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00
400화 오늘은 안 갈래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흑의인.
한참 동안 흑의인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뒤 봐주는 자가 있었군.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살아남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그대의 정체가 무엇이오?”
중년인이 조용히 주먹을 쥐자, 그의 손에서 신비한 힘이 응집됐다.
이때, 흑의인이 가볍게 중년인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아주 평온해 보이는 이 움직임엔 어떠한 기의 파동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를 본 중년인 상대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반박귀진(返璞歸真)에 이른 어떤 고수들은 그 움직임에 천지의 대도(大道)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비록 흑의인에게서 그러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중년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엄청난 고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이 무인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이때, 흑의인의 검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자 중년인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순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과 기세가 상당부분 사라졌다.
‘겨우 검 한 자루에 심경이 깨지다니…….’
중년인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다시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사라졌던 기운이 다시 회복됐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불신과 두려움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저 검을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심경이 깨질 뻔한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본주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보기 드문 자로구나.”
흑의인의 말을 들은 중년인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름은 한낱 기호에 불과한데 알면 무엇하고 모르면 또 어떻단 말인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똑똑히 듣거라. 네게 닷새를 줄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거라. 닷새 후에 나와 내 미련한 제자가 고가를 방문할 테니, 그때 확실히 매듭을 짓도록 하자.”
중년인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고가를 찾아온단 말입니까?”
“안 될 것 있느냐?”
“…오 일 후, 이 고겸(古鐮), 고인이 오시길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중년인은 무간연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순간, 흑의인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흑의인의 정체는 엽현이었다.
무간연옥 이 층, 엽현이 힘없이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선 방금전 상황이 떠올랐다. 고겸이라 칭한 그 남자는 분명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제신황혼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 합조차 겨룰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제신황혼의 힘까지 더해졌는데도 결코 우위에 설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순간 엽현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강자들의 시선이 무간연옥에 집중된 지금, 그가 독고훤과 엽령을 데리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이곳에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엽현은 또다시 거대한 실력의 격차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설령 상대가 무상지경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았지만, 고겸이란 자는 분명 그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무인이었다.
제아무리 신물을 덕지덕지 바른다 해도 결국 경지의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지를 끌어 올리는 수밖에!’
엽현이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간자재, 원경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나한테 묻지 마. 그렇게 낮은 경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니까.]“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지금 나의 경지를 거쳤을 거 아냐?”
[나는 단번에 성신(成神)에 이르렀으니, 너와는 경우가 다르다.]그 말에 엽현이 입을 삐죽거렸다.
“신이라고? 내가 확인할 길이 없다고 이젠 허풍까지 치는구나!”
[하하하! 잘 들어라, 꼬마. 도(道)라는 것은 항상 멀게만 느껴지지만, 실상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자는 도를 추구하는데 일평생을 바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자는 단숨에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중요한 건 이런 자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엽현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럼 천천히 모든 과정을 거쳐 신이 된 자가 강한가, 아니면 단숨에 신이 된 자가 더 강한가?”
“…….”
대화를 마친 후, 엽현이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가 쥐었다. 그 순간, 주변의 공간이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원력(源力)을 느끼는 것, 이것이 원경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반 시진 후, 엽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손안에서 어떤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엽현은 서둘러 공간지력을 이용해 신비한 기운을 응집했다. 이내 그의 손바닥 안에서 좁쌀 크기만 한 흑점이 생성됐다.
이를 본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력의 색은 원래 자주색이 아니었던가?’
의혹을 잠시 접어둔 채, 그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점점 손안의 흑점이 커지더니 마지막엔 엄지손가락만 하게 자라났다.
눈앞에 흑점을 바라보며 엽현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간자재,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진행해.]간자재의 짧은 한마디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한참이 지난 후, 엽현의 손바닥 안에 갑자기 검은 회오리가 생성됐다. 이 회오리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의 앞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뭔가 이상한데?”
[…음령지기(陰靈之氣).]“뭐라고? 그게 뭔데!?”
엽현이 다급히 묻자 간자재가 설명했다.
[인간이 죽게 되면 음기를 남기게 된다. 이 음기는 사기(死氣)를 제외하면 네가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부식력이 강한 기운이다.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연옥 안엔 어마어마한 양의 음기가 존재한다.]이때, 엽현이 황급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검은 회오리가 세차게 돌아갈 때마다 점점 주변 공간이 녹아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운을 장악해!]“어떻게 장악 하는데?”
