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14
414화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미앙궁주와 맞먹을 정도로 강한 두 명의 무인들이라…….’
엽현은 조용히 독고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중 한 사람은 무종의 조사(祖師)인 보천행(步天行)이다. 무도의 신으로도 불리는 자로서, 일 권에 작은 계 하나를 파괴한 것으로도 유명하지.”
순간 엽현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일 권에 작은 계 하나를 박살 냈다니. 달리 말하면 청창계 정도는 단박에 파괴할 수 있는 강자란 말이 아닌가!
역천(逆天)이란 말 이외에 이를 달리 설명할 단어가 있을까?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때, 돌연 중년 남자 하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멈추시오.”
독고훤의 말을 끊은 남자가 다소 사무적인 어투로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성운함은 성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다른 곳에 정박해야 하오.”
남자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독고훤을 바라보았다.
“이만 내려서 가시지요.”
성운함에서 내린 엽현 일행은 곧장 미앙성을 향해 다가갔다.
성문 앞에 도착 한 엽현은 다시 한번 미앙성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산과 같은 성벽을 올려다보자니 마치 한 마리 개미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미앙성을 들어가려면 자원정 백 개를 내야 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정 백 개씩을 낸다고 생각하니 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목숨 걸고 강자들과 싸워서 돈을 획득하는 자신과 비교하면, 정말로 돈 버는 놈은 따로 있던 것이다.
탄복의 눈물을 흘리며 통행세를 지불한 엽현은 마침내 성안으로 들어섰다.
성은 겉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어느 미녀의 매끈한 다리처럼 쭉 뻗은 길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었고, 길 양쪽으로는 아름다운 가옥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었다. 비록 성을 오가는 행인의 수가 대단히 많았지만, 무질서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번화(繁華).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앙성은 엽현이 다녀가 본 성들 중에서 가장 번화한 성이었다.
“미앙성은 그 명성에 걸맞게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중에는 배후 세력을 등에 업은 자도 있고, 산수무인들도 존재한단다. 아무쪼록 성안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주의하는 게 좋을 게다.”
독고훤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독고훤이 무언가 더 말하려 할 때, 엽현이 갑자기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머리를 곱게 땋은 여자아이 하나가 한쪽 벽에 서 있었다.
청삼치마 차림의 아이는 헝겊을 덧대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깨에는 천으로 만든 보자기를 둘러맸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소박한 차림새였다.
엽현이 호기심을 보인 것은 여자아이가 벽에 그리고 있던 그림이었다.
한 폭의 산수화를 표현한 듯한 그림엔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조각이 떠 있었고, 그 아래로 시원하게 냇물을 뱉어내는 작은 폭포도 있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사방으로 물보라를 일으키고, 그 옆으로 피리 부는 목동을 태운 소 한 마리가 유유자적 초원을 거니는 모습도 보였다.
이 한 폭의 그림은 그림이라 하기엔 너무나 생동감이 넘쳐, 언뜻 보면 진짜 같기도 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를 향해 다가선 엽현이 탄성을 내질렀다.
“너 정말 잘 그리는구나!”
그 목소리에 소녀가 뒤돌아보자, 엽현은 그제야 소녀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계란같은 얼굴형에 적당히 굽어진 눈썹, 크진 않지만, 생기 넘치는 눈동자.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소녀가 엽현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 부분이 좋은가요?”
“음… 딱히 콕 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구나.”
“정말요?”
엽현의 칭찬에 소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녀가 뒤로 돌아 재빨리 벽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그림엔 한 남자의 형상이 추가됐다. 남자는 다름 아닌 엽현이었다.
엽현이 의아한 듯 소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린 지 이틀이 지났지만 내 그림을 제대로 봐 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러니 이 그림을 공자께 선물로 드릴게요.”
“하하하, 그것참 고맙구나. 하지만 벽에 그린 그림을 어떻게 가져간단 말이냐?”
“바보.”
갑작스런 소녀의 말에 당황한 엽현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 그림, 내 머릿속에 잘 기억해 놓으마!”
“호탕해서 마음에 드네요!”
소녀가 엽현을 향해 엄지를 척 내밀고는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때, 엽현이 뒤에서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소녀가 멈춰 서자 엽현이 품 안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꺼내 빠르게 뭔가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엔 나무 인형 하나가 들렸다.
나무 인형은 소녀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엽현이 인형을 내밀며 말했다.
“자, 받아.”
소녀가 잠시 물끄러미 나무 인형을 바라보고는 웃으며 받아 들었다.
“아무런 공력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조각품이군요. 잘 받을게요.”
인형을 품에 넣은 소녀는 엽현 곁에 있던 제견을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벽화 앞에 잠시 머물러 있던 엽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가죠.”
그렇게 엽현 일행은 다시 성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제가 찾아야 할 것은 큰 규모의 상회입니다. 그리고 정보를 취급하는 세력도 알아봐야 합니다.”
“내가 가서 좀 알아보도록 하마.”
“그럼 저는 오늘 묵을 숙소를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후, 독고훤과 찢어진 엽현은 어느 객점을 찾았다. 독고훤 홀로 보내기 걱정스러웠던 터라 제견을 호위로 붙여준 터였다.
