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24
424화 무슨 봉사를 말하는 게냐?
미앙궁.
흰 꽃이 만발한 어느 정원 중앙에 한 소녀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녀의 앞에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순백의 찻잔이 놓여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정원의 분위기는 한층 고즈넉해 보였다.
이때, 소녀 앞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가볍게 예를 차렸다.
“보고드립니다. 귀문이 멸망했습니다. 생존자는 이장풍 하나입니다.”
“…그를 얕본 모양이로구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실력은 기변경에 불과하지만 혼자서 능히 성경 강자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제신황혼이란 갑옷을 착용했을 때 일이지만 말입니다. 특히 그의 두 자루 검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위력적이었습니다.”
“흠…….”
소녀가 흥미를 보이자 그림자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요족에게 문의한 결과 엽현을 따르는 요수는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서 온 존재가 아닌 듯합니다.”
“잘 알겠다. 그건 그렇고… 이장풍이 장천장성에 다녀갔더냐?”
“그렇습니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얼마간 머물다 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궁주…….”
그림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그가 마가족과 결탁하려 하는 것이 아닌지…….”
“흥! 걱정 말거라. 그는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잠시 후, 그림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궁주, 엽현이 나타난 이후 미앙성에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성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지 모르는 일이니, 그 전에 궁으로 불러서 겁을 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우리 미앙궁으로 찾아온다면 그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궁주?”
그림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미앙궁으로 제 발로 찾아온다면 보물을 쫓는 이들은 우리 미앙궁에 보물이 떨어질 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미앙궁이 보물을 차지하게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테니, 그 전에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엽현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있다면 그땐 미앙궁이 직접 나서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가족을 자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무슨 말씀이신 줄은 알겠습니다. 허나,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미앙성의 혼란은 점점 가중될 것이 뻔합니다.”
“그 점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그가 죽지 않는 한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죽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소녀의 눈빛이 그림자의 얼굴에 꽂혔다. 그러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그림자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녀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너는 그를 잘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다른 것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림자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궁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곧 그림자가 사라지고,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청창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천역 북쪽. 구천구백 장 높이의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이 있다.
성산(聖山).
이곳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성지가 위치한 곳이다.
운무가 감싸고 있는 성산 꼭대기는 마치 선경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꼭대기에는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낡았다고 표현해야 어울릴 법한 대전이 하나 들어 서 있다. 대전 좌우에는 검을 들고 있는 조각상이 접근을 불허한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대전 뒤편으로 비무장이 마련돼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창 땀을 흘리며 비무 중이었다.
두 사람의 동작은 매우 격렬했으나, 힘을 잘 통제한 덕에 기운이 비무장 밖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백의장삼을 입은 한 노인이 그들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공격을 받은 남자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무대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지면에 내동댕이쳐진 남자가 허리를 문지르며 불평을 터트렸다.
“누나, 좀 살살 할 수 없어?”
비무대 위, 여인이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장천장성에 갔다간 하루도 살아남기 힘들다!”
“글쎄, 난 안 간다니까…….”
남자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는 순간,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나 냅다 가슴을 걷어찼다.
퍽-!
남자가 다시 한번 공중을 날았다.
수십 장 밖에 떨어진 남자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누나, 정말 동생을 죽일 작정이야?”
“동생? 장천장성에 갈 용기도 없는 놈이 어찌 나 초남생(楚南笙)의 동생이 된단 말이냐?”
“이익-.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가기 싫은 거라구!”
초남생이라 자칭한 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겁쟁이들은 변명부터 한다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남자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초남생은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는 뒤편에 서 있던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월(越) 사부!”
초남생이 예를 갖추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생아, 지금 정도의 실력이라면 성경 강자 정도는 능히 이길 수 있겠구나.”
“그 정도는 반년 전에 이미 가능했습니다.”
순간 노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남생아, 내가 항상 말하듯이 자신이 있는 것은 좋지만 절대 자신을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
꾸지람을 들은 초남생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헌데…….”
초남생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며 물었다.
“듣자 하니 천역에 엽현이란 자가 나타났다 합니다.”
“음, 나도 들었다. 다른 계에서 온 녀석인데 실력이 상당하고 내력이 신비하다 하는구나.”
이때, 노인이 다소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생, 놈을 찾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알았느냐?”
“사부, 설마 제가 놈에게 지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실력이 놈에 견주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이 가진 물건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분 탓에 잠시 관망하자는 것이 성주(聖主)의 뜻이다.”
“잘 알겠습니다, 사부!”
