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507
507화 그때까지 부디 살아계시길!
잠시 주저하던 엽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이 말을 꼭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검종을 급히 떠나려고 했던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이유? 어서 말 해 보거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몸 안에는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보물을 노리는 자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으면 분명 그들이 찾아올 것이고, 검종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려 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엽현의 말에 노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 말은 이해하겠다만, 지금까지 네 힘으로 그들을 처리할 수 없었단 말이냐?”
“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숫자가 너무 많아 저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흥!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지금 어디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검종에 있는 한 노부가 책임지고 지켜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그들은 정말 보통 무인들이 아닌지라…….”
“어허! 노부가 지켜준다 약속하지 않았더냐! 어디서 자꾸 계집애처럼 징징대는 것이냐!”
“아이고, 화내지 마십시오. 영감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우는 시늉을 하던 엽현은 다시 밭을 매기 시작했다.
엽현은 꽤나 일을 잘하는 편이었다. 비단 채소 가꾸는 일 외에도 엽 가에 있을 때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성실했던 엽현이었다.
그가 구슬땀을 흘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방금 전 엽현의 말이 계속 맴도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주변 성역에서 우리 검종이 무서워하는 세력은 없다. 우리가 누군지 제대로 아는 자들이라면 함부로 너를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머리 없이 너를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면 이 노부가 파리 잡듯이 모두 찍어 눌러버릴 것이다!”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흠흠, 그럼 잘 하고 있거라, 노부는 한 바퀴 둘러보고 오마. 참, 끝나면 나무에 물 주는 것 잊지 말고.”
말을 마친 노인이 엽현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노인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엽현이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쟁기를 내팽개치며 주저앉았다.
“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이봐, 제견. 네가 볼 때 저 노인의 실력이 어떤 거 같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제견의 대답을 들은 엽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비검을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라면 이미 예측하기 어려운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엽현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이곳 검종은 듣던 대로 심상치 않은 곳이었다.
바로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성주!
당시 성주는 미앙성역에 대군을 보낼 만큼 계옥탑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자면, 여전히 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근처에 성주가 보낸 무인들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 강해져야 해!’
엽현은 더이상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참 있다 올 줄 알았던 노인이 엽현 앞에 나타났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엽현의 앞에 웬 영패 하나가 날아들었다.
“지금부터 너는 검종의 정식제자가 되었다.”
“…….”
엽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앞에 있던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동문 간 경쟁은 허용된다. 단, 선의의 경쟁만 가능하다. 검문은 철저히 실력으로 위계를 정한다. 실력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종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 그리고…….”
노인이 엽현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종문이 단합력을 잃는 순간 멸망의 징조를 보이는 것이다. 너도 이제 검종의 제자가 되었으니, 종문의 단합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알겠느냐?”
“…누가 먼저 저를 건들지만 않는다면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 저를 향해 음모나 계략을 걸어온다면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노인의 안색이 살짝 변했지만, 엽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적의(敵意)를 보이는 자에겐 살의(殺意)를 보여준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켜왔던 불멸의 법칙이었다.
엽현을 바라보던 노인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정말이지 독기로 가득 차 있구나. 너의 독기는 언젠가 스스로를 자멸의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
“…….”
“그것 말고도 네게 한 가지 지적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검은 확실히 힘과 속도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보자면 검종의 젊은 무인 중 너를 따라올 자는 몇 되지 않을 게다. 하지만 검은 단순히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 너 같이 ‘형식류(形式流)’에 속한 무인들은 종종 힘과 속도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서 탈이다.”
“형…식류?”
엽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자,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이쪽 성역에선 무인을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의식류(意識流)’, 두 번째는 ‘경계류(境界流)’,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식류다. 그리고 형식류 중에는 그보다 높은 경지인 ‘초 형식류(超形式流)’가 있다.”
“초 형식류는 형식류 무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류의 무인이 낼 수 있는 힘과 속도는 결국 신체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다. 즉, 언젠가 정체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초 형식류란 그 한계를 벗어난 무인을 지칭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 하지만 그 경지까지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이들은 평생이 걸려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말지.”
“제게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엽현이 공손한 자세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흠… 그렇다면 계속해서 형식류에 집중하고 싶은 게냐?”
“할 수만 있다면, 의식류라는 것도 배워보고 싶습니다.”
“후후, 욕심이 과한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나쁜 생각은 아니다. 형식류에 집중한 무인은 의식류의 무인을 만나게 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까.”
그 말을 들은 엽현이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세 가지 유파(流派) 중에 가장 강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니 이렇다 하고 단정할 순 없다. 자, 네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노인이 무릎을 감싸 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때, 그가 엽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듣거라. 노부는 아직 너의 심성이나 성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너의 천부적인 재능에 투자하려는 것뿐이다. 다만 혹시라도 너를 받아들인 것이 종문에 화가 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구나.”
