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그것 때문에 어법경이 됐다고?
엽현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패기 넘치게 달려든 것 치고는 너무 시시하게 항복해 버린 것이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바로 이때, 남자가 돌연 엽현을 향해 달려드는 동시에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엽현의 목을 향해 비수를 들이밀었다.
엽현이 피식 웃어 보였다. 갑작스런 기습을 예상한 듯했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자신의 실력을 너무나 과신했다.
남자의 비수가 아직 엽현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때 남자의 미간 사이에 차가운 검 날이 닿았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를 본 그의 동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내에 한 자루의 비검이 나비처럼 날아오르더니, 장내에는 진동하는 피 냄새와 십여 구의 목 없는 시체들만 남게 되었다.
이 장면을 본 남자가 엽현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중토신주에 있던 게 아니었더냐!”
“아? 그랬지. 그런데 방금 도착했어.”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오늘 돌아오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단 말인가!’
“하, 한 번만 살려 주게나. 목숨만 살려준다면 내 뭐든……”
푹-!
검이 남자의 미간을 뚫고 나왔다.
엽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엽현이 칼을 뽑아내자, 남자의 시신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엽현은 걸음을 옮겨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엽현의 시야에 두 여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척발언과 기안지였다.
그러자 엽현이 그대로 달려가 두 여인을 격렬히 끌어안았다.
“너희들! 보고 싶었다!”
엽현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척발언이 엽현을 밀쳐낸 후, 불쾌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이에 엽현이 정색했다.
“왜 이래. 그저 순수한 포옹이었을 뿐인데?”
이때, 곁에 있던 기안지가 물었다.
“그럼 순수하지 않은 포옹도 있어?”
“…….”
잠시 후, 황궁 안에 있는 세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척발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없는 사이 청주가 더 혼란스러워졌어.”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호계맹이 청주의 본원을 노리고 있어. 그들이 본원을 빼내가는데 성공하게 되면, 청주의 영기는 일 년 안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 거야. 그땐 정말 끝장이지.”
척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호계맹이 정말 청주를 끝장내려는 건가?”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청주는 그들에게 더이상 가치가 없거든!”
엽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어. 어떤 자들은 강한 힘을 갖게 될수록 인성이 소멸된다고. 그들의 눈엔 대의(大義)와 영생 외에는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고.”
그 말을 한 누군가는 다름 아닌 천녀였다.
사실 엽현 역시 천녀가 많은 것들을 하찮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르게 되면 엄청난 자극이 아닌 이상에야 모든 것에 무덤덤해지는 것 같았다.
“너도 혹시 그런 사람이 되진 않겠지?”
척발언의 말에 엽현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언젠가 천녀정도의 강자가 되면 나 역시 무정한 사람으로 변하게 될까?’
엽현이 곰곰이 생각한 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러지 않으리라 노력은 할 거야.”
대의, 영생. 그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청주에 있을 때 그의 소원은 오직 동생 엽령이 병에서 낫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었다.
물론 청성에서 나온 이후, 많은 사람들과 사건에 부딪치게 되면서 좀 더 다양한 시선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가진 생각은 제아무리 천하무적이 된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엽현이 두 여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인데 말이야. 사람은 너무 오래 살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괜히 심심하니까 불로장생이니 대의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나 떠들어대는 거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야 오늘 하루를 잘 보내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니겠어?”
“잘 보내지 못하니까 문제지.”
척발언이 웃으며 대꾸했다.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전 문으로 걸어가 수심에 찬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빨리?”
“왜, 아쉬워?”
엽현이 능글맞게 웃어 보이자, 척발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려보았다.
“네 낯짝은 어떻게 갈수록 더 두꺼워지는 거냐?”
“하하하…….”
이때 엽현이 기안지에게 다가가 그녀 눈앞에 한 자루의 도를 내밀었다.
그가 예전에 얻었던 천계급 도(刀)였다.
이에 기안지가 어리둥절해 하더니, 조심스레 도를 받아 들었다. 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천계 급 보물은 청주에선 매우 희소한 것이었다.
“나는?”
이때, 척발언이 엽현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엽현이 씩 웃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주었다.
엽현이 내민 갑옷을 바라보던 척발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됐어. 네가 입어!”
이에 엽현이 갑옷을 억지로 척발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야.”
그러고 나서 엽현이 손을 펼치자, 대전 안에 이십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나타났다. 모두 만법경의 부시(腐屍)들이었다.
엽현이 또다시 납계 하나를 꺼내 척발언에게 건넸다.
“이 안에 부시경(腐屍經)이 들어있어. 잘 연구하면 부시들을 부릴 수 있을 거야. 여기에 전에 네게 줬던 열두 금인까지 합치면 진 어법경 강자가 나서지 않는 이상 저국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야.”
척발언이 엽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자고 갈 거야?”
“헤헤, 그럼 나보고 어디서 자라고?”
갑자기 척발언이 도발적인 눈으로 엽현을 바라봤다.
“어디서 자고 싶은데?”
엽현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침대.”
“그럼 이따가 내 방으로 와.”
그 말에 엽현은 다소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정말?’
