창란전에 모였다.
한 시진 후, 엽현은 창란전을 떠났다. 이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기안지, 묵운기 그리고 백택이었다.
창란도병은 이번에는 동행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중토신주 용병들과 세력들이 여전히 청주 일대에 득실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청주에 남아 그들을 견제해야만 했다.
운선에 올라탄 엽현은 즉시 뱃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청주를 구해야 한다.
엽현은 스스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청주를 구하기 위해 운선에 올라타다니!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엽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국은 그의 조국이고 집이었다. 이 곳엔 그의 친구들 형제들 그리고 창란학원이 있다.
양계성에서 벌어진 일은 엽현으로 하여금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악함은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하려하는 창란주의 무인들은 피에 굶주린 들개 떼와 같을 것이다. 그 악함의 정도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했음이 틀림없다. 그런 자들이 청주에 들어온다면 얼마나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인가!
무인의 세계에서 약한 자는 죄인이요, 언젠가 잡아먹히게 될 양에 불과했다.
엽현은 세상을 구원하고 싶지도, 구원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을 따름이었다.
내 사람은 누구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엽현은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감미로운 향기와 함께 한 여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연만리였다.
연만리가 운선 아래를 바라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로구나! 하지만 이 아름다운 산과 강에는 얼마나 많은 시체와 피가 흐르고 있을지…….”
연만리가 문득 엽현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다 그대의 사부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소. 청주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은 단순히 영기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본디 사람의 본성이 악했기 때문인 것 같소. 지금은 착했던 사람도 악해지고 악했던 사람은 더 악해졌구려!”
선악!
이를 생각할 때마다 엽현은 머리가 지끈 거렸다.
그의 검도는 선악검의였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란 말인가?
엽현이 가만히 서서 마치 도를 닦는 선인처럼 생각에 잠겼다.
연만리가 엽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갔다.
엽현이 무언가를 깨닫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운선은 계속 구름을 따라 만구산으로 흘러갔다.
* * *
중토신주, 혈종.
지독한 피비린내로 가득 찬 어느 대전 안에는 삼십 명이 넘는 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전의 가장 상석에는 검은 옷차림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혈종의 종주 혈월(血越)이었다.
그의 발밑에서 한 노인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청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있었다.
“대장로와 삼십여 명의 정예 제자들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머리는 모두 양계성 위에 걸려 독수리의 먹이가 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노인이 혈월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소종주(少宗主) 역시 엽현에 의해 그만 머리가…….”
순간 장내에 정적이 일었다.
혈월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때, 다른 한 노인이 분노의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엽현이란 애송이는 우리 혈종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종주,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때, 혈월이 방금 말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엽현이란 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청주는 그저 오랑캐 소굴일 뿐인데 굳이 자세히 알 필요가…….”
“오랑캐? 신합경의 몸으로 만법경 강자를 살해한 자가 그저 그런 오랑캐란 말이냐! 그것도 약관도 되기 전에 검주가 된 사내가!?”
“그것이… 저…….”
혈월이 답답하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론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된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부딪쳐선 안 될 것이야……. 마종(魔宗)에 다녀오겠다. 내가 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엽현을 찾아가지 마라!”
중토신주, 합환종의 합환전 내부.
합환종 역시 혈종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만법경 강자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그들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때, 합환전 안에서는 엽현의 처리를 두고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대전 상석에 앉아있는 중년인인 합환종 종주 이연(離淵)은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하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시장바닥같이 떠들썩하던 장내가 점차 조용해지기 시작하더니, 모두의 눈빛이 이연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낸다 하더라도 결국 최종적으로 이연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내는 평정을 되찾았다. 이때, 이연이 두 눈을 뜨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는 그의 손에 의해 청주 창목학원이 멸망했고, 암계가 완전히 청주에서 발을 뺐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목이 아직도 붙어 있고, 북한종이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에 무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상대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이연의 눈빛이 장내 모든 무인들을 쓸어갔다.
“창목학원의 실력은 우리 합환종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 그들조차 엽현을 어쩌지 못했다. 우리가 가볍게 볼 수 있겠느냐?”
“그러면 여기서 물러나자는 말씀이십니까?”
한 노인이 묻자 이연이 그를 보고 대답했다.
“이대로 계속 상황이 흘러가면 우리 합환종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노인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이연이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 합환종은 청주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다. 복수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좌가 엽현을 직접 만나본 후 판단하겠다!”
말을 마친 이연이 순식간에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운선 위.
엽현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서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답을 구하고 있었다.
‘선과 악은 무엇일까?’
엽현의 검의는 선악검의였다. 그리고 그의 선악검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초입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검의와 검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을 여정을 남겨두고 있던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엽현은 이 개념에 대해 아직도 명확한 기준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선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등에 칼을 들이밀고, 악한 것처럼 보이는 자가 사실 그리 악하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은가!
엽현이 생각에 잠긴 지도 꼬박 하루가 지났다. 이때, 운선은 아침 해를 맞으며 한 깊은 산맥을 지나고 있었다.
한 동안 연만리 등은 엽현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시 한 시진 쯤 지났을 때 운선이 멈춰 섰다.
이때, 연만리와 아좌 뒤편에 묵운기 등 삼인방과 척발소요가 나타났다.
척발소요는 그렇게 떼를 쓰더니 결국은 그들과 함께 오고 만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었다. 두 봉우리 간의 거리는 백여 장 정도로, 둘 사이를 잇는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봉우리 양쪽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이 곳이 바로 중토신주와 창란주에서 청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으로 사람들은 청주도(青州道)라 불렀다.
이 길을 지나야만 청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연만리는 오늘은 특별히 검은 봉포(鳳袍)와 검은 관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지극히 차갑고 엄숙해 보였다.
바로 이때, 배 위로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이 빠르게 접근했다. 연만리를 마주한 무인이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그들이 곧 청주에 진입할 것 같습니다!”
“몇 명이나 되더냐?”
“만법경 강자 열여섯과 신합경 절정이 삼백이십일 명, 그리고 특급 용병단도 여섯 개나 포진해 있습니다. 기타 세가들이나 산수무인들의 수는 셀 수도 없습니다. 그 외에도 요얼방 무인 일곱 명도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얼방 서열 이십육 위, 십칠 위, 십오 위, 십삼 위, 십 위 그리고 사 위와…….”
“요얼방 사 위?”
척발소요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확실합니다!”
무인의 대답을 들은 척발소요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날이 꾸리꾸리해서 싸울 기분이 영 아니네!”
연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해산!”
그 말과 동시에 연만리가 어디론가로 떠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