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302
302화 악마보다 무서운 그 여자
황성을 빠져나온 엽현은 곧바로 마종을 찾았다.
이때 마종의 실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 중이었다. 청주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제지할 세력이 없었다. 호계맹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으니, 마종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범에 날개 단 듯 실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눈을 감고 있던 마종 종주 고명허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앞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회색 장포인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에 소름을 느낀 고명허가 벌떡 일어났다.
“그, 그대는 창계검…….”
의문의 상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 종주, 당황할 것 없소.”
“이, 이곳에는 어쩐 일로…….”
“음… 고 종주께선 우리 창검종과 호계맹 간의 사정을 알고 있소?”
고명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 마종은 어느 편에도 서길 원치 않습니다.”
“고 종주, 내가 만약 그대였다면, 이쯤에서 손을 떼고 청주를 떠났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고명허가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마종의 세(勢)가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청주를 떠나라고? 이는 마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회색 장포인이 말을 이어갔다.
“고 종주, 지금 떠나지 않으면 이후엔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무, 무슨 연유입니까. 검주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현재 마종과 혈종의 활약 덕에 청주의 본원이 언제 튀어나오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 되었소. 그러나 일단 본원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호계맹에게 있어 마종과 혈종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오. 아마 그대도 호계맹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처지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고명허가 주저하듯 말했다.
“육 존주는 우리 마종에게 청주를 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그 말을 믿소?”
회색 장포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호계맹이 어떤 자들인지 잊은 것이오? 현재 호계맹은 그대들이 필요하오. 그러니 그대들의 요구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소. 하지만 호계맹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들은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길 것이오.”
회색 장포인이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청주의 본원이 나타나게 되면 청주는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오. 마종과 혈종이 그때까지 청주에 남아 있게 된다면, 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대들은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오.”
고명허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회색 장포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고 종주가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이야기가 없소. 어차피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
회색 장포인이 막 돌아서려 할 때, 고명허가 소리쳤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창검종 외에 호계맹과 겨루고자 하는 세력이 더 있습니까?”
“현문! 현문이 이미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소.”
그 말에 깜짝 놀란 고명허가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막 상대에게 뭐라 말을 하려는 했지만, 회색 장포인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대전 안.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고명허가 장고(長考)에 빠졌다.
현재 그의 마음은 혼란 그 자체였다.
‘현문이라고? 현문까지 함께 한다면….’
중토신주에서 현문은 신비스럽기가 이를 데 없는 세력이었다. 아무도 그 실력의 끝을 알 수 없었다. 창검종 하나뿐이었더라면 모르겠지만 현문이 가세한다면 아무도 그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다.
게다가 호계맹을 적대하는 세력은 현문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혹여라도 한두 개 세력만 더 늘어난다면, 호계맹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호계맹과 창검종. 이 사이에서 고명허는 매우 곤란해진 상황이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나?’
만약에 이대로 떠난다면 마종 전체에 있어서 큰 손실이 발생한다. 떠나지 않는다면, 또다시 진흙탕 속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고명허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 *
어두운 우주 속, 한 행성.
고요하던 이곳에 갑자기 검은 회오리가 일더니, 그 사이에서 한 척의 칠흑같이 검은 성공운함(星空雲艦)이 나타났다.
운함의 갑판 위에는 한 중년인과 노인이 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노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외진 곳에 있을 리가 있나…….”
곁에 있던 중년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곳이라도 지나칠 순 없소. 만약 그를 찾지 못하면 ‘그분’께서 우리 영허성궁(靈虛星宮)을 멸하실지 모르지 않소.”
그 말을 들은 노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심지어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분! 그 악마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
중년인이 반쯤 체념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그자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휴…….”
이때, 노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가만, 이곳은 호계맹의 관할 아닌가?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한 번 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호계맹?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중년인이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짓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까마득한 삼류세력에 불과하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번 가보기나 합시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오. 이번에도 못 찾으면 우리는… 에휴…….”
그들이 탄 성공운함은 어두운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 * *
마종을 떠난 엽현은 한적한 숲속을 찾았다.