제견이 있는 한 웬만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그녀의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방을 배정받은 엽현은 곧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천천히 무릎 위에 올린 손끝에서 검은색 검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악념검의.
근래 들어 그는 악념검의를 연구하는데 몰두해 오고 있었다.
얼마간의 연구 끝에 그는 자신의 악념뿐 아니라, 타인의 악념 또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엽현은 경지에 대한 주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변경!
그의 경지는 여전히 기변경에 머물러 있었다.
각 경지의 극한에 이르지 않는 한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한 시진 후, 방문이 열리고 독고훤이 들어왔다.
의자에 앉은 독고훤이 조사한 바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미앙성엔 무수히 많은 상회가 있지만, 그중 만보상회(萬寶商會)가 가장 크다고 하는구나. 만보상회에선 닷새마다 경매 행사가 열리는데 매번 좋은 물건들이 나온다고 한단다. 물건을 사고자 팔고자 한다면 이곳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 같구나.”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보를 가진 곳에 대한 소문은 없었습니까?”
“성안에 백효각(百曉閣)이라는 곳이 있다. 돈만 주면 어떤 정보라도 물어다 준다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엽현이 몸을 일으켰다.
“먼저 백효각을 들러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올 때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곳에 온 소문이 이미 퍼진 모양인 것 같다.”
독고훤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엽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전혀 몸을 숨기지 않았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요.”
“네 몸에 그 물건이 있는 한 누구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순간 독고훤의 눈빛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알면서도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다닌단 말이냐?”
“제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들의 눈을 피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먼저 출수하는 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그다음은 없습니다. 먼저 들어오는 자들부터 순서대로 보내줘야 하겠지요.”
“…….”
* * *
반 시진 후, 엽현은 독고훤, 제견과 함께 백효각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백효각에 도착한 엽현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백효각이 있다는 장소엔 작고 허름한 나무집 하나가 전부였던 것이다. 만약 ‘백효각’이라고 새겨진 현판이 없었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 분명했다.
“평범하게 보일수록 실은 비범한 경우도 많다.”
독고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엽현이 나무집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그가 온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문이 저절로 열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엽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규칙은 알고 있는가?”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왜 찾아왔지?”
“사람을 찾기 위해서.”
“초상화가 있는가?”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계에서 엽령의 초상화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자원정 오십만 개.”
남자의 말에 엽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납계 하나가 남자 앞으로 날아갔다.
남자가 손을 뻗어 납계를 잡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의 음성이 튀어 나왔다.
“잠깐!”
그 소리에 남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쪽에서 웬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를 머리 위로 쌓아 올린 여인은 검은 치마를 입고서 꽤나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엽공자셨군요.”
‘엽 공자!?’
“보아하니 이미 많은 자들이 나를 찾겠다고 다녀간 모양이오.”
엽현이 웃으며 묻자 여인 역시 웃음으로 대꾸했다.
“그렇답니다. 게다가 그 숫자 또한 적지 않지요. 심지어 몇몇 전대 고인들까지 다녀갔을 정도니까요.”
엽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오늘 귀 각을 찾은 이유는 사람을 찾아달란 부탁을 하기 위함이오.”
이때, 여인이 엽현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몸을 한 번 훑어보았다.
“소문에 듣자 하니… 성제 현상방의 첫 번째 보물이 엽 공자에 있다고 하던데…….”
“그렇소.”
그 말에 여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 백효각에서도 그 물건에 대해 매우 관심이 있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번 볼 수 있을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엽현의 뒤편에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무상지경(無上之境)!
노인을 본 순간 엽현이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백효각 핑계를 대긴 했지만, 실은 그대가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소?”
여인이 주먹을 쥔 채 뭐라 말하려는 순간, 엽현의 신형이 어느새 여인의 뒤편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나 싶더니, 새하얀 목에 작은 반점이 피어났다.
온몸이 경직된 여인이 여전히 전방을 경직한 채 입을 열었다.
“너…….”
그녀가 이 한 마디를 뱉은 순간, 그녀의 목에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이를 본 무상지경의 노인이 안색이 변해 곧장 출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한 줄기 검광이 장내에 번뜩이면서 노인이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지불식간에 뒤에서 나타난 엽현에 의해 노인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엽현이 무상지경 강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신황혼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외물의 도움 없이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방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자의 표정이 온통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너…….”
엽현은 남자를 무시한 채 한 쪽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백발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선 틀림없는 성경의 기운이 느껴졌다.
백발노인이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엽현, 감히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
“잠깐!”
엽현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원한다면 먼저 내 말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소.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로 하자고? 우리 백효각의 사람을 대뜸 죽여 놓고 말로 넘어갈 수 있을 성 싶더냐? 들으나 마나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 말에 엽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견!”
엽현의 음성이 떨어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제견이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반 각도 지나기 전, 노인은 드러눕게 되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엽현이 방 안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가서 너희 각주에게 전하거라. 나는 손님으로 온 것이지 결코 백효각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나 엽현은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엽현은 독고훤, 그리고 제견과 함께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