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09
409화 나는 보이지도 않냐?
소위 역경수행이란, 말 그대로 경지를 거스르며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이 후퇴의 목적은 더욱 강력한 전진을 위한 것이었다.
엽현의 현재 경지는 기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득은 여전히 파공경에 머물러 있다.
경지는 본디 무인들이 서로를 구분하기 만든 일종의 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엽현은 이러한 정형화 된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누군가 알려준 것이 아닌, 스스로가 착안해 낸 방법이라는 점에서 엽현에겐 뜻깊은 일이었다.
바로 이때, 엽현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머리가 거울처럼 맑아짐을 느꼈다.
염두통달(念頭通達), 심경통명(心境通明).
고요한 무간연옥 안.
엽현은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한 후,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이때 엽현의 경지는 여전히 기변경이었다.
그는 아직 파공경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매경지마다 조금씩 아쉬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금의 아쉬움을 단시간에 채우기에는 불가능했기에 이쯤에서 수련을 멈추는 게 좋겠다고 엽현은 판단했다.
이때 엽현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한 자루 검이 그의 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선검.
영선검을 향해 빙긋 웃은 엽현은 이내 시선을 정면의 진혼검으로 돌렸다.
“…….”
엽현은 진혼검을 내버려 둔 채,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걸음걸이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엽현의 등 뒤에서 진혼검이 가볍게 떨리더니 한 줄기 검은 검광으로 변해 엽현의 앞에 날아들었다.
자신 앞에 둥둥 떠 있는 검을 바라보며 엽현이 나직이 물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게냐?”
진혼검이 대답이라도 하듯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이에 엽현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럼 함께 가자꾸나.”
엽현은 기쁜 마음으로 진혼검을 쥐고서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섰다.
향기 나는 꽃엔 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법이다.
엽현이 무간연옥 문을 나서자, 독고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는 독고훤을 보자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냐?”
“정말이에요.”
독고훤이 뭐라 더 말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이 크게 떨리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를 본 순간 독고훤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독고련!”
“하하, 저놈은 독고련이 아니다!”
곁에 있던 간자재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껍데기는 그놈이지만 영혼이 바뀌었다.”
그 말에 독고훤이 다시 독고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독고련의 기운이 확실히 이전과는 다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때, ‘독고련’의 모습을 한 자가 무표정한 눈으로 간자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간자재.”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후후, 그것이 정상이지.”
간자재가 여유 있게 대답하자 ‘독고련’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어찌하여 우리 독고가를 멸망시킨 것이오?”
“뭐? 하하하! 뭔가 착각했군. 독고가를 멸한 것은 내가 아닌 저놈이다!”
간자재가 손가락을 따라 ‘독고련’의 시선이 엽현에게로 향했다. 순간,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 우리 독고가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엽현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독고련’의 시선이 이번에는 독고훤에게로 향했다.
“너도 독고가의 사람이로군!”
“…당신은 독고가의 조상신이군요.”
“그렇다! 너희 둘은 모두 독고가의 사람이면서 어찌 스스로 가문을 멸했단 말이냐?”
“조상님께서는 독고련의 육신 안에 계시니 그의 기억을 뒤져보면 자초지종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독고훤의 말에 ‘독고련’이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뜬 그는 모든 사정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순간, ‘독고련’이 날카로운 눈빛이 엽현의 얼굴에 박혔다.
“네 놈… 같은 혈통의 식구를 어찌 그토록 잔인하게 학살했단 말이냐…….”
엽현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소?”
대답을 듣자 ‘독고련’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가문을 저버린 자를 살려둘 순 없다!”
‘독고련’이 엽현을 향해 막 출수하려는 찰나, 한쪽에 있던 간자재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나는 보이지도 않는 게냐?”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간자재의 손바닥이 ‘독고련’에게로 향했다.
쾅-!
예상치 못한 공격에 ‘독고련’은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독고련’이 거의 삼백 장 멀리에 멈춰선 순간, 그의 육신이 쪼개지며 그 안에서 두 개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영혼의 주인은 바로 독고련과 독고가 선조의 것이었다.
잠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하던 독고가 선조가 이내 경악에 찬 모습으로 간자재를 향해 말했다.
“그,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내가 누구냐고?”
간자재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깟 놈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 이해할라나?”
그 말과 동시에 간자재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뒤이어 그녀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펑-!
독고가 선조의 영혼이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다.
이에 겁에 질린 독고련의 영혼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요수가 곧장 그의 뒤를 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내에 비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소리가 잦아들 때쯤이었다. 엽현이 간자재를 향해 말했다.
“고맙군.”
엽현이 고마움을 표시하자 간자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니 고마워할 것 없다. 그나저나… 어때, 성과는 좀 있었나?”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어.”
