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508
508화 검의는 생명이다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엽현은 무척이나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구걸할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한 명의 자존심 강한 무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랄 순 없는 일이다. 기왕 상대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했다.
게다가 인간이 기댈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
엽현의 말을 들은 노인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다. 저놈 말고도 강한 놈은 세고 셌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가자!”
노인이 뒤돌아서자, 엽현이 그 뒤를 따랐다.
보무도 당당히 걷는 두 사람, 진철장은 아무 말 없이 그 들을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안쪽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나오더니 엽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부,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잘 기억해 두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너의 가장 큰 적수로 성장할 테니까.”
“…….”
남자는 그 말에 엽현을 다시 돌아보았다. 눈에 담아두기라도 하려는 듯.
* * *
엽현과 노인은 원래 있던 채소밭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무 의자에 앉은 노인이 엽현을 앞에 두고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 늙은이는 진철장이라고 한다. 신무성 안에서, 아니, 이 주변의 성역을 통틀어 형식류에 가장 능통한 무인이라 할 수 있지. 그의 힘과 속도는 도경(道境) 강자들을 압도할 정도고, 나 역시 그놈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줘야 할 정도다. 물론 내가 놈보다 약하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
“흠흠, 아무튼 그놈에게 배웠더라면 큰 수확이 있었을 텐데, 네게는 아쉽게 됐구나.”
이에 엽현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르신에게 배우면 되니까요.”
그 말에 노인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앞서 나와 대결할 때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
“아닙니다.”
“공력의 어느 정도나 사용했었느냐?”
“음… 절반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노인은 물론 진철장을 상대로도 엽현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신왕좌, 신왕검, 그리고 진혼검을 꺼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이 세무기를 사용한다면 누구라도 엽현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하리라.
엽현의 대답에 노인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닌 게 확실하구나. 허나, 너의 내력에 대해 더이상 캐묻진 않겠다. 지금 너는 검종의 제자일 뿐이니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흉악한 도적도 아니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 대답에 노인이 웃음을 보였다.
“그거면 됐다.”
이때, 노인이 다시 무릎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의 힘과 속도에 대해선 내가 가르쳐 줄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검의(劍意)와 검경(意境)에 대해선 일러줄 것이 조금 있지. 그 전에 네 검의를 내게 보여주거라.”
엽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자신의 검의를 방출했다.
그러자 선악검의가 흘러나와 순식간에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때 선악검의를 본 노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검의가… 둘이라고?”
“그렇습니다.”
“이건 노부도 예상치 못했다. 그래, 평소에 검의를 어떻게 운용하느냐?”
‘검의를 어떻게 운용하냐고?’
엽현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검을 쓸 때 검의를 방출했을 뿐, 별다른 운용법을 생각지는 않았다.
“흠, 지금 보니 아직 잘 모르는가 보구나. 잘 듣거라. 검의와 검경 두 가지 모두 매우 중요하다. 특히 검의는 한 무인의 검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검의를 개발할수록 그 위력은 더욱 강해진다.”
“거, 검의를 개발한다니요?”
엽현이 황망히 묻자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검도신념(劍道信念)을 떠 올려 보거라. 검의는 바로 너의 검도신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쉬울 게다.”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엽현이 고개를 젓자, 노인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순간, 그의 손가락 위로 가느다란 기검(氣劍 )이 생성됐다.
엽현의 시선에 기검으로 향한 순간, 기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엽현의 눈엔 잔상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 정도라면 자신의 기검과 엇비슷한 정도라 할 수 있었다.
“방금이 내 검의 정상적인 속도였다. 자, 다시 한번 보거라.”
노인이 재차 손가락을 들어 기검을 생성해냈다.
노인의 손가락이 곧 정면의 산으로 향한 순간!
쉭-!
먼 산을 향해 날아간 기검의 속도는 처음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의(劍意)였다. 검의가 담긴 기검은 뭔가 더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머릿속에 이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간 순간 엽현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검의가 깃든 검은 생명을 얻는 셈이다.”
‘생명이라…….’
엽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때 노인이 설명을 이어갔다.
“검수는 검을 수련함과 동시에 마음을 수련한다. 그리고 검은 검수의 마음, 즉, 의(意)를 읽을 수 있다. 검수의 의중이 검에 깃들어야지만 그때부터 검은 생명을 얻는 것이지.”
“하지만 어떤 검들은 이미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벌써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닌…….”
노인이 엽현의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검령(劍靈)이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줄 아느냐? 그런 검들도 마찬가지다. 검수의 검의가 깃들지 않은 검은 영혼이 있으나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즉, 검의 위력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지.”
정곡을 찔린 엽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령이 매번 말했듯, 그는 아직 진혼검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검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평범한 막대기도 강력한 검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이때 노인이 소매를 펄럭이자 엽현 앞에 나뭇가지 하나가 떨어졌다.
엽현이 나뭇가지를 줍자 노인이 말했다.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다. 물론 네가 휘두르면 몽둥이 정도가 될 순 있겠지만, 여전히 나뭇가지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엽현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노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
어떤 종류가 됐든 간에, 검이 강하고 약하고는 전적으로 검수에 달린 것이다.