그가 창계검주로 변장해 마종을 찾은 이유는, 청주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청주였는데, 마종이 계속해서 머무른다면 청주인 들은 앞으로도 지옥과 같은 삶을 영위할 것이다.
비록 엽현에겐 청주의 상황을 해결할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더 이상 마종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엽현이 이 숲속을 찾은 것은 수련 때문이었다.
호계맹이 행동을 개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엽현은 자신의 경지를 극한으로 끌어 올려야만 했다.
비록 창검종이 그와 함께할 것이었지만, 남에게 자신의 목숨을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시내가 굽이치는 한적한 장소에 있는 편편한 바위 위에서 엽현은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그의 이마 사이로 자그맣게 ‘空(공)’이란 글씨가 나타났다.
공간도칙(空間道則)!
현재 어법경인 그는 최대한 빨리 진 어법경에 올라서야 했다.
진 어법경이 되려면 반드시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엽현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심지어 어법경에 이른 것도 공간도칙의 힘을 빌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경지는 소위 말해 ‘과장’된 것이었다.
엽현은 천천히 주변의 기운을 느꼈다. 물 위를 스치는 바람, 그것을 타고 날아오는 대지의 냄새, 그리고… 공간(空間)!
이 공간이란 것은 실체를 알기가 어렵다. 지극히 현란하기까지 했다. 무인의 수련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공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느끼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점점 시간이 흐르고, 엽현 주위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때의 공간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고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 된 상태였다.
엽현이 공간도칙을 운용하자 주변 공간이 순간 뒤틀렸다. 그 안에 있는 엽현 역시 기이한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엽현이 갑자기 멈췄다. 방금 전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이 수반됐기 때문이었다.
엽현은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그의 옆으로 흐르는 물을 가지고 수련을 재개했다. 이내 잔잔히 흐르던 시내가 소용돌이치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청주 전체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종이 청주를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간 청주에서 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세력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자 청주가 들썩였다.
청주와 중토신주를 잇는 청주도.
마종의 무인들을 태우고 중토신주로 향하던 운선이 고명허의 명에 의해 멈춰 섰다. 이윽고 고명허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막수였다.
“막 장로!”
막수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고명허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 종주, 어찌하여 이렇게 갑자기 청주를 떠나는 것이오? 우리의 약속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늘.”
“하하하!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지요!”
막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정말 그것뿐이오?”
“물론이오!”
고명허의 눈을 응시하던 막수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지었다.
“고 종주, 지난번 노부가 약속한 대로 일단 청주의 본원을 손에 넣게 되면 그대들에게 청주 땅이 넘어가게 되어 있었소. 목표를 목전에 둔 지금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오?”
“마종은 그리 큰 욕심이 없소. 게다가 이렇게 큰 청주를 홀로 통치할 엄두도 나지 않고 말이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고 종주, 허심탄회하게 말 해 보시오. 누군가 그대를 꼬드겼소? 아니면 위협을 가하기라도 한 것이오?”
고명허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억측이오.”
“이미 고 종주가 그리 마음을 먹었다면 더 이상 붙잡지 않으리다. 부디 살펴 가시오.”
“살펴 가시오, 막 장로!”
그렇게 마종의 수많은 운선들은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이를 바라보는 막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때, 그의 곁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 역시 떠나가는 운선을 바라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구려.”
노인의 말에 막수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생각엔 창검종이 마종을 꼬드겨 떠나도록 한 것 같소.”
“이제 어떡하면 좋겠소?”
노인의 물음에 막수가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호계자들을 청주로 불러들이시오. 이제 우리 호계맹이 직접 처리해 나가야 할 것 같소. 존주께서는 이미 명을 내리시어 파견 나간 모든 진 어법경 강자들을 청주로 불러들이셨소. 본원이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면 창검종이 반드시 행동을 취해올 것이니 이에 대비를 해야 할 것이오!”
“그 말은…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막수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만약 창검종이 감히 우리가 본원을 얻는 일을 방해하고자 한다면, 그리될 수도 있소. 그땐 사생결단이오. 한쪽이 사라져야 끝나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