그렇게 엽현은 하룻밤을 묵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엽현은 척발언의 침소를 찾았다. 기왕 척발언이 자신과 자고 싶다고 했으니, 엽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침소의 문을 벌컥 열고 엽현은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침대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침대에는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게 아닌가!
척발언, 그리고 기안지였다.
척발언이 머리맡에 걸터앉더니 미묘한 웃음을 보였다.
“자야지, 안 올라와?”
‘이 말은 분명 나를 유혹하는 것이렷다!’
“네가 그렇게 원하는데 내가 거부할 수야 있나!”
엽현이 그대로 침대 위의 두 여인 사이로 뛰어들었다.
두 여인은 엽현이 정말로 올라올 줄 몰랐다. 두 여인이 살짝 당황하고 있을 때, 엽현이 두 사람을 한 손에 한 명씩 품에 끌어안았다.
“이제, 자자!”
엽현의 왼팔에 안긴 척발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철면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다른 쪽의 기안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찐빵을 입에 넣고 오물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엽현은 양팔에 두 여인을 안고 잠을 청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내 엽현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두 미녀를 품에 안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밤은 계속 깊어만 가고, 기안지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반면 척발언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엽현의 손이 계속해서 자신의 신성불가침(?)한 구역을 침범하려 들려 했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척발언이 엽현의 손을 움켜쥐며 경고했다.
“꿈도 꾸지 마!”
“왜 그러셔, 나 가만있는데.”
“안지가 옆에서 자고 있잖아!”
“그게 뭐?”
“…….”
그렇게 다시 반 시진이 경과했을 무렵, 척발언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태생적으로 음기가 강한 그녀였다. 엽현의 손이 자꾸 자신의 몸에 닿으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순간, 척발언이 자신도 모르게 엽현을 끌어안았다. 이에 엽현이 깜짝 놀랐다. 척발언의 온몸이 마치 불덩이같이 뜨거웠던 것이다.
“왜 그래, 열 있어?”
척발언이 말없이 엽현의 품 안에 자신의 머리를 묻었다. 그녀의 전신이 가볍게 떨려왔다.
엽현이 당황해서 뭐라 하려는 순간, 척발언의 잠옷이 흘러 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엽현의 그곳에 닿았다.
순간 이성을 잃은 엽현이 척발언의 입술을 덮쳤다.
야심한 밤, 두 몸이 하나가 되어 풍류(風流)를 이루고 끊임없이 불어오는 춘풍(春風)은 뜨거운 열기를 안고서 몇 번이고 황홀경(恍惚境)에 닿았다.
* * *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엽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상쾌해! 온몸의 노폐물이 씻겨 내려간 듯한 느낌이야!’
엽현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어젯밤 척발언과 정사를 나누던 엽현은 문득 예전에 얻었던 음양경(陰陽經)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음양경의 구결대로 따라 하니 기분도 훨씬 좋았을 뿐만 아니라 엽현 뿐 아니라 척발언의 몸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깔끔하게 몸을 씻어낸 엽현은 침실을 벗어나 정전(正殿)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일찍부터 일어난 척발언이 신하들과 아침 정무를 보고 있었다.
황금색 용포를 두르고 국주의 위엄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어젯밤과는 딴판이었다.
엽현을 발견한 척발언이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퇴청(退廳)!”
곧 신하들이 빠져나가고 대전에는 엽현과 척발언 두 사람만이 남았다.
엽현이 척발언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가야겠어. 저국 주변은 비밀리에 강자들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다만 부득이한 순간이 온다면 최대한 몸을 숨기도록 해.”
“호계맹 때문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계맹이 곧 큰 행동을 취해 올 거야. 그 전에 나는 그들을 막아야 해.”
척발언이 잠시 엽현을 바라본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조심해.”
엽현이 웃으며 척발언에 귀에 뭔가 속삭였다.
“우리 어제 썼던 그 약 더 있어? 호신용으로 쓰게 좀 줘!”
“…….”
퍽-!
화가 난 척발언이 엽현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엽현이 울상을 지으며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척발언이 그에게 백옥병 하나를 내밀었다.
얻고자 한 것을 모두 얻은 엽현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저국을 떠났다.
그가 청주에 돌아왔다는 사실은 지금쯤 호계맹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 틀림없었기에, 더 이상 머물게 되면 저국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엽현이 떠난 후, 대전에 기안지가 나타났다.
기안지의 얼굴을 본 척발언이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이때, 기안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법경?”
척발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만법경이었는데, 어떻게 하루 새 어법경이 된 거지? 혹시……”
척발언이 긴장된 표정으로 기안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수련의 성과인가?”
그 말을 들은 척발언의 얼굴이 마치 불타는 노을마냥 새빨개져서 기안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안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 그렇게 수련을 열심히 하는데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
“근데 정말 그것 때문에 어법경이 된 거야?”
척발언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엽현과의 거사(?)를 치른 이후, 그녀는 자신의 경지가 대폭 상승한 것을 알아차렸다. 뜻밖에도 음양경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이다.
척발언의 모습을 본 기안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를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