[네가 집중한 것처럼 통제하는 것도 똑같이 하면 된다!]그 말을 들은 엽현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천천히 주먹을 쥐자, 음령지기 역시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시 공간이 회복된 것을 확인한 엽현이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냈다.
“간자재, 이 음령지기란 것… 엄청나게 무섭구나…….”
[원경과 무상지경 사이에 음경(陰境)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는 극히 일부의 무인들만 알고 있는 것이지. 원력이 양(陽)의 기운이라면, 음력은 말 그대로 음(陰)이라 할 수 있다. 우연히 얻은 것이긴 하지만 네가 음령지기를 깨친 것은 매우 운이 좋은 일이다.]“그럼 음령지기가 쎄, 아니면 원기(源氣)가 쎄?”
[그건… 스스로 알아보도록 해라!]“…….”
[음령지기의 부식성은 꽤나 강력해서, 공간마저 녹여버릴 수 있다. 네가 잘만 활용한다면 앞으로 무적금신이나 제신황혼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능히 무상지경 강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음령지기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원기를 섞어 넣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간자재의 설명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고맙군.”
[별말씀을. 아무튼, 무간연옥에 넘쳐나는 음령지기를 흡수해 음령기검(陰靈氣劍)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매우 쓸 만할 것이다. 특히 개인적으론 이 음령기검을 비검으로 활용한다면 더 효과적일 것 같군.]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아들었어!”
이내 엽현은 천천히 음령지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 한 자루 칠흑과 같이 어두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령기검(陰靈氣劍)!
검은 약 삼척 정도의 길이로 어두운 검신에선 끊임없이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을 바라보는 엽현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 있었다. 짙은 음기를 발산하는 검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무적금신을 발현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용혈로 단련된 그의 육신이라도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엽현은 조심스레 검을 계옥탑 안에 옮겨 놓았다. 그가 막 계옥탑 일 층에 발을 들여놓자, 소령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하려다가 음령기검을 보고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그대로 검을 후려쳤다.
쾅-!
검이 그대로 날아가 탑 구석에 처박혔다.
소령이 계속해서 출수하려고 하자 엽현이 다급히 그녀를 막아 세웠다.
“소령, 대체 왜 이래!?”
“사악한 기운!”
엽현이 검을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소령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소령아, 저건 내가 나쁜 놈들을 혼내주려고 만든 거야. 나쁜 놈들은 사악한 물건으로 때려도 돼. 알겠지?”
그의 말에도 소령은 여전히 매우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검을 노려보았다.
결국 엽현이 수없이 회유한 끝에, 소령은 잠시동안 검을 탑에 보관해 두는 것을 허락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 영과를 돌보는 소령을 바라보며 엽현이 중얼거렸다.
“어째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본원지체(本源之體)는 원래 성장이 빠르다.]간자재에 말에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아이에겐 그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해…….”
엽현이 본 소령의 강함은 섬뜩할 정도였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힘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세상은 곧 무법천지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계옥탑을 나온 엽현은 무간연옥 삼 층에 머물면서 음령기검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 * *
나흘 후.
고가(古家).
삼대세가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고가. 그 실력은 삼대세가 중에서도 단연 월등했다.
이날, 고가의 모든 강자들이 속속들이 본 가로 귀환했다.
고가의 상공에서 고겸이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고가의 무인들은 이미 어둠 속에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다.
고가의 전 인원은 조만간 들이닥칠 손님을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손님은 엽현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신비에 싸여 있는 흑의인이었다.
그렇게 동녘이 틀 때부터 시작해서, 정오, 그리고 늦은 저녁까지 그들의 기다림은 하염없이 계속됐다. 하지만 날이 다 끝나갈 때까지 엽현과 흑의인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때, 어둠 속을 응시하는 고겸의 곁에 한 노인이 다가왔다.
“오늘 오는 것이 확실합니까?”
“우선 기다리시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그렇게 어둠이 지나고 또 다른 태양이 떠올랐건만 두 사람은 결국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엣취!”
새벽의 찬 공기에 결국 고뿔이 걸려버린 고겸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 * *
무간연옥.
[오늘 고가에 가기로 한 날 아니더냐?]“내가 간다고 했던가?”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음… 오늘은 안 갈래.”
[무슨 이유로?]“그러니까… 가봤자 어차피 못 이기니까, 좀 더 강해지면 가야지. 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