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517
517화 안 죽으면 안 될까?
‘검종이 타협을!?’
엽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걸 어찌 확신하오?”
“엽 공자. 그대는 검종의 제자가 되고 난 후 한 번이라도 종주를 본 적이 있소?”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검종에 들어온 이래로 월무진을 제외하고는 고위층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는 분명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검종의 종주는 매우 야심이 큰 자로 알려져 있소. 신무성 밖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그로서는 외부 세력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그대를 지키기 위해 저들과 싸우게 되면 많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인데, 그때 경쟁 관계에 있는 무원이라도 침입한다면 검종의 기둥이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소.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봤을 때, 검종은 반드시 그대를 내어주고 싸움을 피하려 할 것이오!”
엽현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백지의 추론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지가 말을 이어갔다.
“여섯 명의 도경 강자는 겨우 맛보기일 뿐이오. 저들의 본진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소. 만약 그대가 지금 몸을 뺀다면, 검종도 순순히 그대를 보내줄 여지가 있소. 하지만 검종이 그대 때문에 괜히 피해를 입는 상황이 오면, 양측은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더욱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오.”
“하지만 내 동생과 친구들이 아직 신무성에 있는데……. 내가 떠난다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소?”
“그건 무원의 태도에 달렸소. 만약 무원이 자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면 적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고, 반대로 검종의 종주처럼 야심만만하다면…….”
백지는 말을 아끼자, 엽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처지에 빠질 줄은 미처 몰랐소.”
바로 이때, 그들의 앞에 기척도 없이 월무진이 나타났다.
월무진이 엽현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쳤다.
“가거라! 왜 아직도 어물거리고 있는 게냐?”
“어르신!”
“만약 네가 일 년만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지금쯤 핵심제자가 되어 우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검종은 갓 제자가 된 너를 위해 출혈을 마다할 것 같지는 않구나.”
“…….”
“후… 검종 수뇌부는 이미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로 인해 불이익이 생길 것을 걱정하고 있지. 그러니 저 계집애 말대로 어서 검종을 떠나거라.”
엽현이 뭐라 대꾸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낯익은 중년인 하나가 장내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검종의 종주, 이현풍이었다.
이현풍이 엽현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어딜 가려는 게냐? 너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 말에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설마 나를 저들에게 내어 주려 하는 것이오?”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이때 월무진이 이현풍의 말을 잘라 들어왔다.
“이놈! 결국 네 놈의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구나! 우리 검종이 언제부터 다른 세력에게 머리를 조아렸단 말이냐!”
“사숙, 이것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흥! 그것이 아니면, 종문의 제자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테냐?”
“사숙, 뭔가 착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는 검종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검종의 계보에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월무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오호라, 이제 보니 너는 처음부터 내 체면을 봐 주지 않을 생각이었구나!”
“사숙, 진정하십시오. 이 일은 결코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삐끗하다간 검종이 다른 거대 세력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더 이상 너와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엽현, 뭐 하고 있느냐? 빨리 가지 않고!”
순간 이현풍이 엽현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월무진이 차가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검종이 직접 제자를 붙잡아다 내어주는 것과 이놈이 검종 밖에서 적들에게 붙잡히는 것 중에 어느 편이 검종의 체면을 더 지키는 일이겠느냐?”
“…….”
“아니면… 혹시 너 역시 녀석의 물건을 탐하고 있었던 게냐?”
그 말에 이현풍이 입을 꾹 닫았다.
“잘 생각해 보거라. 이 아이가 미앙성역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배후에 강력한 누군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녀석을 핍박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적을 만들 뿐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잠시 후, 눈을 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이현풍이 마침내 눈을 뜨고 엽현을 응시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이후의 검종과 너의 관계는 모두 운명에 맡기겠다.”
이 말을 끝으로 이현풍이 등을 돌렸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당장 떠나거라!”
이현풍의 음성이 채소밭에 울려 퍼지자 월무진이 엽현에게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가거라! 어서!”
그러자 엽현이 월무진을 잠시 바라보고는 마지막으로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엽현이 백지를 바라보자, 백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이하게 생긴 부적을 찢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장내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월무진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로 자리를 옮겼다.
이윽고 월무진은 검종의 산문 앞에 있는 거대 조각상 앞에 도착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조각상 아래쪽에는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검종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한참 동안 글귀를 바라보던 월무진. 그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져만 갔다.
지금 살아있는 검종의 무인들중 조각상의 주인을 만난 자는 없었다.
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는 것은 단지 두 종문의 조사들이 이 땅에 도착하여 각각 한 명씩의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검종과 무원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서글픈 표정으로 조각상을 바라보던 월무진은 얼마 후 자리를 떠났다. 이제 홀로 남은 조각상만이 쓸쓸한 눈으로 신무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같은 시각 검종의 어느 대전 앞.
이현풍 역시 표정 없는 얼굴로 우뚝 솟은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노인 한 명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종주, 다 잡은 고기를 왜 놓아준 것입니까?”
“놓아 준 것으로 보이시오?”
“그렇다면…….”