엽현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솔직히 말해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르신의 걱정이 무엇인지 확인했으니 함부로 설치지도 않을 것이며, 종주의 지위도 넘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노인이 갑자기 화를 냈다.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더냐!? 종주는 실력이 있는 놈이 하는 것이거늘, 저 약해 빠진 놈들을 종주 자리에 앉히란 말이냐?”
“…….”
“으휴, 이놈아. 내가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널 더러 죽은 사람처럼 지내라는 것이 아니다. 종문 내에서 자유롭게 경쟁은 하되 괜한 분란은 피하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집안이 망하는 이유는 내부에 있지 않았더냐.”
“하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수록 어째 안심이 되질 않는구나. 어디 말뿐인 놈들이 한 둘이더냐?”
“…….”
“따라서 오너라. 네게 초 형식류 고수 하나를 소개시켜 줄 터이니.”
노인이 그대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에 엽현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이때, 계옥탑에서 제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다!]그 말에 엽현이 울컥했다.
“너까지 왜 그래? 조용히 지내기로 다짐했다니까?”
[흥,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지금까지 네가 지나친 곳에서 사건이 안 터진 적이 있었냐? 저 영감이 저리 말하는 것도 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지.]“…….”
이렇게 토닥거리는 사이 엽현과 노인은 신무성 안에 있는 한 대장간에 도착했다.
대장간 안에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거한 한 명이 땀을 흘리며 쇳덩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때 노인을 발견한 거한이 들고 있던 쇠망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게 누구야. 벌써 뒈져버린 줄 알았던 영감탱이가 여긴 어쩐 일인가? 관을 짜러 왔으면 한참 잘못 찾아왔는데?”
거한에게 다가간 노인이 엽현을 보며 말했다.
“뭣 하고 있느냐? 사부에게 예를 차리지 않고.”
이에 엽현이 당황하면서도 거한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제자 엽현, 사부를 뵙습니다!”
“뭐? 제에자아?”
거한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때 노인이 말했다.
“진철장(陳鐵匠), 불쑥 찾아와서 염치가 없긴 하지만, 이번에 보기 드문 재능을 발견해서 네게 데려온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거라, 이놈은 분명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목이다.”
“…….”
진철장이 가만히 노인을 응시했다.
“이 영감탱이가 어디서 약을 팔아?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새로 제자나 받게 생겼어? 염병, 이제 똥오줌 못 가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허, 진 가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제자 하나쯤 거둬도 좋지 않겠느냐? 평생을 닦아 온 전승을 네 놈 몸뚱이와 같이 묻어버릴 생각이냐?”
“돌아가라, 생각 없다.”
진철장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다시 망치를 주워들고 쇠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노인도 얼굴이 울긋불긋해져서 돌아섰다.
“이만 가자!”
노인의 말에 엽현이 쭈뼛쭈뼛 그의 뒤를 쫓았다.
이때, 노인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진철장을 향해 홱 돌아섰다.
“열 뻗쳐서 못 참겠다! 당장 저 늙은 돼지 놈을 치거라!”
노인의 말에 엽현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예… 예?”
“뭐 하고 있느냐? 저놈을 죽여 버리라니까! 못 죽이면 내 손에 네가 죽는다!”
그 말에 엽현이 진철장을 돌아보았다. 순간 두 자루 비검이 진철장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목표물에 닿지 못한 채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엽현은 이번에는 검을 들고 직접 허공을 베었다.
쉭-!
한 줄기 검광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이때, 진철장이 머리카락 한 올을 꼬아서 튕겨내자 날아오던 검광이 그대로 흩어졌다.
바로 이때, 진철장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지면을 강하게 디뎠다. 순간 사방의 공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때 무너져 내리는 공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 자루 검!
날카롭게 파고들던 검은 진철장의 미간에서 손가락 몇 마디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곰같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검 날을 잡아낸 진철장.
엽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방금과는 달리 매우 진중했다.
“환경에 검을 섞다니…….”
이때 진철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만 너를 거둘 순 없다. 왜냐하면 너보다 더 재능 있는 아이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철장은 잡고 있던 검을 한쪽으로 제쳐 놓고는, 다시 돌아가 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뒤에 있던 노인이 엽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비록 저는 더 강해지길 원하지만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구걸하고 싶진 않습니다.”
말을 마친 엽현이 다시 멀리 진철장을 돌아보았다.
“일 년! 일 년 후엔 누구보다 더 강한 무인이 되어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살아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