말을 마친 여인이 다시 자신의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장천장성에 가지 않을 테냐?”
“헤헤… 그게…….”
“흥! 너 같은 동생을 두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초남생이 차갑게 한 마디 내뱉고는 그대로 비무대를 떠나갔다.
“젠장,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좋아, 나도 간다, 가!”
그렇게 남자마저 어디론가 사라진 후, 노인이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주, 정말 엽현을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잠시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건드리지 않는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시 잠잠해진 성산 밖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살며시 산을 빠져나왔다.
“누나, 혹시 그 엽현인가 하는 놈 찾으러 가는 건 아니… 악! 왜 때려? 물어보지도 못해?”
“주둥이 좀 닥치고 있어. 확 꼬매버릴라니까.”
“…….”
한편, 귀문을 떠난 엽현은 혼돈지기로 은신한 채,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동굴에 몸을 숨겼다.
휴식이 매우 간절한 엽현이었다.
진기의 소모가 매우 컸던 데다 부작용까지 겹쳐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요한 동굴 속에서 제견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가 걱정되지 않느냐?”
그녀라 함은 독고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상처를 돌보던 엽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백효각은 그녀를 잘 보호하려 할 거야.”
잠시 침묵하던 엽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가 한 번 보고 와 줘!”
“그럼 너는 어떡하고?”
“후후, 나는 혼돈지기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지금 보호가 필요한 건 나보단 그녀야.”
잠시 엽현을 바라보던 제견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후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굴 안에 홀로 남은 엽현은 다시 미친 듯이 자원정을 흡입했다.
역경수행을 시작한 이래로 엽현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력이 이전보다 매우 강해져 있었다.
얼마 전의 그였더라면 진혼검과 제신황혼을 동시에 사용한 후엔 여지없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력이 강해진 덕분인지 조금 어지럽기만 할 뿐 예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이 외에도 엽현의 실력은 전과 비교해 몇 배 이상 성장해있었다. 역경수행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약 반 시진 후.
자리에서 일어난 엽현은 이미 대부분의 부상에서 회복된 상태였다.
몸을 회복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엽령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소혼, 령이는 깨어났나?”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그래, 그래.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행해.”
[자신이 있습니다. 걱정말고 기다리십시오, 주인.]“좋아, 너만 믿는다!”
소혼과 대화를 마친 엽현은 곧장 자리에 앉아 귀문에서 털어온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귀문에서 얻은 자원정은 대략 삼천만 개 정도였다. 원래 있던 것까지 합치면 엽현에겐 총 육천만 개의 자원정이 있는 셈이었다.
거기에 여섯 개였던 성계 급 보물은 아홉 개로 늘어났다.
그 밖에 다른 자잘한 물건도 많이 있었지만, 엽현의 눈에 차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동굴을 나선 엽현은 조심스레 미앙성으로 향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성계 검을 흡수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먼저 검을 구해야만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수행에 있어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기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지식을 얻기 위해선 부단한 학습 이전에 충분한 식사로 기력을 챙기는 것처럼 말이다.
***
얼마 후, 엽현은 미앙성에 잠입했다. 그는 수소문 끝에 태원상회(太源商會)라는 곳을 찾게 되었다. 이곳은 천역에서 만보상회 다음으로 큰 상회였다.
검은 장포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감춘 엽현이 상회 안으로 들어가자 한 여인이 그를 맞았다.
“태원상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어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소?”
“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인은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엽현을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 들어선 엽현이 조용히 말했다.
“검이 필요하오.”
“어떤 검이 필요하신지요?”
“성계, 다섯 자루.”
“……!!”
순간 말문이 막힌 여인이 멍하니 엽현을 바라보았다.
“없소?”
엽현의 말에 여인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인이 다급히 방을 빠져 나가고 얼마 후, 방 안으로 삼십 대로 보이는 요염한 미부가 들어왔다.
미부가 웃으며 말했다.
“성계 검 다섯 자루를 찾으신다고요?”
엽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부가 우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물건은 있습니다만, 결제는 어떻게…….”
이때, 엽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납계 하나가 미부에게로 날아갔다. 납계를 살펴본 미부가 눈이 동그래져서 황급히 물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십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가서 물건을 준비하겠습니다.”
미부가 방을 빠져 나가고서 얼마 후,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이 수북이 과일을 접시에 담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예를 차린 여인이 엽현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귀인께선 봉사가 필요하신지요?”
‘봉사? 무슨 봉사?’
엽현이 살짝 당황해하며 물었다.
“어떤… 종류의 봉사를 말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