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27
427화 너 나쁜 놈 아니었어?
엽현의 말을 듣고 백리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듣던 대로 낯가죽이 여간 두꺼운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엽현은 몰라도 제견이라면 일초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이장풍 역시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정 자신이 없거든 둘 다 덤비거라.”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제견이 얼굴을 붉히며 달려들었다. 바로 이때, 제견 앞을 가로막은 엽현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지!”
“너로는 힘들지도 모른다!”
제견의 말에 엽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게 다 생각이 있어.”
“…….”
잠시 망설이던 제견이 마지막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기회를 주었는데도 정말 혼자 덤빌 텐가?”
이장풍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견과 함께 한다고 해서 이장풍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에 하나 제견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숨어있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꼬일 뿐!
이에 고개를 끄덕인 이장풍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엽현을 향하게 했다.
그의 손바닥에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범할수록 평범하지 않은 법!
아니나 다를까. 이장풍의 일 장이 엽현에게 향하는 순간 공간이 마치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점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거대한 검은 동굴이 되어 엽현을 집어삼키려 했다.
[법칙!]이때, 소혼이 소리쳤다.
[주인, 상대는 지금 법칙의 힘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그 말을 들은 엽현은 더더욱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제신황혼을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공간도칙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공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공간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엽현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엽현의 키보다 더 커진 검은 공간이 엽현의 코앞에 당도했다. 보다 못한 제견이 나서려는 순간, 엽현이 자신의 앞에 문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그 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엽현이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검은 공간이 엽현의 주변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공간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엽현이 태연하게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일순 고요해진 장내.
모두의 시선이 고요하게 떠 있는 문에게로 향했다.
“…이건 속임수가 아니더냐?”
이장풍의 말에 엽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와서 말을 바꿀 생각이오?”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이 말과 함께 이장풍이 등을 돌렸다.
이때, 그의 등을 향해 백리선이 소리쳤다.
“이 문주, 귀문을 멸망시킨 장본인을 두고 이대로 가는 것입니까?”
그 말이 이장풍이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손바닥을 펴자 그 위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처음에 이 나무는 푸른색이었으나, 점점 황색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마른 고목이 되었다.
이장풍이 초탈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만물에겐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법이오. 한 세력 또한 번성하는 시기가 있으면 언젠가 쇠퇴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을. 귀문이 먼저 화를 자초했고 그 결과 멸망한 것은 모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오.”
백리선이 물었다.
“심혈을 기울여 그 자리까지 올려놓은 종문이 멸망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요?”
“…방금 전 나는 최선을 다했소. 그러니 아쉬워할 것도 없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장풍의 손바닥 위에 있던 고목이 생기를 회복하더니, 모두의 시선 속에 푸른 가지를 회복했다.
쾅-!
순간 강대한 기운이 이장풍의 내부에서 흘러나와 엽현과 제견을 뒤편으로 밀어냈다.
반면 백리선과 그녀의 곁에 있던 노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백리선이 이장풍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경을 지나 화경(化境)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장풍은 말없이 한참 동안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마지막에 가서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나를 제한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의 편협한 생각이었군…….”
“만약 문주께서 현실을 회피하려고만 했다면, 사념이 계속 고착화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결코 성경을 돌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장풍은 그제야 백리선이 자신을 불러 세운 이유를 깨달았다.
“각주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이장풍이 포권을 취해 예를 차리자, 백리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풍은 이번엔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정당당하게 다시 한번 해볼 용의가 있느냐?”
“…….”
엽현의 얼어붙은 얼굴을 본 이장풍이 허허 웃으며 장내를 떠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엽현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런 식으로도 경지를 돌파할 수 있는 건가?”
이에 백리선이 웃으며 말했다.
“공자가 보기엔 간단해 보이나요? 그가 성경 절정에 수십 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면 깜짝 놀라겠군요.”
“…….”
“우리의 앞에 가장 장애가 되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백리선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가장 강한 적은 자기 결국엔 자신이라 할 수 있었다.
이때, 백리선이 말했다.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하니, 엽 공자는 어서 떠나도록 하세요.”
“백리 각주, 만약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혹시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나요? 그렇다면 적들이 보고 도망갈 수 있도록 한 번 꺼내 보시지요.”
“…….”
이때 백리선이 침묵에 빠진 엽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는 내가 원해서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엽 공자를 장천장성에 보내고 싶어 합니다. 물론 이는 그대를 보호하려 함이기도 하구요.”