노인은 곧 이현풍의 뜻을 깨닫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종은 결코 엽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엽현에게 있는 보물을 뺏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엽현은 어쨌든 잠시나마 검종에 속한 무인이었다. 만약 검종이 드러내놓고 엽현을 죽인다면 검종의 명성은 곧바로 땅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검종이 엽현을 죽이고 보물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신무성으로 달려올 것이 뻔했다.
암습!
이현풍은 엽현을 보내고 몰래 뒤에서 공격할 생각을 한 것이다.
“허나 종주, 놈의 실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알고 있소. 걱정 마시오.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
* * *
같은 시각, 무원의 한 전각.
혁련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신무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현풍이 결국 엽현을 내보냈다는군.”
“그것이 사실입니까?”
곁에 있던 진산의 말에 혁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자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그는 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 신무성을 통일하고 싶을 것이오. 아니지, 그의 야심은 신무성 밖에 있을지도.”
“우리 무원도 마음 놓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외부 세력들이 엽령을 인질로 잡기 위해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 혼란을 틈타 검종 놈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우리로선 굉장히 곤란해질 것입니다.”
“매우 가능성 있는 얘기요.”
“허면 이제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여차하면 엽령을 내보내는 것이…….”
혁련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를 내줄 순 없소.”
“어째서…….”
“엽령을 내보내게 되면 안란수 등 엽현의 친구들 역시 무원을 떠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조만간 무원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했던 우리의 계획도 모두 수포가 되고 말 것이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처지가 난감해질 것입니다.”
혁련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무원이나 검종은 신무성 밖에 있는 세력들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소. 단지 이현풍은 자신의 야망 때문에 저들과 타협한 것뿐이오. 우리가 미리 준비를 해놓는다면 충분히 외부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소.”
혁련천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야망이란 것은 한 번 중독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오. 우리 무원은 검종을 본보기 삼아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오. 그리고 부원장, 그대는 지금부터 만노(萬老)와 함께 문단속을 철저히 하시오. 만약 무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자가 보인다면 주저 없이 죽여버려도 좋소.”
진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엽현 그놈은…….”
진산의 물음에 혁련천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그놈까지 돌볼 여유는 없소. 놈이 죽고 사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에 달렸소.”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진산은 혁련천을 남겨 두고 전각을 떠났다.
* * *
신무성 안.
이때 엽현과 백지는 이미 통보상회 대문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엽현이 백지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백 소저, 고맙소!”
“별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나는 이만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소!”
엽현은 백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뒤로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딜 가는 게요? 통보상회에 숨어 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소?”
백지의 말에 엽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계속 여기 머문다면 결국 그대들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소. 그러니 다음을 기약하도록 합시다!”
이 말과 동시에 엽현이 한 줄기 검광으로 변해 하늘로 솟구쳤다.
이 환한 검광은 신무성 어디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엽현이 굳이 이렇게 떠나는 이유는 그가 통보상회를 떠났다는 것을 적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되면 통보상회는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백지의 뒤에 나타난 미부가 막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검광을 바라보았다.
“저래 보여도 의리 하나는 있군요.”
잠시 말이 없던 백지가 무언가 결심한 듯 미부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그대는 신무성 안과 밖에 있는 외부 세력들, 검종 그리고 무원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순간 미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가씨! 정말 우리와 무관한 소용돌이에 휘말릴 작정이십니까?”
백지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할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통보상회는 멸망한다. 그럴 바에 거하게 도박 한 번 해 보는 거야.”
“…….”
* * *
무원의 어느 장원.
장원에 딸린 뜰 한 가운데, 안란수가 가만히 서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미동하지 않는 것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이때, 연만리가 기척도 없이 대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팔짱을 끼고서 담벼락에 몸을 기댄 연만리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결국 검종에서 쫓겨났다는군!”
“…그래, 나도 조금 전에 들었어.”
“도와주러 가야 할까?”
“그럴 필요 없어.”
안란수의 말에 연만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앉아서 네 서방님이 죽는 걸 보겠다고?”
“지금의 그는 혼자 있을 때가 더 강하니까.”
안란수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만리는 안란수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현은 시작은 검수였지만, 지금은 살수라도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가 마음먹고 몸을 숨긴다면 웬만한 자들은 결코 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란수 등이 엽현을 도와 싸우고자 한다면 엽현은 위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고, 그의 상황은 도리어 나빠질 수도 있다.
“고독한 싸움을 하게 되겠군.”
“그래도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강구에게도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내가 가서 전하도록 하지.”
연만리는 그 말을 끝으로 장원 밖으로 사라졌다.
장원에 홀로 남은 안란수는 다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신무성 밖.
엽현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터를 거닐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무인들은 엽현이 신무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통보상회를 나설 때 기척이 너무나 컸던 탓이었다.
물론 이는 엽현이 원한 것이었다.
바로 이때, 몇 개의 강대한 기운이 정적을 뚫고 엽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마치 한밤중처럼 깜깜해지더니, 그의 사방에서 철로 된 검은 벽들이 솟구쳐 올랐다.
진법!?
이때 엽현이 정면을 바라보자 검을 품 안에 안고 서 있는 노인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본 엽현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이런……. 제일 먼저 나를 노리는 것이 공교롭게도 검종일 줄이야……”
엽현의 비아냥거림에도 노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테냐?”
“어떻게 죽을 거냐고?”
엽현이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냥 안 죽으면 안 될까?”