“후후,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제야 좀 구색을 갖추겠구나. 하지만 진정한 천재들에 비하면 갈 길이 요원하다는 걸 잊지 말거라.”
“물론! 하지만 결코 서두르진 않는다!”
“좋아,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언젠가 대성할 수 있을 게다.”
이때 간자재가 문득 먼 성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도 이만 가볼 때가 됐군.”
“간다고? 어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때, 간자재가 요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요수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요수는 본디 신족을 수호하는 제견(帝犬)이란 놈이다. 성정이 다소 포악하고 강자가 아니면 잘 따르지 않는다. 지금 네 실력으로 놈을 데리고 다닌다면 적지 않게 애를 먹을 것이다. 어쩔 테냐?”
엽현이 요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요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터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간자재,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 마땅히 존중을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나와 의남매를 맺을 생각이 없나?”
“뭐? 나더러 네 놈의 누님이 되라고?”
잠시 멍하니 있던 간자재가 이내 엽현의 의도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요망한 것. 내 동생이 된다면 저 요수 놈이 널 건드리지 못할 것 알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로구나! 역시 잔머리 하나는 사유계 최고가 틀림없다! 하하하!”
가까이 있던 요수도 말없이 엽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때, 간자재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좋다! 원한다면 나를 누님으로 부르도록 하거라.”
말을 마친 간자재가 그대로 어두운 성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때, 엽현의 귓가에 그녀의 현기전음이 들려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게다. 그리고… 오 층에 있는 자를 조심하거라.]그 말을 마지막으로 간자재의 모습은 별빛 속으로 사라졌다.
‘계옥탑 오층이라…….’
간자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엽현은 곧장 의식을 내려보내 계옥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탑의 모든 봉인이 헐거워진 상태였는데, 특히 오 층 봉인의 파괴 정도가 가장 심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뭔가에 가로막혀 오 층에 진입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강한 자가 수감 돼 있기 때문이었다.
간자재만 해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존재라니…….
이 순간, 엽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 층의 존재가 간자재나 이 층 존재처럼 말이 통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앞날은 심히 괴로울 것이 뻔했다.
아니, 그런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살해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엽현은 일단 고개를 흔들어 계옥탑에 대한 생각을 떨쳐냈다. 이 일은 당장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엽현이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수가 눈에 들어왔다.
엽현이 요수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쩐지 날 죽이고 싶다는 표정인걸?”
“…….”
“알아,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비록 누님께서 너를 내게 남겨 주셨지만, 나 같은 인간 따위가 맘에 들 리가 없겠지. 그러나 나로서도 누님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
“이렇게 하자. 더도 말고 삼 년. 딱 삼 년만 나를 도와줘. 그다음부터는 누님께 말씀드려 널 보내주도록 하겠다. 이 정도면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어때?”
그러자 침묵하던 요수가 마침내 대답했다.
“삼 년 후엔 반드시 보내줘야 한다.”
“물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러면 네 현재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려줄 수 있나?”
“…그 당시 내단(內丹)이 파괴되고 난 직후, 내 실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너희 인간의 기준으로 치자면 지금 내 경지는 아마 성경쯤 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성경 강자는 내 상대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럼 예전의 실력을 다시 찾을 순 없는 거야?”
엽현의 질문에 요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별한 기연이 있지 않고는 어렵다.”
“음… 알았다.”
엽현이 요수와 엽상을 마치자, 독고훤이 엽현 곁으로 다가왔다.
“현아… 그나저나 우리 령이는 어찌 된 것이냐?”
그 말을 들은 순간, 엽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간자재 누님의 말로는 고가를 수색해 봤지만, 령이는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고가에 있던 게 아닌 듯한데… 별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엽현의 표정 역시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그 역시 엽령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흑…….”
엽현이 갑작스레 신음을 내뱉었다. 아직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엽현은 곧장 자원정을 꺼내 회복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장 급선무는 바로 엽령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시바삐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 놔야만 했다.
계옥탑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는 것이다.
한편, 엽현을 바라보고 있던 요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함과 답답함.
한때 신족의 수호자로서 위풍당당했던 시절을 보낸 그였기에, 한낱 허약한 인간 따위에 종속된 지금의 처지는 억울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엽현이 간자재와 의남매를 맺었단 사실을 떠올리자 제견은 이번엔 답답함 마음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위안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삼 년의 시간쯤은 그에게 있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때, 무간연옥 상공에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이 한껏 쇠약해져 있는 엽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엽현, 중상을 입었구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엽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북무종(北武宗) 종주께서 너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노인의 물음에 엽현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소! 그렇다면 그대들과 함께 가겠소!”
그러자 노인을 향해 막 출수하려던 요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엽현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먼 길이 될 텐데, 어서 갑시다!”
요수가 아무 말 없이 엽현을 응시했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