마치 천녀의 손에 있는 나뭇가지가 그 어떤 절세보검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냈듯이!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보검이 아닌 평범한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왜일까.
사실 이는 검도에 대한 조예의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조예란 의경(意境)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까지 검을 휘둘러오면서 힘과 속도만을 중시했지, 이러한 점은 등한시했던 것이다.
검의만 있다면 보검이든 나뭇가지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엽현은 휼륭한 검을 찾아 나서는 데만 집중했다.
하지만 검의만 있다면 물질적인 검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 절세보검이 될 수 있었다.
이때, 엽현의 손에 있던 나뭇가지에 검의가 맺히기 시작했다.
“기억하거라. 단순히 검의를 나뭇가지 위에 덮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에 생명을 불어넣어야만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조금 힘들 것이니 천천히 익혀 나가보도록 하거라!”
말을 마친 노인이 장내를 빠져나갔다.
노인이 사라지자 엽현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엔 여전히 검의가 뒤덮여 있었다.
한참 동안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엽현은 천천히 눈을 감고 노인이 한 말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엽현과 헤어진 노인은 망공산(望空山)을 찾았다. 이곳은 검종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검종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망공전(望空殿) 앞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청년의 모습을 한 조각상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어깨에 걸터앉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흉상 앞에 잠시 멈춰 예를 올린 노인은 곧장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발을 디딘 순간, 그의 앞에 중년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이현풍(李玄風), 검종의 종주였다.
잠시 표정 없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던 이현풍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노인을 맞이했다.
“사숙, 듣자 하니 제자를 거두셨다지요?”
“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냐?”
노인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이현풍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숙의 제자라면 저와 같은 항렬이 되는 것인데……”
“왜, 어린놈이 너와 맞먹을까 봐 억울한 게냐?”
“…….”
이현풍이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이 한켠에 놓여 있는 의자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자질이 괜찮은 놈이다. 내가 그저 그런 놈을 거둘 리가 없지 않느냐?”
“사숙의 마음에 든 자라면 필시 그렇겠지요.”
“그런데…….”
노인이 이현풍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 아이에게 감시를 붙였더냐?”
“…….”
“내가 묻지 않느냐!”
노인의 호통에 이현풍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사숙이 모르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놈은 절대 평범한 무인이 아닙니다. 그놈에겐 그 물건이 있단 말입니다.”
“그 물건?”
노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제 현상방 첫 줄에 있는 보물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의 미간 사이의 골이 더욱 깊게 패였다.
이현풍이 말을 이어갔다.
“그 보물은 사유계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소유자는 그 힘을 빌어 오유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합니다!”
“그래서, 네가 지금 그 물건을 탐하겠다는 것이냐?”
“…….”
“사유계에서도 빌빌대는 놈이 오유계에 가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사숙!”
이현풍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건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무슨 기회?”
“우리 검종이 언제까지 이 신무성에 처박혀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제 세를 넓힐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현풍의 말에 노인이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나 네 사부나 생각하는 것이 아주 똑같구나. 너는 조사님의 유지를 잊어버린 것이냐? 세상사에 함부로 관여하지 말 것! 이 말을 지킨 덕분에 어지러운 우주의 질서 속에서 검종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더냐!”
“사숙,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저기 저 성주를 보십시오. 당시 겨우 조그마한 세력의 왕이었던 자가 이제 주변 성역 전체를 거느리는 성주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의 영향력은 이미 우리 검종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입니다.”
“놈!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제 아무리 성주라 하더라도 우리 검종을 건드릴 수 있다더냐?”
이현풍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숙, 저는 그저 사부의 한을 풀어드리려는 것뿐입니다. 검종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검수일맥을 진흥시키는 것 말입니다!”
이현풍의 완강한 태도에 노인이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현재 검종을 주관하는 것은 네 놈이니, 노부는 더이상 참견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꼬마 녀석은 내가 거두었으니, 허튼짓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이현풍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숙, 한 말씀 드리자면, 신무성 주변엔 이미 정체 모를 강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놈 때문에 몰려든 것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검종과는 관련 없는 일이다. 신경 쓸 것 없다.”
이 말을 끝으로 노인은 대전을 떠났다.
대전 안에 홀로 남은 이현풍.
한동안 가만히 서서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잠시 후 문을 나와 대전 앞에 있는 조각상 앞에 섰다. 이때 조각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변해갔다.
* * *
같은 시각, 어느 봉우리 위의 채소밭.
엽현은 두 시진이 지나도록 제자리에 앉아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 위엔 여전히 검의가 맺혀 있었다.
‘검의라…….’
엽현은 오래전 이미 자신의 검도를 정의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그의 검도는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사람에 따라 검은 달라진 다라……. 왜 그럴까?’
엽현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이때,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누군가의 음성.
[검은 물고기와 같다. 물이 없으면 죽고 말지.]갑작스런 불청객의 목소리에 엽현은 화들짝 놀랐다.
“누구냐!”
이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엽현의 표정이 돌연 새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