엽현이 백리선을 바라보았다.
“그게 누구요?”
“차후 천천히 알게 될 것입니다.”
“…좋소. 가겠소.”
백리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장성은 미앙성과는 매우 다를 것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백리선은 이번엔 독고훤을 향해 말했다.
“엽 공자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고 소저의 실력으로는 그의 짐밖에 되지 않으니 이곳에 남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짧게 대답한 독고훤이 엽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 속엔 온화함이 가득했다.
“어미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시 돌아오는 날엔 미앙성역의 그 누구도 감히 우리 세 모자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순간 독고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너, 너… 방금 나를 어미로 인정한 것이냐?”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그 말에 독고훤이 결국 눈물을 쏟으며 엽현의 품에 달려들었다.
엽현 역시 ‘어머니’라는 말을 뱉은 순간 긴장이 풀리며 온몸의 힘이 쫙 빠져나갔다.
그는 독고훤을 원망하지 않았다.
두 남매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난 모친을 어찌 원망할 수 있으랴.
게다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엽현은 결국 독고훤이 자신의 단둘밖에 없는 가족이란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런 소중한 가족에게 계속 토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토라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엽현은 스스로가 철부지처럼 느껴졌다. 이미 다 큰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앞에서는 그 역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일까?
잠시 후, 독고훤이 엽현을 안고 있던 손을 풀고는 엽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천장성에 가게 되면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엽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조심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독고훤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은 눈초리였지만, 옅은 미소를 보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곧 돌아올게요. 몸조리 잘 하시구요.”
이 말을 끝으로 엽현은 제견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후,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독고훤에게 백리선이 다가왔다.
“독고 소저, 여기 여노(黎老)를 따라가세요. 그가 안전하게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러자 백리선 뒤에 서 있던 노인이 독고훤 앞으로 나왔다.
“이쪽으로 모시겠소.”
노인의 손짓에 독고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독고훤마저 여노와 떠나고 난 뒤, 백리선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백리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작정하고 그를 도우시는군요.”
“문제라도?”
여인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묻자 백리선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미앙성역의 주인께서 어찌하여 고작 하계(下界)에서 온 소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미앙성역의 주인!
눈앞의 여인은 다름 아닌 미앙궁 궁주, 미앙천이었던 것이다.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그나저나 마가족에서 무인들이 빠져나왔다. 아마 그를 쫓기 위함이겠지.”
그 말에 백리선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마가족 역시 분명 그 물건을 탐하려는 것이군요!”
“어디 마가족뿐이겠느냐. 미앙성역 안팎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두 그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만약 그가 끝까지 장천장성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면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흠… 하지만 장천장성 쪽 역시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엔 성경 이상의 강자는 들어갈 수 없으니 적어도 이곳보다는 안전하겠지.”
백리선이 문득 의문 가득한 얼굴로 미앙천을 바라보았다.
“궁주께선 그와 아는 사이십니까?”
“…….”
미앙천이 말없이 바라보자 백리선이 멋쩍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하지 않으시다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에게 그 물건이 있는 한 영원히 이런 상황이 계속될 거란 걸 아셔야 합니다.”
“물건은 그에게 복을 가져다줄 수도, 아니면 화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모두 그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미앙천이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는 당장 가서 그의 모친이 우리 미앙궁의 보호하에 있다고 전파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녀에게 꼬여 드는 것은 사람이건 귀신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쳐 내도록.”
이 말을 마쳤을 때, 미앙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후, 궁주님 성격 급한 것하고는…….”
* * *
한편, 찻집을 빠져 나와 걷던 엽현에게 제견이 문득 물었다.
“누군가 널 돕고 있다.”
“누가?”
엽현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그는 이전에 천역에 온 적이 없는데 누가 자신을 돕는단 말인가?
그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 너는 여전히 매우 약한 상태다. 만약 방금 전의 귀문 문주와 같은 강자를 만나면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제견의 말에 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풍은 비록 성경이었지만, 다른 성경 강자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있었다. 거품이 없는 진정한 성경 강자와 겨루는 것은 아직 엽현에게는 벅찬 일이 분명했다.
이때 제견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지?”
“만보상회!”
“거기는 왜? 아직 훔칠 게 남았나?”
그 말에 엽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그런 나쁜 놈으로 보이는 건가?”
그러자 제견이 엽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 나쁜 놈 아니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